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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수 Apr 26. 2024

홍상수, <여행자의 필요>

새롭지 않아야 하지만 극도로 새로워진 것

홍상수(Hong Sang-soo), <여행자의 필요>(A Traveler's Needs) 

- 새롭지 않아야 하지만 극도로 새로워진 것     

유령은 나타나서는 안 될 망자가 현현하는 하나의 사건이다. 동시에 유령은 살아생전의 망자와 결코 같지 않다. 육체는 사멸했기에 투명한 영혼의 형태로 나타나거나, 특정 사물이나 타인의 몸을 빌려 이승에 간접적으로 돌아온다. 그래서 유령은 살아생전의 고인과 쏙 빼닮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망자를 온당 반영한다고 말하기도 어려운 애매모호한 것이다. 그 이유 중 하나는 유령이 여러 경계를 옮겨 다니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유령은 저승에 속해야 하지만 저승으로 가길 거부하고 이승에 나타나는 존재이며, 심지어 유령은 객관적인 외부 세계와 유령을 목도한 주체의 주관적인 표상까지 오간다. 개개인의 표상 속으로 침투하는 유령은 다수가 공동으로 목격하는 사례가 거의 없다. 유령의 목격자는 언제나 주관적인 하나이며, 그 누구도 증언을 객관적으로 보조해줄 수 없거니와, 유령을 보고자 애걸복걸하는 이에겐 절대 나타나지 않는다. 즉 유령은 존재하지만 존재하지 않는 것, 그 어디에도 존재할 수 있지만 그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희한한 것이다.     

이 유령의 성질과 홍상수의 영화는 쏙 빼닮아 있다. 홍상수는 근작 <물안에서>를 통해 유령을 직접적으로 언급하며, 유령과 닮은 영화를 연출하였고, 외의 많은 작품에서도 유령의 성질을 영화에 차용한다. 최근 홍상수의 작품은 그 어느 시기보다 더 직접적으로 자전적 이야기를 풀어간다고 감상자들이 '믿고' 있다. <소설가의 영화>, <도망친 여자> 등의 작품에서 배역인지 본인인지 분간되지 않는 김민희가 여배우로서, 때론 부인으로서 무언가를 진술한다. 하지만 홍상수의 영화는 일반적인 현실의 구조를 비틀며 실험하는 픽션이지, 절대 다큐멘터리가 아니다. 김민희는 분명 배역에게 주어진 대사를 발화하는 것이지, 절대 즉흥적으로 말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또한 홍상수와 김민희의 사적인 삶 역시 베일에 가려져 있기에 영화 속 자전성으로 일컬어진 것들을 참이라 단언할 수 없다. 이래서 그의 영화는 분명 현실에 속하는 것처럼 보이더라도, 동시에 현실이라 단언할 수 없는 가상 사이의 애매한 경계에 위치한다. 

더해서 그는 유령성을 영화 내에서 서로 닮은 것들을 이어내며 구축한다. <우리의 하루> 속 교차 편집되는 남과 여는 분명 닮았고 이어지기에 각자가 진술하고 있는 가족이라고 추측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어디에도 구체적인 물증은 없다. 단지 목격했다거나 유사하다는 진술만 갖고 존재하는 유령처럼 그럴듯하게 이어질 뿐이다. 부녀관계가 아닐 수 있지만 부녀관계라고 개개인의 뇌리 속에서 착각이 발생한다.

그래서 주관적인 유령과 객관적인 실재가 뒤섞인 현실은 교란과 충돌로 가득하다. <탑>에서 발생하는 의견 충돌과 서로간의 오해, 실망은 상대를 현실에 효력이 없는 유령과도 같은 것으로 판단한 결과다. 실체는 자신을 유령으로 여기는 언질에 반발하거나, 이와 상반된 돌출 행동을 일삼는다. 이에 홍상수의 작품은 그 자신도 올해 베를린 영화제에서 밝혔듯, 감독 본인도 무엇을 하는지 모르는 작업이다. 현실과 분리된 픽션도 아니요, 그렇다고 해서 현실과 밀착한 다큐멘터리도 아닌, 그 사이에 어정쩡하게 놓이며 그 어디에도 존재하지만 그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알지만 모르는' 유령과도 같은 영화다.      


홍상수가 대배우 이자벨 위페르와 세 번째로 함께한 신작 <여행자의 필요>에서도 유령처럼 신묘한 존재 '이리스'가 등장한다. 그녀의 이름은 '아이리스'라고 자주 오인된다. 그럴 때마다 그녀는 엄격하게 자신의 이름은 이리스라고 정정한다. 그래서 그녀에게 이리스라는 이름은 꽤 중요해 보인다. 이리스는 그리스 신화 속 무지개 여신으로, 올림포스 12신의 전령 역할을 겸하며 신들의 뜻을 인간에게 전하는 존재다. 그 신과 동명인 이리스 또한 무언가를 알리는 존재로 영화에서 등장한다. 새로운 지혜나 예언을 알리는 이리스의 어원에 걸맞게, 그녀는 평범하고 익히 아는 것에 흥미를 두지 않는다. 도입부에서 이리스는 이송이 숙제를 잘 해왔다는 것을, 즉 익히 아는 것을 확인한다. 그 현장은 조금도 새롭지 않다. 그래서 이리스는 따분한 듯 입을 삐쭉거리고, 심심한 듯 손가락으로 필기구를 굴리며 딴 짓 하며, 새로운 대화를 하고 싶은지 계속 뜸을 들인다. 그녀는 불어 교습 시 교과서를 이용하지 않고 한두 달 전에 즉흥적으로 고안한 실험적인 교수법을 도입할 정도다. 그것조차 질리면 또 다른 실험을 시도할 사람이 바로 이리스다.

그녀는 영화 속 이송과 원주의 연주를 특히나 지겨워한다. 담배 피러 나간다고 핑계를 대지만, 그녀의 표정은 견딜 수 없을 만큼 따분해서 나간다는 것을 알려준다. <여행자의 필요> 속 음악은 두 층위로 나뉜다. 이송과 원주에게 음악은 무한경쟁사회인 한국에서 인정받기 위한 하나의 수단이었다. 연주하는 그녀들은 분명 행복함과 동시에, 열등감을 느끼며 자신의 부족함과 모자람에 짜증을 낸다. 그녀들의 연주는 자신만의 특유한 감정을 표현하는 방법이 아니라, 다함께 하나의 곡을 연주하며 줄을 세우는 커리큘럼의 영역에 속해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이리스의 '리코더 연주'와 확연하게 상반된다. 이송과 원주가 타인에게 들려주기 위해 연주를 한다면, 이리스는 인국이 이상한 눈으로 힐끗거려도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미숙한 연주를 꿋꿋하게 이어간다. 그녀는 아마도 프랑스에서 불어본 적 없는 리코더가 신기한 것이요, 그것을 연주하며 유아기로 되돌아간 제 감정을 즐기는 것이랴. 즉 이송과 원주의 연주가 지극히 ‘관습’적이고 이에 따라 객체로 전락한다면, 이리스는 관습에서 탈출하며 주체를 회복하는 연주자이자 여행자다. 

여행자인 그녀는 ‘산파’의 역할을 도맡는다. 그것은 문자 그대로의 산파가 아니라, 철학 속 앎으로 나아가는 대화법인 산파술로서 의미다. 이리스가 산파로서 이송과 원주에게 필요하다면, 그녀들은 무언가를 모르고 있다는 것이다. 그녀들의 무지는 이리스에게 배우는 불어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그 불어로 표현하고자 하는 자신의 '내면'이다. 그녀들의 관습적 연주 역시 오직 '형식'만 있을 뿐 '내용'이 부재한다. 누구나 다 하는 연주이지, 자신의 울림이나 감정을 담은 연주가 아니기 때문이다. 홍상수는 가사가 부재한 기악음악의 추상성보다, 형식주의에 주목한다. 그 음악은 알맹이나 당위성 없이, 그저 형식적으로 일상을 되풀이하는 관행, 아비투스(관습적인 습관)를 가리키는 것이다. 연주되는 당시의 숏이 이를 가시화한다. 이리스가 궁금해 하는 이송은 프레임 바깥으로 사라지고, 대신 뻔하디 뻔한 음향이 시각적 빈자리에 채워지니, 이로써 지겨워진 이리스 역시 현장을 이탈하여 프레임 바깥으로 사라진다. 원주가 연주할 때도 마찬가지다. 여기서 영화의 카메라는 오직 이리스에 의해서 좌우된다. 이리스가 움직이면 따라서 이동하지만, 다른 사람들이 이동할 땐 꿈쩍도 않는다. 그런데 영화의 카메라는 대체로 고정되어 있어서 패닝이나 틸트로도 그녀를 따라가지 못할 때면 홍상수는 '편집'을 이용한다. 그렇게 이어낸, 관습을 거부한 이리스가 이어지는 숏에선 새롭지 않은 것이지만 새롭게 느껴지고, 본디 알았지만 모르게 된 ‘감정’과 조우한다. 그래서 관습을 따르지 않는 이리스의 이상한 교수법은 타성에 젖은 우리의 '왜?'를 되찾게 해준다.      


홍상수는 알았지만 모른 것, 몰랐지만 알았던 것을 ‘전개’나 ‘구성’으로 가시화하기에, 감상자의 눈에 본 작품은 다소 낯설고 이질적이다. 일반적인 영화라면 본 작품의 순서가 뒤집어졌을 것이다. 인국이 공원에서 리코더를 연주하는 이리스를 조우하고, 이후 연인이 된 그녀에게 불어 강습을 제안하며, 그렇게 이리스가 이송 및 원주와 만나는 에피소드가 이어지는 것이 일반적인 구성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본 작품의 구성은 대뜸 이리스가 불어 강습을 하고 있고, 점차 그녀 뒤를 밟아가며 왜 불어 강습을 하게 됐는지 드러난다. 이러한 구성이 이유나 원인을 모른 채로, 일단 관습을 따라서 하고 보는 우리의 의식과 같을 지다. 본디 당위성을 갖고 무언가를 해야 하지만, 그 순서가 뒤집힌 우리는 일단 하고 나서 이유를 찾는 것이다. 그러나 늦으면 어떠한가, 어떻게든 찾았으면 된 것이다. 

그렇게 찾아내면 나 자신으로선 같지만, 동시에 ‘다른 사람이 된 내’가 편집으로 이어진다. 그 자신은 일상을 확장하여 시야를 넓힌다. 영화에서 유별난 줌아웃은 다음과 같이 사용된다. 본디 베란다에 이리스 혼자 있었고, 카메라는 그녀를 클로즈업하였다. 이후 이송이 들어오니 이리스와 그녀를 함께 포착하기 위해 줌아웃을 이용하고, 이렇게 확장된 시야에서 이리스는 이송의 감정을, 이송은 자신의 내면과 조우한다. 직후 이리스는 이송과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산책한다. 이 때 마을 기부자들의 이름이 적힌 비석을 목격한다. 일상에서 이송은 비석에 큰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런데 비석을 일상에서 접할 수 없던 이리스는 호기심에 차 많은 질문을 쏟아내고, 거기에 답하는 이송은 도중 고인이 된 아버지를 떠올리며 감정이 벅차오른다. 이 때도 비석만 포착되던 숏에 이리스와 이송까지 아우를 수 있는 줌아웃을 사용한다. 외의 줌아웃도 쓰임은 크게 다르지 않고, 인물들은 몰랐던 나, 이전과 달리 더 많은 것을 깨우친 내가 된다.

줌아웃뿐만 아니라 줌인 역시 홍상수의 작품답게 아주 저돌적이고 돌출적으로, 흡사 그 형식을 과시하듯 사용된다. 이리스가 원주 집의 진돗개를 바라볼 때, 강아지의 얼굴이 줌인된다. 이후 이리스는 그 진돗개가 위험할 것이라 판단했다. 물론 그것은 이리스의 판단이지, 실제 진돗개의 객관은 아닐지도 모른다. 그 강아지는 외관과 달리 아주 순할 수도 있다. 그래서 이리스는 진돗개와 가까워지지 않았을 수도 있다. 이는 해순이 절을 하는 모습이 꼭 자기 연민에 빠진 것 같다는 원주, 엄마로부터 "너는 이리스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잖아"라고 문책당하는 인국 역시 마찬가지다. 그들은 해순이나 이리스를 모를 수 있다. 하지만 그들은 분명 무언가와 가깝기에 줌인된 것이다. 진돗개를 바라본 이후, 이리스는 원주, 해순과 담배를 피러 바깥으로 나간다. 이리스는 원주가 연주를 하며 느낀 감흥을 불어로 옮겨 적는데, 이때도 이리스와 원주가 줌인된다. 이리스는 원주에 일련 가까워졌을지언정, 원주는 여전히 이리스를 잘 모르지만 여하튼 가까워진 것은 확실하다. 바로 그들 자신의 생각, 판단, 감정에 말이다.     


이리스는 인덱스카드에 그녀들이 발견한 감정을 옮겨 적는다. 그 이후엔 필시 편집이 동반되어 다른 숏으로 넘어가고, 이때 그녀들에겐 장소든 정서든 어떤 변화가 생긴다. 어쩌면 당연하다. 한국어를 사용하는 한국의 일상에서 불어를 사용하는 이리스와 조우하면 관습을 이탈할 수밖에 없다. 관습으로 지탱되던 숏과 탈관습한 숏은 같을 수도 없거니와, 관습이 미래를 반복하지도 않기에 어떻게 펼쳐질지 가늠조차 안 된다. 이송에겐 '새 피부'가 돋았고, 원주는 이리스에 대한 적대감과 의심을 충분히 누그러뜨린다. 와인 대신 한국에서만 즐길 수 있는 유익균이 잔뜩 들어간 막걸리를 마시고 비빔밥을 먹으며, 아파트 공원 개울에 굳이 신발을 벗고 발을 담그는 이리스도 그렇다. 

또 이리스의 과거는 그 누구도 모른다. 이리스가 한국이라는 탈관습, 또는 새로운 관습에 속한 모습은 알고 있더라도, 그 이전 프랑스라는 관습에 속했을 당시의 모습은 그 누구도 확인할 수 없다. 이렇듯 탈관습적인 변신은 이전을 지운다. 더해서 관습 바깥은 반복하지 않는다. 변화무쌍하고 무분별하나니 나타났다가 계속 사라진다. 그래서 탈관습적인 존재는 춤을 추며 구조물 너머로, 프레임 바깥으로 사라지는 수하처럼 보존되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제 감정을 따르며 관습을 거부한 죄로 일본 형무소에서 생을 마친 아름다운 청년, 윤동주도 요절했다. 아름다웠으면 된 거고 또 나의 길, 새로운 길을 개척했으면 된 건지 모르지만, 그렇게 사라지기에 이리스는 원주와 이송에게 카세트테이프를 이용하여 반복하라는 숙제를 낸다. 이는 불어를 자신의 표현 수단으로 만드는 방법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탈관습한 나의 어떤 순간을 기억하라는 의미도 지닐 것이다.     


그래서 이들은 아이러니하게도 탈관습적 행위에 즐거워하면서도, 동시에 관습에 또다시 예속된다. 영화 속 남자들은 요절하거나, 해순처럼 변호사였다가 영화사 사장이 되는 등 계속 변화한다. 이런 와중에 여성은 그 남성들에게 '부채감'을 지닌 존재로 동일하게 묘사된다. 이송과 원주 모두 다 아버지에 대한 미안함과 죄책감으로 펑펑 울고, 그들을 지켰어야 한다는 일련의 미안함이 있다. 이송과 원주, 인국의 어머니가 모두 비슷한 태도를 지니는 것으로 보건데 그것은 한국의 젠더라는 관습이다. 그런데 영화 내내 탈관습적인 행위를 일삼던 이리스 또한 인국의 어머니가 갑작스레 방문하자, 능청스럽게 거짓말하고 외출하며 앞선 그녀들과 똑같아진다. 또한 이리스는 유일하게 인국이 연주할 땐 프레임 바깥으로 이탈하지 않고 묵묵하게 연주를 들으며, 지금의 상태를 유지하여 훌륭한 시인이 될 수 있다고 격려한다. 그녀는 그가 다치지 않기를 바라는데, 존재를 기억하고 유지시켜주는 가장 강력한 수단이 관습이기에 사랑하는 존재는 상대와 자신을 제한하게 된다. 인국의 엄마 역시 아들에게 생활비가 얼마나 필요한지, 이리스가 위험한 사람이 아닌지 의심하며 지극히 어머니다운 관습으로 아들을 보존하려 한다. 이 과정에서 인국은 제 감정을 따르지 못하게 된다. 그는 연상 이리스와 사귀는 탈관습적인 관계가 아니라, 지극히 관습에 따라 그녀를 내쳐야 할 상황에 내몰리니 말이다. 

그래서 산파술 역시 관습/탈관습이라는 맥락에 따라 달리 사용된다. 관습을 지속하려는 이들의 산파술은 비관습적인 타자의 진실을 들추어내어 파괴한다. 인국의 어머니처럼 관습에 따라 그러면 안 된다고 일갈하고, 그들의 방향을 다시금 관습으로 조정하며, 이로써 관습에 따라 존재하나 자신으로서 존재하지 않는 유령으로 전락시킨다. 반대로 탈관습적인 산파술은 변화무쌍한 감정, 자기만의 스타일을 밝혀낸다. 수하처럼 고등학생 시절의 관습, 사회에서 이래야한다는 규범 등을 거부하며, 변화무쌍한 제 영혼만을 이정표로 삼아 프레임 바깥에서 새로운 것을 산출한다. 그래서 이들은 존재하지만 금세 존재하지 않게 되고 새로운 존재로 탈바꿈하는, 계속 깜빡거리는 도깨비불과도 같다.      


그 반짝반짝 빛나는 도깨비불이 궁금하거나 신묘해서 정신을 빼앗기기에, 우리는 탈관습하면서도 다시금 관습을 형성하는 것이다. 그 아름다운 것을 보존하기 위해서 변덕을 저지하며 말이다. 그래서 연인이 된 서로는 뻔해진다. 이리스가 좋은 인국은 그녀에게 생활을 맞춰 서양식 식습관으로 바꿨고, 이리스는 한국 남성들에게 뭐라도 더 해주고 싶어 하는 이송, 원주와 닮아간다. 그녀들처럼 이리스는 인국에게 번 돈을 모조리 주려 한다. 이런 와중 인국은 엄마가 오랜만에 끓여준 찌개가 아주 맛있는 모양이다. 엄마 앞에서 늘 소극적이던 그가 처음으로 진심을 담아 경탄을 내뱉으니 말이다. 이리스 역시 해순에게 당돌하게 플러팅을 할 정도로 프랑스적인 분방함을 지녔었지만, 인국을 난처하게 만들고 싶지 않아서 희생을 자처한다. 그래서 엄마가 떠난 이후 이리스를 찾으려는 인국의 표정은 심란해 보이고, 이리스는 잠든 모습이 ‘익스트림 클로즈업’된다. 본래 깨어 있던 그녀는 원주와 해순의 말처럼 쏜살같이 사라진다. 그러나 그 본성이 잠든, 이제 한국적 관습에 중독되어 막걸리를 습관화하는 그녀는 길게 유지된다. 그녀의 특권, 프레임 바깥으로의 이탈과 편집이 실종된다.

좋아하는 서로는 관습을 이룸과 동시에 접지한다. 이리스는 접지하는 도중 그녀의 발이 인국의 발이 되어 아주 세게 누른다. 인국의 수치가 자신과 같지 않기에 동일해지려 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연결되어 타인과 동일해지니 나를 잃고, 달라서 좋아하던 사랑은 식어간다. 결말에서 이리스는 "여기가 내 집이야? 우리는 여전히 친구야?"라고 묻는다. 인국은 그렇다고 말하지만 이리스의 반응은 영 석연치 않다. 새로운 소식을 전하는 전령 이리스는 자신이 항구적인 관계에 붙잡혀 새로운 소식을 전할 수 없다는 것이, 무지갯빛 감정을 따를 수 없는 것이 싫은 것이다. 이에 인국과 함께 하산하지만, 동시에 프레임 바깥으로 사라진다. 이후는 어떻게 될지 알 수 없다. 아마도 접지하는 서로의 눈에서 사라지고 편집으로 즉흥을 따르는 나를 이어내지 않을까.  

그렇기에 탈관습적인 존재 여행자는 관습적인 세계에서 잊힌 감정과 그것의 진지함을 되찾기 위해서 필요하고, 또 제 주관만을 우직하게 따르는 여행자에겐 늘 탈관습적인 행동과 사고가 필요하다. 홍상수는 이를 몸소 실천한다. 위페르에 따르면 본 작품에서 포착된 사적 공간들은 모두 다 실제 배우들의 집이라고 한다. 본래 이 집들은 지극히 실제 배우의 관습만을 따랐겠지만, 배우가 배역을 입고서 감독과 함께 활보하니 이전 용도와는 다른 영화적, 시각적 의미를 지니게 되었다. 외에도 한국인이라면 일상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비석, 녹색 방수페인트를 칠한 옥상, 아파트 공원의 바위 등이 기존의 용례를 벗어나 이국적으로 새로워진다. 특히 신성하고 경건한 절에 널브러진 이리스의 모습은 그야말로 자연에 위치한 평온한 공간성 자체를 환기한다. 그 새로운 진실을 발견하기 위해 우리는 여행자를 필요로 한다. 그래서 홍상수에게 이자벨 위페르는 특권적인 서구 백인이어서 필요한 것이 아니라, 단지 여행자이기 때문에 필요한 것이다. 동시에 그 이상의 새로운 진실을 발굴하기 위해 홍상수는 또 다른 여행자를 필요로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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