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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수 Jun 05. 2024

조나단 글레이저, <존 오브 인터레스트>

나는 세상이 어떠하든 서정시를 쓰겠다

조나단 글레이저, <존 오브 인터레스트> - 나는 세상이 어떠하든 서정시를 쓰겠다  

‘서정시’는 작가의 개인적인 체험, 정서, 감정을 진솔하게 표현하는 문학 장르다. 눈으로 볼 수 없는 한 인간의 내밀한 속사정과 주관을 읽어낼 수 있는 서정시, 그런데 철학자 ‘테어도어 아도르노’는 서정시를 ‘야만’이라 칭하며 몹시 분노한 적이 있었다. 그 시점은 아우슈비츠에서 무수한 유대인들이 학살된 직후였다. 시대 상황은 인간이라면 응당 누가 봐도 참혹하다고 칭할만한 객관적인 비극이었다. 그런데 이때 외부와 무관한 서정시에 몰두하면 개인의 사사로운 정념만 신경 쓸 것이요, 심지어 해괴한 자기 연민을 시도할 수도 있다. 그래서 당시엔 사회에 책임을 지는 예술이 필요하였고, 서정시가 다시 재개되기 위해선 만인이 제 감정을 누릴 수 있는 사회로 나아가거나, 비극적 상황에 적절한 감정을 표현할 수 있는 공감 능력이 요구된다. 그런데 여기, 부적절한 서정시의 전형이 활자를 넘어 스크린에서 펼쳐진다. 절규와 비명으로 얼룩진 유대인 수용소 바로 옆에서 펼쳐지는 게르만인의 기쁨, 누군가의 생사가 오가는 절박한 순간에 한갓 인사이동으로 절망하는 백인들만의 정념이, 조나단 글레이저의 <존 오브 인터레스트>에서 펼쳐진다.     

 

1965년 런던 태생의 조나단 글레이저는 영국의 영화감독이다. 2000년에 장편 데뷔한 이래로 지금까지 단 세 편의 장편만 남겼을 정도의 ‘과작’ 감독이지만, 적은 작품 수에도 불구하고 평단의 공고한 지지를 받고 있으며, 확고한 작가로서 예술론과 철학을 구축해냈다. 그는 다루는 대상에 걸맞은 형식을 매번 선보이기에 영화의 형식적 역할을 고찰한 시네아스트로서 높은 평가를 받는다. 데뷔작 <섹시 비스트>에서는 억압에서 해방된 평온하고도 낙관적인 삶을 리드미컬한 연출과 호크니적인 풍경으로, 이러한 삶에 서서히 엄습해오는 '사냥꾼'들의 침략을 얼어붙는 연출로 가시화한다. 글레이저의 연출 실험이 가장 파격적으로 적용된 사례는 근작 <언더 더 스킨>으로 익히 알려진 유명 배우 ‘스칼렛 요한슨’의 등장은 영화가 허구임을 명시하나, 그녀가 돌아다니는 스코틀랜드의 인파와 풍경은 다큐멘터리다. 픽션에 의해 다큐멘터리가 잡아먹히는 메타적 탐구를 연출로 훌륭히 승화한다. 

이러한 스타일을 활용하여 글레이저는 매번 '이방인'을 탐구한다. 그것은 유럽 사회에서 늘 떠돌아다니는, 박해를 당하지나 않으면 다행인 자신의 ‘유대인’ 혈통을 반영한 결과이리라. 그 이방인은 ‘균열’을 내는 존재다. 시간조차 흐르지 않는 것만 같은, 바위와 같이 단단하게 짜인 삶이 펼쳐져있다. 그 일상에 성욕이나 식욕 등 언제나 본능이 추동한다. 욕구에 있어서 더할 나위 없이 만족스러운 견고한 일상, 그러나 늘 이방인이 끼어들어 제동을 건다.

여기서 타자는 나를 기준으로 이방인이지, 그들 자신으로는 ‘보편자’다. 이에 기존의 보편자는 자신의 지위를 유지하려고, 이방인들은 그 자리를 차지하려 투쟁한다. 여기서 패배한 이는 이방인으로 지위가 역전되거나 피식자로 규정되어 '사냥'당한다. 이런 와중에 타자들은 자신들의 타자성을 지켜내기 위해 저항하기도 하지만, 대체론 환경을 장악하기 위해 보편자를 따라하는 과정에서 자신다움을 잃는다. 이에 글레이저의 작품에선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가면'이 늘 등장하고, 원 존재는 불안에 파르르 떤다. 포식자에게 사냥당해서 물질로서 자신을 잃을 것인가, 그들에게 저항하고 자신이 포식자의 탈을 뒤집어쓰면서 물질은 보존하되 정신을 잃을 것인가, 그 갈림길 사이에서 늘 고뇌한다. 그의 신작에서도 포식자 나치는 피식자 유대인을 잡아먹으며 번성한다. 뿐만 아니라 유대인의 피해자성이라는 가면까지 천연덕스럽게 뒤집어쓰며 자신들의 간악함을 포장한다.     


오프닝 크레딧, 새하얀 빛이 가득하고 어둠은 희소한 '글자'에 갇혀 꿈틀거린다. 그 순간은 ‘색채론’이라는 관점에선 희망차다. 절망적인 어둠을 폐쇄적이고 협소한 공간에 몰아냈고, 대신 기적이나 이데아 등에 상응하는 빛을 프레임에 한가득 채워 넣었으니 말이다. 그러나 빛과 어둠의 양이 순식간에 반전된다. 빛이 글자에 갇히고, 해방된 어둠이 그 외의 공간을 가득 채운다. 이는 본 작품의 향방을 예고한다. 소수의 게르만인을 위한 '흥미의 공간'을 밝히기 위해, 그 외의 모든 지대를 탁하게 물들일 것을 말이다. 이윽고 그 빛조차 꺼져간다. 그 탐욕의 손아귀가 결국에는 흥미의 공간까지 집어삼키게 될 거라 예고하듯이. 이후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검은 이미지에선 날카로운 소음과 물방울 떨어지는 소리만 들려온다. 무엇인지 정확하게 추측할 순 없지만, 소리와 소재를 엮어서 추론했을 때 수용소의 차디찬 질감이 연상되고, 소음 역시 그 내부의 치열한 생존 혈투를 가리키듯 하다. 이 청각은 극소수의 아우슈비츠 수용자들이 촬영했던 '검은 사진'을 떠올리게 한다. 카메라를 가까스로 손에 넣은 극소수의 수감자들은 수용소 내부를 촬영하긴 했지만, 간수들의 눈을 피해 몰래 촬영한 사진은 항상 ‘아웃포커싱’이거나 어둠만 가득했고, 그것은 촬영자나 수용소 내의 급박함을 간접 증언하였다. 도입의 청각도 이와 다르지 않고, 이후에도 홀로코스트 피해자들의 정황은 늘 간접적으로만 드러난다. 풀숲의 인기척, 구체적으로 특정할 수 없는 백골과 검은 연기가 시각의 전부다.

그래도 희생자들의 비명이 서서히 명료해진다. 결말의 크레딧에서 이들의 목소리는 더 공포스럽게 절규한다. 다만 청각의 한계 상 시각 없이는 소리의 주인을 특정 짓기 어렵기에, 그 절규마저 게르만인이 가로챈다. 글레이저는 영화 내내 '이중적인 이미지'로 게르만인이 쌓아올린 아름다운 흥미의 공간 배후에 어떤 끔찍함이 내재되어 있는지를 밝혀내는데, 포탄 소리나 절규 등 유대인의 비극을 암시하는 청각에는 항상 게르만인의 안온한 얼굴이나 헤트비히가 세운 아름다운 정원이 결합한다. 청각의 당사자인 유대인의 육신 대신 말이다. 영화에서 잠깐 드러난 구체적인 피해 정황인 ‘백골’조차도 롱숏 속에서 자갈마냥 작다랗다. 게르만인의 시각과 유대인의 청각이 결합하며 발생하는 이질성은 유대인들의 희생을 거름이자 벽돌로 삼아 세운 아름다움임을 암시함과 더불어, 심지어 그들의 피해자성까지 약탈하고 있음을 가시화한다. 유대인들이 독가스를 들어 마시는 순간에 백골을 만졌다는 이유로 벌벌 떨고, 복이 겨운 목욕을 즐기는 동안 눈이 따갑다는 이유로 눈물을 짜며, 수용소나 게토로 강제 이주되어 말라 죽어가는 사람이 있는 순간에 나치들은 전근의 피해자라며 파렴치한 멜로를 찍고 있으니 말이다. 

저택의 게르만인들은 비명을 지를 일이 없으니, 성인의 비명은 오직 유대인의 것을 갈취했다고 특정 가능 하지만, 구분하기 어려운 울음 하나가 있나니 바로 양측 모두에서 들려오는 '어린 아이'의 것이다. 물론 차이는 있다. 게르만 아기의 울음은 복에 겨운 투정이라면, 유대인 아기의 울음은 처형을 앞둔 최후의 울부짖음이자, 수용소에서 메말라버린 젖을 앞두고 호소하는 절규다. 그러나 유대인 아기의 울음에 자택에 있는 게르만 아기들의 울음이 뒤섞이고, 이후 그 아기를 달래느라 애를 먹는 게르만인의 얼굴이 이어진다. 게르만인은 아기의 울음마저 훔쳐 자신들도 삶이 쉽지 않다고 호소하는 것이다. 그것도 끔찍한 대학살을 앞둔 유대인의 절규를, 그저 아기를 돌보기 힘들어서 징징거리는 평범한 사람들의 사소한 희생, 나치 내 권력다툼의 희생자 등으로 축소하며 그야말로 죄악의 서정시를 쓴다.      


게르만인들의 약탈은 적나라한 이미지 자체와 편집으로 더 부각된다. 이미지의 사례로는 수용소에서 배달된 옷가지, 모피 코트, 립스틱 등을 챙기는 헤트비히로 확인할 수 있다. 직접적으로 이들은 유대인들의 재물을 훔친다. 뿐만 아니라 루돌프의 아들은 인간의 치아를 공부한다. 게르만인은 유대인의 신체까지도 약탈하여 ‘우생학’의 도구로 사용한다. 편집으로는 유대인들이 사과를 놓고 다투다가 살해당한 정황이 드러난 숏 직후, 정원사가 헤트비히의 밭을 가는 장면으로 연결하는 편집이 대표적이다. 유대인의 절규와 비명이 헤트비히가 가꾼 상스럽지만 아름다운 정원의 비료로 연결되는 것이다. 유대인들이 풀숲에 가려서 이송되는 숏 이후에 아기를 달래느라 생일 파티를 즐기지 못하고 애를 먹는 가족들을 연결하는 편집 역시 마찬가지다. 유대인의 피해는 축소되고 은닉되는 반면, 게르만인의 복에 겨운 불편은 유대인이 차지해야 할 피해자의 목소리를 꿰찬다.

목소리마저 빼앗긴 유대인은 보이지도 않거니와, 간접적으로 보인다 한들 프레임 바깥으로 빠져 '투명하게' 사라진다. 반면 영화의 카메라가 닿은 현장엔 게르만인 남녀 너나할 것 없이 입으로 열심히 떠들던 '설계'가 실현된다. 특히 헤트비히의 아름다운 정원이 말이다. 그 과정에서 1차적으로 자연, 2차적으로 유대인이 도구화된다. 희생자 모두는 각자가 지향하는 삶의 목적을 설계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들은 항상 입막음을 당하며, 스스로 이름이나 존재를 밝힐 수 없다. 헤트비히는 아기와 함께 무당벌레, 달리아 꽃을 바라보며 아름답다고 경탄하고, 루돌프의 아들들 역시 왜가리 내지는 해오라기를 구경하거나 황새를 잡아다가 관찰한다. 물살이 세지 않은 강물은 루돌프의 식구들이 유유자적 트래킹을 즐길 수 있는 수단이 되며, 스스로 온전히 흐르지 못한다. 이들 자연은 게르만인에 의해 이름이 붙여지고, 인간의 어떤 목적을 실현하기 위한 도구로 전락한다. 게르만인이 자연을 취하는 태도는 이윽고 인간 유대인에게로 이어져, 시녀와 유대인 인부는 자연과 마찬가지로 말을 잃었고, 헤트비히의 협박에 굴복하며 묵묵히 까다롭고 고된 일을 반복한다. 이윽고 그 여파는 헝가리라는 거대한 국가로 확장되기에 이른다.      


그래서 영화에선 '롱숏'이 잦다. 롱숏은 클로즈업에 비해서 피사체와의 거리가 '멀다'. 도입부에서 게르만인 소녀들은 부모에 의해 따끔거리거나 불쾌한 것을 지나치고 '회피'하는 방법을, 소년들은 타인을 호수에 빠트리는 놀이를 배운다. 즉 자신을 기준으로 이득이 되지 않는 타인을 멀리 하는 법을 교육받는 것이다. 그래서 이들은 아우슈비츠와 물리적으로 밀착했다고 한들, 정신은 그들로부터 한도 끝도 없이 멀어져 자신만 생각한다. 누군가의 비명이 울려 퍼지는 곳에서 헤트비히는 아주 기괴하게 껄껄 웃어대며, 정원에 만족하지 못하는지 루돌프에게 이탈리아의 온천으로 데려다달라고 부탁한다. 헤트비히의 어머니 역시 모전여전으로 유대인들이 죽어나가는 현장 바로 앞에서, 헤트비히와 손자들이 참으로 기특하다고 감격하고, 이웃이었던 유대인의 커튼을 낙찰하지 못해서 참 아쉽다는 망언을 내뱉는다. 유대인이 안전을 보장받지 못하는 현장 옆에서, 제 목숨은 소중한지 문단속을 철저히 하는 루돌프의 모습도 마찬가지다. 게르만인의 이익이 확장되면 확장될수록 유대인의 존재는 작아지고, 또 게르만인 기준으로 저 멀리 사라져서 보이지 않는 메커니즘을 롱숏이 가시화한다. 

여기서 롱숏에 또 다른 당위성이 부여된다. 롱숏은 거대하다. 이 거대한 양식이어야만 게르만인들이 몰아낸 유대인의 실낱같은 흔적을 잡아낼 수가 있다. 게르만인의 상반신을 부각하는 미디엄 숏, 그들의 몸 전체를 담아낸 풀숏과 달리 말이다. 그마저도 광활한 형식 속에 가득한 것은 게르만의 이익이요, 홀로코스트의 흔적은 한갓 보풀 같을 뿐이다. 풀숲에 숨겨진 유대인의 흔적과 죽음을 말소하는 연기, 담장 너머에서 도착하는 절망의 열차가 내뿜는 매연뿐이다. 그 먼지라도 붙잡고자 하는 것이 롱숏이라는 양심의 형식이다.

본 홀로코스트는 온 세계와 타인을 수단으로 간주하여 계산하는 ‘이성중심주의’의 만행이기도 하다. 그들의 계산 하에서 쓸모없다거나 열등하다고 평가되는 집단, 존재를 모조리 불사르고, 자신들이 추구하는 극도의 효율을 위해 착취하였으니 말이다. 이를 반영하는 영화의 형식 역시 극도로 이성적이다. 고전적 아름다움의 법칙을 이성적으로 분석해낸 르네상스, 신고전주의 풍경화처럼 흥미의 구도를 포착하는 롱숏의 구도는 극도로 정돈되어 있다. 또 이성의 신화가 집약된 피조물인 ‘기계’, 카메라에서 인간의 본성인 충동이나 즉흥을 느껴볼 수 없다. 어떤 감정에도 사건에도 동요하지 않고 그저 가만히 서서 일정한 거리와 위치를 유지하며 유대인 광부, 가사도우미를 객관적으로 촬영한다. 게르만인의 부조리한 일상을 포착하기에 카메라 구도는 일그러져 적합하지 않은 반면, 일하는 노동자나 유대인 광부는 비교적 잘 보이기 때문이다. 이따금 발생하여 아주 일정하게 이동하는 트래킹 숏조차 아기를 안은 헤트비히의 발걸음, 급박하게 돌아가려는 루돌프를 포착할 땐 찰나만 발생하고 잘려나가지만, 짐을 나르는 유대인 인부를 포착할 땐 비교적 완전하다. (예외는 헤트비히가 어머니께 정원을 소개할 때다, 이때 트래킹 숏의 시작과 끝은 그녀들의 발걸음에 좌우되며, 잠시 멈췄을 땐 속도조차 조절한다, 심지어 해당 시퀀스에선 지금껏 사용된 적 없는 클로즈업, 익스트림 클로즈업이 사용될 정도로 이질적이다, 카메라의 법칙은 게르만인의 이익을 부각할 땐 예외라는 듯이) 그 이성적인 움직임은 모든 충동을 소거한 모델의 질서정연한 워킹처럼 경탄이 나올법하지만, 동시에 공허하고 차갑다. 피사체에겐 어떤 관심도 감정도 없고, 오직 제게 반영된 어떤 이성적 목적만을 묵묵히 추구하는 모양새다.      


인간에게 관심이 없는 카메라의 태도, 영화 내 타인을 오직 수단으로만 간주하는 태도가 보편화되자, 욕심의 손아귀는 한껏 불어나서 게르만인 서로를 사유화하기에 이른다. 자신만을 생각하는 비양심적인 '원거리'와 기괴한 서정시는 게르만인의 유대인 박해로만 만족하지 못하는 것이다. 루돌프가 전근을 통보받자, 헤트비히는 유대인의 시체로 쌓아올린 꿈에서 멀어지게 생겼다. 이로 인해 부부는 반목한다. 루돌프는 헤트비히에게 따라와 줄 수 없겠냐고, 반면 헤트비히는 자신의 꿈을 위해서 총통에게 전근 반려를 요청해볼 수 없겠냐고, 그럴 수 없다면 자신과 자식들은 남겠다며 입장차를 좁히지 못한다. 결국 루돌프만 떠나는 식으로 타협을 보지만, 루돌프는 제 욕망을 포기할 생각이 없기에 아내를 대신할 매춘부를 부른다. 

그래서 영화는 '클로즈업'도 적거니와, '정면' 역시 드물다. 카메라는 항상 인물의 배후에 숨어서 측면이나 뒤태를 포착한다. 정면에서 대화하는 서로는 상대를 수단화하기 어렵다. 이유는 눈망울을 응시하면 상대의 처지나 입장에 공감하는 ‘옥시토신’이 분비되어, 더는 자신의 이익만 주장할 수 없게 된다. 이로써 타인을 수단화하기 어려워진다. 이를 반영하는 정면의 클로즈업은 인간성의 증거다. 그러니 아우슈비츠의 황제와 여왕은 항상 측면이나 후면에서 바라봐진다. 심지어 영화 내에서도 서로의 정면을 응시하는 장면이 드물고, 그 상대는 롱숏이라는 거대한 공장에서 작동되는 '부속품'처럼 조그맣다. 즉 영화의 구도는 공감 말살의 가시화다. 내 이익을 위해 상대를 계산하는 차갑고 서늘한 시선의 재현이다. 

그 시선이 게르만인, 자신들까지 덮친다. 헤트비히는 정원에서 아이들이 행복하고도 훌륭하게 성장하길 바랐다. 그런데 형이 동생을 온실에 감금하며, 가족 까지도 기분을 위한 수단으로 취급한다. 뿐만 아니라 헤트비히의 어머니는 절망적인 밤을 경험하고 불현듯 사라지며 딸에게 상처를 입힌다. 그래서 롱숏에 다수가 동시에 속했던 이들은 영화가 전개되면 될수록 각자의 숏만을 점유하며 고립된다. 심지어 루돌프는 외로움에 더해서 영화의 결말에선 피를 토한다. 영화 내내 게르만인들은 자신들의 행적을 '세척'하며 오물을 박박 닦아내고 새하얘졌다. 이로써 빛으로 나아갔다면, 영화 말미의 루돌프는 더는 빛으로 향하지 못한다. 결말에서 그는 어둠 속으로 사라져간다. 루돌프의 퇴장은 오늘날에 유적지로 보존된 유대인 수용소가 촬영된 숏과 교차한다. 거기선 역으로 유대인들의 유품이 진열된 유리창과 전시장을 열심히 청소한다. 시대는 바뀌었다. 이제는 피해자를 위해서 게르만인이 퇴장할 시간이다. 백인이 시작한 자연과 인간의 수단화는 이윽고 본인들의 목을 옥죈다.      


그렇다면 어떤 태도가 요구되는가? 해답은 자연에 있다. 루돌프는 강의 물살을 거슬러 나룻배를 운전하고, 특정 화초가 잔뜩 핀 초원 역시 통제하려 하였다. 그런데 자연은 늘 루돌프의 뜻에 저항한다. 루돌프는 아이들과 강에서 한적한 시간을 보낼 수 있기를 바랐다. 하지만 강물은 루돌프가 조금도 바라지 않은 '백골'을 가져다준다. 화들짝 놀란 루돌프는 아이들에게 유해물질이 묻었을까봐 조속히 귀가하려하나, 갑작스럽게 비바람이 몰아치고 물살은 거세져 소령은 방해를 받는다. 그 자연은 루돌프를 도구화하기 위해 변덕을 부리지 않았다. 단지 자신의 내재성을 따를 뿐이다.

이름을 알 수 없는 어떤 폴란드 여인 역시 유대인과 연대하길 원하는 자신의 인간성을 따른다. 노역하거나 이송되는 유대인들이 지나는 둔덕이나 다리에 그녀는 밤마다 사과를 숨겨둔다. 사실이 발각되면 처벌당해서 목숨을 잃을지도 모른다. 심지어 그 시간엔 맡기 싫은 냄새와 듣기 싫은 소음이 가득해서 대부분의 주민들은 외부와의 통로를 차단함에도 불구하고, 그 여인은 바깥에 나가 위험을 감수한다. 이때 루돌프가 아이에게 읽어주는 우화는 『헨젤과 그레텔』으로, 음식으로 아이들을 꼬드겨 욕망을 추구하려는 마녀와 정 반대의 행동을 하는 것이다. 그녀의 모습은 ‘군용 적외선 카메라’로 포착된다. 본래 나치에 따라 어둠 속에 파묻혀 조금의 형체도 보이지 말아야 할 그녀는 비교적 하얗게 윤곽이 드러나며 실존한다. 또 그 인간성이 나치에 의해 ‘불법’으로 규정되었기에 괴괴하고 흉악한 모습으로 반전된 것이다. 반면 게르만인의 세탁물이 늘 하얀색이었던 것과 달리, 해당 촬영 기법은 흑백이 반전되어 세탁물이 거무튀튀하게 처리된다. 즉 자유 및 타인과 동행하는 내재성이야 말로 빛이요, 반면 제 자신밖에 모르는 방종 및 이기심이야 말로 아무리 하얗게 세탁해도 그 본질은 탁하다.      


글레이저는 늘 그렇듯, 신작에서도 인두겁을 뒤집어쓴 극악무도한 포식자들을 고발한다. 그 포식의 취지는 아름다움이다. 피를 마시고 자라난 정원의 꽃들은 현실의 그 어떤 화초보다 더 빨갛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글레이저는 전후를 극적으로 대비하는 편집, 부조화스러운 이중성이 공존하는 롱숏을 활용하여 심미성의 실체를 까발린다. 반면 거칠고 야성적인 자연과 괴괴한 적외선 카메라 촬영에는 진정 인간이 지향해야 할 가치가 반전해있다. 아름답지만 천박할 것인가, 추하지만 숭고하고 고결할 것인가, 그 고민은 영화가 인서트한 오늘날까지도 이어져 여전히 유효하다. 

다만 숏은 위대하도다, 그러나 그 숏들로 이뤄진 본 작품이 개개 숏의 존재감에 필적하느냐고 묻느냐면 쉽게 입이 떨어지진 않는다. 영화에서 백인의 이중성을 반영하는 숏들은 고유한 존재감을 뽐낸다. 순간이 강렬한 이유는 집중의 장치가 꽤 효과적이기 때문이다. 서사를 단순하게 처리하여 전후 흐름 대신, 지금 여기의 숏에 골똘히 집중하도록 유도하니 말이다. 동시에 그 점이 문제다. 숏 하나의 순간과 전후 흐름은 강렬하지만, 전체의 연쇄는 지나치게 단순하여 거기서 파생되는 의미는 그리 중요하게 다가오지 않는다. 다시 말해 숏 자체는 매력을 지닐지언정, 무수한 숏의 연결로 드러난 거대한 총체가 다소 빈약하다. 본 작품에 요구되는 접근법이 회화 및 사진과 유사하기에, 차라리 그 명맥을 이어가는 하나의 숏이나 적은 수의 숏으로 구성된 ‘미디어 아트’였다면 더 가치를 높게 칠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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