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리앗에 의한 다윗'에서 '예술에 의한 다윗'으로
1953년 워싱턴 D.C., 미국의 사진작가 ‘낸시 골딘’이 태어난 해와 장소다. 독실하고 보수적인 유대인 부모 밑에서 나고 자란 그녀의 유년기는 ‘답답함’이라는 단어로 한 번에 요약할 수 있다. 미성숙하고 교조적이었던 부모에 의해 언니 바버라가 자살이라는 출구로 떠나가는 것을, 그저 무기력하게 지켜볼 수밖에 없었을 정도였으니 말이다. 그래서 겨우 성장한 이후에는 부모의 가치관과 반대되는 ‘성 해방’을 사진으로써 표출하며 유명해졌다. 그런데 최근 낸시는 다른 활동으로 더 저명하다. 바로 아편유사제를 유통하여 떼돈을 번 제약사 ‘퍼듀 파마’와 이를 설립한 ‘새클러 가족’에게 대항하는 ‘사회운동가’로 말이다. 낸시 또한 퍼듀 파마가 유통한 아편유사제의 피해자였다. 아편유사제가 불러일으킨 환락은 성적인 쾌감을 가져다주었으나, 이는 그녀가 바란 성적 자유가 결코 아니었다. 부모한테서 겨우 탈출한 그녀를 다시금 붙잡는 또 다른 족쇄였다. 겨우 중독이란 덫에서 달아난 낸시는 그들을 척결하는 운동을 조직하였는데, 로라 포이트러스의 신작 <낸 골딘, 모든 아름다움과 유혈사태>는 사회운동가로서 낸 골딘의 삶을 조명한다.
1964년 매사추세츠 보스턴 태생의 로라 포이트러스는 미국의 다큐멘터리 감독이다. 그녀는 본래 요리사가 꿈이었지만 1992년 영화로 전향하였고, 이후 줄곧 다큐멘터리를 연출해오고 있다. 다큐멘터리 감독으로서 그녀는 늘 '다윗과 골리앗'의 투쟁을 기록한다. 언제나 다윗의 편에 서는 그녀는, 막대한 권력을 가진 골리앗에 의해 왜곡되기 쉬운 작은 거인들의 생생한 목소리를 보존한다. 뿐만 아니라 든든한 매스미디어를 총동원할 수 있는 골리앗에 의한 다윗이 아니라, 조작되지 않은 다윗의 맨얼굴을 포착하는 객관적인 다큐멘터리를 지향한다.
그녀의 영화에선 ‘현장감이 있는 연출’과 ‘대중들이 일상에서 주로 접하는 정돈된 르포 연출’이 교차된다. 감상자는 후자를 '자연스럽다'라거나, 현실을 보도한 것이라 믿곤 하는데, 그 영상이 실상 골리앗에 의해 다듬어지고 검열된 한갓 가상일 뿐, 대상의 일상이나 진실을 반영하지 않는다는 것을 밀착한 카메라를 활용한 전자의 연출로 까발린다. 포이트러스는 다윗에게 박탈되었던 발언권, 주체적인 노출 기회를 제공한다. 이로써 다윗을 범죄자 및 반역자라 규정하는 매스컴 속 정치인들의 주장과 상반된 진실을 길어온다. 그녀 역시 다큐멘터리를 기획하며 대상의 삶에 깊숙이 개입하기 전까지는, 그저 골리앗에 의한 이미지로 대상을 인식하고 있었다. 그녀 또한 대상을 직접 만나며 본래 가졌던 이미지나 편견을 사실로 뒤바꾼다. 그래서 포이트러스의 다큐멘터리는 실천적이고 과정을 중시하며, 결과를 미리 정해놓지 않는다.
여기서 몇몇 인터뷰 대상자는 본래의 주장을 손바닥 뒤집듯 쉽게 바꾸며 언행에 모순을 보이고, 자신이 어떻게 보일지 통제하고자 감독에게 과도한 편집을 요구하기도 한다. 처음 카메라 앞에 섰던 다윗은 이미지를 통제하는 권력을 가진 골리앗이 얼마든지 될 수 있다. 애초에 몇몇 다윗은 이미지를 통제할 수 있는 골리앗이어서 자신을 다윗으로 위장한 것이었다. 포이트러스는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을 비추면서도, 다윗인줄 알았던 이미지의 실체가 골리앗일 수 있다고 의심을 환기한다. 그 모든 이미지를 철저하게 경계 및 검증하며 객관적인 기록에 도달한다. 그렇기에 포이트러스는 카메라를 든다. 다윗의 민낯이든, 다윗으로 위장하는 골리앗의 가면이든, 대상의 실체를 클로즈업하기 위해서 말이다.
그 카메라는 본 작품의 도입부에서 몹시도 흔들린다. 그 세찬 핸드 헬드 속에서 낸 골딘은 새클러 가문이 후원하는 거대 미술관으로 향하고 있다. 그녀는 PAIN(새클러 가문이 아편유세자로 얻은 이익을 규탄하고, 마약 방지 캠페인을 벌이는 낸 골딘이 조직한 협회) 활동가들과 함께, 새클러 가문의 악행을 폭로 및 규탄하기 위한 퍼포먼스와 시위를 주도한다. 그 현장을 포이트러스는 다급하고도 애처롭게 흔들리는 핸드 헬드로, 약통을 꺼내는 그들의 가방과 손을 급박하게 '클로즈업'한다. 왜 이런 형식이어야만 하는가? 낸의 시위 과정은 결코 녹록치 않다. 미술관은 자신이 전시하길 의도하는 우아하고도 심미적인 오브제만을 선별한다. 그 미술관의 목적과 규칙은 그들에게 거액을 쏟아 붓는 새클러 가문의 입김이 반영되어 있다. 이에 들어맞지 않는 불유쾌한 운동가들을 천장에 매달린 CCTV와 미심쩍은 눈초리를 가진 경비원들이 감시한다. 이윽고 시위가 시작되자 경비원은 낸이 들고 있는 플래카드를 찢어버린다. 쫓겨날 위기에 처하자 바닥에 드러누워 겨우 시위를 지속한다.
후반부에 낸은 미술관을 넘어 길거리에서 새클러 가문의 악행을 폭로하고, 마약 후유증 재활 및 예방 캠페인을 벌인다. 그러나 미술관을 후원하는 새클러 가문은 정치와 사법제도 또한 어마 무시한 로비로 장악하여 마비시켰다. 경비는 경찰로 뒤바뀌고, 정당하게 할 말을 하던 활동가들의 두 팔에는 수갑이 채워지거나 포박당해 '범죄자' 내지는 '용의자'의 이미지로 전락하며, 아마 매스미디어엔 그런 이미지가 길게 보도될 것이다. 즉 도입부 미술관이나 후반부 길거리나, 진실은 언제나 짧게 현현한다. 진실은 거대한 '빅브라더'에 의해 금세 검열되거나, 빅브라더를 조종하는 골리앗이 원하는 이미지로 대체된다. 그래서 진실을 담아내려는 포이트러스의 손과 발은 황급하다. 골리앗에 의해 사라져버릴 다윗의 작지만 값진 진실을 다급하게 잡아내고, 이를 포착할 수 있다면 최대한 가깝게, 커다랗게 포착한다. 흡사 ‘현미경’으로 확대하듯, 진실을 가능한 한 최대 크기로 프레임에 가득 채워낸다. 퍼듀 파마의 발륨 판매 메커니즘을 까발리는 폭로자를 ‘줌인’하는 촬영도 마찬가지다.
포이트러스의 이러한 형식은 '쾌'와는 거리가 멀다. 곧 아름답지 않다는 얘기다. 지진이 일어난 것처럼 불길하고 흉흉하게 흔들리니 감상자를 심리를 불안하게 만든다. 오히려 안정적이고 아름다운 것은 새클러 가문이 후원하는, 늘 안온하게 잠들어 있는 회화와 조각들이다. 포이트러스는 그 미적 속성의 일반적 인식을 뒤집는다. 새클러 가문의 선전이 아름답지만 실상 그 속내가 추하다면, 낸의 표현처럼 냄새나고 더럽더라도 진실인 것은 포이트러스가 포착하는 것이다. 포이트러스는 긍정 속에서 부정을, 부정 속에서 긍정을 끌어낸다. 그녀에게 선명한 것은 진실이어야 하고, 흐릿해져야 하는 것은 새클러 가문의 선전이다.
그간 아름다운 것으로 인식되었지만 실상 추한 골리앗의 민낯, 항상 선명하게 선전되었지만 이제는 흐릿하게 소멸시켜야 할 위선적 이미지들 중 하나는 낸의 가족, 그리고 그녀가 관계 맺은 남성들에게 힘을 실어준 ‘가부장제’다. 낸의 언니 바버라에게 골딘 부부의 훈육은 매우 고압적이었다. 이로 인해 성적으로 억압된 바버라는 정신병원에 입원하였지만, 실제론 친척에게 성적인 학대를 당했던 골딘 부인이 양육에 적합하지 않았다고 진단서는 말해주고, 오히려 그녀가 정신과 치료를 받아야 했다. 즉 낸의 부모는 전혀 준비되지 않은 상태였다. 그런데 이 사실들은 낸이 포이트러스에게 건네 준 '사진'에선 흔적조차 발견되지 않는다. 바버라와 낸의 유년기가 담긴 사진에서 불행함, 고통의 흔적은 조금도 찾아볼 수 없고, 너무나 평범하고 멀끔한 가족의 초상일 뿐이다. 낸이 매춘부로 일하던 시절 역시, 나레이션이 동반되지 않은 사진만으로는 그 모든 진실을 알아채기 어렵다. 바버라와 낸이 당했던 고통은 오직 낸의 나레이션, 시각 바깥의 청각으로만 확인할 수 있다. 진실의 시각을 삭제하고 오직 거짓만 보이게 만든 골리앗이 당대의 가부장제다, 여성들에겐 자격을 앗아가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이들에겐 자격을 부여하는…
낸은 “이야기를 만들기는 쉽지만, 실제 기억을 말하기는 어렵다”라고 밝힌다. 낸은 이야기 대신 기억을 작업한다. 이를 외부에 널리 전파하려고 시도했으나, 항상 훼방을 놓는 사람들이 있었다. 남성들로 구성된 예술계는 낸의 작품이 지나치게 사적이고 솔직하다는 이유로 거부했다. 사적인 것과 솔직한 것을 싫어하는 남성적인 예술계, 그렇다면 이들이 바라는 것은 타인을 위한 것과 거짓, 곧 낸이 말한 그들의 귀에 감미로운 '이야기'다. 낸은 폭력적인 연인, 브라이언에게 폭행을 당했다. 그는 낸이 원하는 데로 행동하지 않자 난폭하게 돌변해 그녀를 좌우하려 들었다. 그 여파로 낸은 얼굴 부근에 크나큰 흉터가 생겨서 긴 시간 동안 과거의 얼굴로 돌아가지 못했다. 사진집을 출판하여 그 사실을 폭로하려고 했다. 남성들은 여성의 본래 상태를 어떻게 훼손하고 얼마나 많은 여성들이 원래의 상태로 돌아가지 못했는가, 그런데도 여성은 그 진실을 드러내지 못했고 숨어야만 했는가. 그런데 이를 가부장적인 예술계에 더해, 낸의 아버지도 저지하려 했다.
여성은 남성의 추한 진실, 불쾌한 피와 상처라는 사실을 폭로한다. 그러나 남성은 그 추한 진실을 아름답게 포장해왔고, 그것이 예술계의 관행이었다. 예술의 여러 역할 중에서, 가장 오랜 역사를 유지해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것이 바로 '재현'이다. 예술은 대상의 '사실' 그 자체든, 아니면 보이는 것 너머의 '본질'이나 '이념'이든, 여하간 현실의 무언가를 재현하고 보존하는 매체라고 널리 오랜 시간 사람들의 인식에 박혀있었다. 그래서 예술에 무언가가 담겨져 있다면, 그것은 현실에도 있을 것이라 막연하게 믿었다. 재현하는 매체가 예술이라면, 존재하지 않는 것은 재현할 수 없지 않겠는가? 바로 그 편견을 남성 예술계와 새클러 가문이 교활하게 악용해왔다. 그들은 진실을 재현하기 보단, 재현되기를 원하는 이미지를 담아냈다. 그리고 다들 믿었다, “남성들과 새클러 가문은 문제될 것이 하나도 없고, 그저 쾌를 불러오는 사람들이구나.”
그러나 포이트러스는 그들의 재현이 사실과 무관했음을, 단지 그럴듯한 이미지였음을 폭로한다. 부모님이 찍은 사진, 새클러 가문의 푸티지와 상충되는 낸의 증언을 통해 확고한 믿음에 의심이란 균열을 일으킨다. 그 과정에서 포이트러스는 ‘평화로운 가족으로 위장하기 위한 거짓’ 및 불행의 연속에서 아주 찰나적인 '기쁨'이었을 사진들을 부정하지 않는다. 사진들 각각의 프레임에 따라 화면비를 조율하며, 그간의 예술계나 권력자들이 범했던 거짓 왜곡이라는 우를 반복하지 않는다. 다만 거기에 청각을 덧대어 진실을 구체화하거나, 아니면 그 사진을 다른 맥락에 위치시킨다. 일례로 낸이 바버라를 회고하는 장면에서, 포착되는 사진은 문이고 창문이며 꽉 닫힌 '집'이다. 바버라의 자살 이후를 포착한 사진인지 확인할 순 없다. 오히려 지금까지 부모님이 남긴 사진으로 보건대, 그저 멀끔한 집의 풍광을 보존하려는 의도였을 것이다. 그런데 그 사진을 꽉 막힌 집에서 탈출하려 했던 바버라를 회고하는 맥락에 위치시키고, 집의 여러 요소 중에서 ‘창살’을 클로즈업한다. 바버라의 자살과 무관해보였던 사진이 이윽고 그녀의 자살을 증언하는 나름의 편린으로 뒤바뀐다. 즉 맥락을 재배치함으로써 진실을 가리키지 않던 사진이 진실을 가리키도록 유도한다. 포이트러스는 진실과 동떨어진 이미지나 거짓을 내재하였지만, 그 사실 역시 훼손하지 않는 선에서 진실을 회복한다.
이 과정을 거쳐 골딘 부부의 진실을 발굴한다. 분명 바버라나 낸에게 부모님은 넘어설 수 없었던 거대한 골리앗이었다. 가정에서 가장 거대했던 그들 너머로 시선을 확장할 수 없었다. 그런데 낸의 시선이 확장되니 이들 또한 마냥 골리앗이 아니었다는 사실이 후반부에 밝혀진다. 부모 될 준비가 되지 않았음에도 사회 규범에 의해 그렇게 되어야만 했고, 또 타인을 치료하기보단 되레 자신이 치료받았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멀쩡한 척 연기를 했었어야만 했던 존재들, 그들에게 거짓말을 지시한 더 거대한 골리앗, 국가를 이루는 거대한 구조로 시선을 돌린다.
새클러 가문은 예술계에 막대한 선의와 지성을 쏟아 붓는 후원자이고, 동시에 사법 제도까지 그들에게 우호적이다. 설령 새클러 가문이 로비하지 않더라도, 그들과 정치적 입장이 일맥상통하는 국가 또한 '그들에게 보기 좋은 것'만을 선별하고 취합하여, 진정 보듬어야 할 피해자들을 외진 곳으로 치워버린다. 낸은 새클러 가문의 아편유사제에 중독되기 전까지는 LGBT 커뮤니티, 자유로운 예술가 그룹에 속했었고, 당시 에이즈에 대한 인식 개선 및 예방법을 알렸던 '액트업'과도 함께 활동했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자신의 친구들이 방치되어 죽어가는 참혹한 현장을 목격한다. 그들은 살려달라고 도와달라고 절규하였으나 의료계는 귀를 막았고, 그들을 구조할 방법마저 그 누구도 알려주지 않았다. 낸은 괄시당한 동료들과 전시를 기획했으나, 동성애 및 에이즈라는 불순한 소재를 다뤘다는 이유로 종교계·정치계가 탄압했다. 박해받고 고통스러워하는 이들은 정치계나 종교계가 제 소임을 못하고 있다는 증거, 또 생산과 축적을 요구하는 그들의 정치적 전략에 균열을 내는 부적합한 이미지다. 그래서 50만 명이 넘는 이들이 죽어서 보이지 말아야만 했다. 그것이 곧 당대의 태만한 법, 여전히 오늘날까지도 새클러 가문을 비호하는 부조리하고 편향된 법이다.
골리앗에 의한 이미지는 질서정연하고 평화롭다. 그 이면에서 죽어간 진실은 사람을 부조리함과 불쾌로 흥분시킨다. 아름다운 거짓의 이면에는 아린 진실이 울부짖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낸은 재현하는 예술의 역할을 바로잡고, 그럼으로써 거짓과 진실로 양극화된 예술을 오직 진실로만 바로잡는다. 바버라의 죽음 이후 낸은 대인기피증에 걸릴 정도로 극심한 우울증을 앓았다. 당시 그녀를 포착한 사진에는 해당 사실이 확연히 드러나진 않는다. 어린 낸은 제 진실을 사진으로 말하는 법을 몰랐기 때문이다. 이후 낸은 출가하여 게이로서 자신의 진실을 거리낌 없이 내뿜는 데이비드 암스트롱과 교제한다. 낸은 청각으로 데이비드의 양성적인 매력을 논하고, 데이비드의 솔직함이 담긴 사진도 연이어진다. 그런데 사실 본 사진에는 낸의 나레이션이 불필요하다. 사진만으로도 충분히 데이비드의 매력적인 진실이 전달되고 있기 때문이다. 낸은 깨닫는다. 카메라 앞에서 거짓으로 몸을 가꿀 필요가 없고, 카메라를 든 사람은 진실을 담으려 노력해야 한다는 것을.
데이비드와의 만남 이후 낸은 새로운 문화를 개척하는 동료들의 선구적인 정신을 아카이빙 푸티지하는데, 이전 숏이 잠재한 가능성에 얽매이지 않고, 다음 숏으로 예측 불허하게 이어지는 구성으로 개척자적 정신을 승화한다. 또 적나라한 에로티즘의 객관이라 할지라도, 그 진실을 어떻게 하면 더 부각할 수 있을지 배치를 진지하게 고민한다. 이로써 우리가 보고 감당해야 하는 적나라한 진실을 확실하게 매개한다. 후반부로 갈수록 진실이 담긴 사진들은 아웃 포커싱으로 흐려지거나, 유동적인 물 속, 변화하는 풍경 등 불확정적이다. 새클러 가문과 정치 체제는 항상 단언했다. 우린 그럴 리 없다고, 나는 아니라고, 그러나 이들의 거짓말을 의심해야 한다는 사실을 불확정적인 사진으로서 매개한다.
그렇게 단언하는 골리앗들은 항상 본인이 나서서 얘기할 기회가 있었다. 누가 묻지도 않았는데 TV에 광고를 대량 유포하여 본인의 입장을 항변한다. 또 본인들에게 불리한 PAIN 활동가, 피해자, 낸을 미행한다. 이들을 소극적으로 위축시켜 자신들이 원하는 이미지, 곧 '공백', '무(無)'로 전락시킨다. 골리앗에 의해 다윗들은 본인이 어떻게 보일지 선택할 수 없다. 그러나 여전히 포이트러스는 다윗들에게 질문하며 그들이 이미지든 진실이든 원하는 바를 표현할 기회를 제공한다. 또 극소수만 카메라를 들 수 있었던 과거와 달리 오늘날에는 만인이 카메라를 쥐고 있다. PAIN 활동가와 낸을 미행하는 남자들을 역으로 스마트폰을 이용해 촬영하여, 그들이 원치 않은 '첩자'라는 진실을 널리 알린다. 그렇게 역으로 이미지를 만들거나 진실을 퍼트리며 다윗은 ‘골리앗에 의한 이미지’로 전락하지 않고 골리앗에게 저항한다. 그 결과가 후반부, 화상회의로 진행되는 재판이다. 그간 아름다운 예술 아래 숨겨져 있던, 뻔뻔스럽고 파렴치한 새클러 일가의 얼굴이 드러나고, 이들이 숨기려고 노력했던 피해자들의 증언과 비탄, 통곡이 울려 퍼진다. 골리앗의 특권은 내려다볼 수 있다는 것, 그래서 다윗 또한 바라볼 때 그들에게 진정 맞설 수 있다.
포이트러스는 바라봐야 하는 대상으로 자신 또한 포함해야 한다고 명시한다. 도입부에서 낸의 얼굴을 프레임에 한가득 포착하고, 그 낸의 얼굴을 촬영하는 포이트러스 자신 또한 다른 촬영감독이 포착한다. 이는 본 영화가 포이트러스가 매개하는 진실일 수도 있지만, 그녀의 주관에 의한 이미지일 수도 있다는 의구심을 환기한다. 이로써 감상자가 포이트러스가 의도한 것을 감상할 뿐만 아니라, 영화감독 또한 비판과 의심의 대상으로 삼을 수 있다고 반성한다.
그 반성과 희망은 예술에서 시작한다. 희망의 철학자로 불리는 에른스트 블로흐가 말하길, 꿈과 희망을 그려보기 위해서는 불특정하고도 추상적인 공간, 흡사 망망대해나 저 하늘, 지평선 너머가 요구된다. 왜냐하면 추상적인 백지 같은 곳에서는 무엇이든 해볼 수 있고 그려볼 수 있지만, 지울 수 없는 구체적이고 특정한 것들이 빼곡히 들어차있으면 이에 따라 가능한 꿈과 희망만을 선별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것이 곧 골리앗에게 유리하게 측정되어서 단단하게 머물러있는 ‘법’이다. 그 구체성에서 국민은 달아나기 쉽지 않다. 그러나 낸은 구체성의 제한이 약화되는 예술계에서 나름의 변혁을 성공한다. 사회는 새클러 가문의 자본에 의해 좌우될 것이 보편적이라면, 그 사회의 원리를 마냥 따르지 않는 것이 예술이기 때문이다. 새클러 가문의 자본이란 영향력은 다른 원리를 통용하는 포이트러스와 낸의 예술에는 큰 힘을 발휘하지 못하고, 예술계 자신의 예술성과 현실에서 다뤄지지 않는 다른 가치들을 포용하며 골리앗에 의해 파행될 뻔한 낸 골딘의 전시를 진행한다.
그 예술이 예술에만 그치지 않을 때, 널리 퍼져 권력자의 완고함으로 얼어붙어 있는 기성 사회에 균열을 낼 때 희망은 실현될 지다. 낸의 전시를 감상한 여성들이 데이트폭행을 고백하듯, 새클러를 옹호하는 미술관에서 전시를 하지 않겠다는 고집이 도미노 효과를 일으키듯 말이다. 그렇게 진실이 탄압당하지 않을 때, 해방되고 자유로우며 사랑받을 때, 비로소 현실 역시 아름다워진다. 그 어디에도 구속되지 않는 자유분방한 동료 예술가들을 사랑스러운 시선으로 촬영한 낸의 사진처럼 말이다. 즉 포이트러스는 구체적인 거짓으로 팽배한 기성 현실과 달리, 비일반적인 진실을 품어내는 예술의 가능성을 긍정한다. 골리앗의 제약 가득한 현실에서 다윗이 꼼짝을 못했다면, 무제한적 예술이야 말로 다윗이 골리앗을 상대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무기다. 그 예술관을 생애 전반에 거쳐 추구했던 낸 골딘의 방법론을 포이트러스는 자신도 몸소 실천한다. 항상 진실을 의심하고 현실에 반항하는 방법론, 그래서 포이트러스 또한 영화 말미에 다시 처음으로, 낸 골딘 저항의 시발점이 되었던 바버라 골딘에게 되돌아간다. 그렇게 예술은 끝이 없다. 믿었던 것을 의심하고, 피상을 달리 보며 그 너머를 들여다보고 끝끝내 진실을 찾아낸다. 그 진실을 재현하는 것이야 말로 예술의 사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