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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수 Aug 30. 2024

요르고스 란티모스, <카인즈 오브 카인드니스>

가짜 신들의 신화

요르고스 란티모스(Yorgos Lanthimos), <카인즈 오브 카인드니스>

(Kinds of Kindness) - 가짜 신들의 신화     

옴니버스극은 여러 개의 단편을 한 작품으로 모은 장편의 일종으로서, 고유의 존재감과 의미를 갖는 하나의 단편과 비교했을 때 확연한 차이를 보인다. 창작자는 이 단편들을 모아야만 말할 수 있는 메시지를 한 작품으로써 부각한다. 그래서 옴니버스극에서의 단편은 전후에 연결된 다른 단편을 함께 고려해야만 진정한 작가의 의도에 닿을 수 있다. 가령 다양한 감독들이 하나의 옴니버스극에 참여했을 경우, 동일한 주제가 각자의 시선 속에서 다양하게 해석될 수 있음을 시사한다.(<보카치오 70>, <그들 각자의 영화관> 등) 또 한 감독이 다양한 시공간에서의 유사한 이야기를 다룰 수도 있고(<쓰리 타임즈>), 반대로 동일한 시공간에서의 다양한 관점을 부각할 수도 있다(<어떤 여자들>). 전자는 무차별적인 다양성 속에서의 어떤 보편성을 발견하는 작업, 후자는 똑같은 상황에서 내릴 수 있는 무궁무진한 선택을 비추는 일이라 하겠다.

요르고스 란티모스의 신작, <카인즈 오브 카인드니스> 역시 옴니버스극이다. 그것은 표면적으로 보기엔 한 존재의 무궁무진한 변화 가능성을 보여주는 것 같다. 한 명의 배우가 세 가지의 이야기를 거치며 각기 다른 용모와 성격, 삶을 살아온 세 가지 배역을 갈아입기 때문이다. 마치 어제 규정된 본질을 거부하는 오늘과 내일의 실존주의처럼 말이다. 그런데 이 실존의 물결에 동공을 맡기고 있다 보면, 그 다름 속에서 부정하기 어려운 유사성이 목도된다. 세 가지 이야기와 각기 다른 배역은 똑같이 '호모 사피엔스'란 종에 의해 표현되고, 그 종은 ‘미국인’의 특성을 공유하며, 그들이 구성한 '구조' 속에서 살고 있기에 각기 다른 것들을 똑같이 아우르는 보편성의 힘이 느껴진다. 그렇다면 란티모스가 고찰하는 보편성은 정확하게 무엇인가?      


1973년 아테네 출신의 요르고스 란티모스는 고대 그리스의 유산을 현대 영화에 이식하는 그리스의 시네아스트다. 그가 발굴해오는 조상들의 유산은 ‘그리스 신화’다. <더 랍스터> 전체를 관통하는 핵심적인 소재, ‘인간에서 동물로의 변신’은 그리스 신화에서 흔히 신들이 인간에게 내렸던 징벌이요, 그리스 외의 다양한 신화에서도 흔하게 발견된다. <킬링 디어>에선 아가멤논-클리타임네스트라의 이야기를 직접 차용한다. 그런데 란티모스의 영화가 신화적이라는 평가를 받는 이유는 이러한 소재에만 근거가 있진 않다. 

신화가 연상되는 더 핵심적인 이유는 신들의 절대성, 그것에 휘둘리는 인간의 부조리한 운명이 영화를 지배하기 때문이다. 란티모스의 영화는 아주 찝찝하다. 그의 영화 속 폭력성은 <송곳니>에서 정점을 찍었다가, 이후 하향곡선을 그리는 데도 불구하고, 어지간한 영화들보다 더 소름끼치고 끔찍하다. 그 이유는 란티모스 영화 속 인간들이 어떤 이유도, 명분도 없이 높은 곳에서 하달되는 '지시'를 따라야 하거나, 그들의 디렉팅대로 '연기'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 내용이 인간의 자유의지를 무시하고 노예화시키기에 감상자는 갑갑한 꺼림칙함을 느낀다. 이러한 지시를 하는 이들은 <킬링 디어>처럼 인간이 어떻게 할 수 없는 초월적인 절대자이거나, <더 랍스터>처럼 인류가 만들어냈지만 그 말랑거리는 손아귀에서 벗어나 스스로 신을 자처하는 법과 기술의 형태로 나타난다.

이들이 어떤 구조를 이루고, 그 세계에 속한 인간은 절대자의 명령에 따라 온갖 수모에 처한다. 그런데 이 절대자를 영영 이해 못할 것은 아니다. 그리스 신화에서 인간은 신을 쏙 빼닮았다. 절대적인 권능은 덜 닮았을지언정, 권력에의 의지와 기분 내키는 대로 행동하는 충동을 빼다 박았다. 또 인간 가장들이 구조를 이루기도 한다. <키네타>, <송곳니>, <알프스>, <더 페이버릿: 여왕의 여자>, <가여운 것들> 등 신화적 소재를 직접 차용한 작품들 외의 영화에서 모조리 신을 빼닮고 그들을 선망하는 인간 가장이 구조를 형성한다. 그들은 제 성기의 만족, 눈에 보기 좋음 등 '쾌락'을 위해 피조물에게 지시를 내린다. 인간은 지배자의 기분을 위해 구조 속에서 능욕 당하지만, 그 지배자는 자신의 또 다른 자화상이다.

란티모스는 그 구조가 인간에게 아주 거대해보이지만, 실제로는 아주 좁다란 '자동차', '이어폰', '주택', 아무리 넓다 한들 '마을 공동체' 수준에 그친다고 본다. 실제 세상은 이보다 더 넓다. 그러나 이 좁은 구조에 맞춰 인간은 통제된다. 본성이 아닌 구조가 요구하는 몸동작만을 어색하게 연기한다. 지배자들은 '애교'랄지 '의존'이랄지 '자해' 등을 주문하여 취약하게 만들고 숭배를 강화한다. 반면 구조에 적합하지 않은 육체는 '잉여'의 것이 되어서 틀에 담기지 않아 흘러넘친다. 이렇게 세뇌된, 시야와 의식이 좁아진 이들은 그 이상을 차마 상상하지 못한 채로 비극을 맞이한다. 유일하게 근작 <가여운 것들>만이 일련의 구조 정복을 해냈을 뿐, 외의 작품에서 구조 바깥의 인간은 존재하지 않는다. 동시에 구조 내에서도 주체적인 인간으로서 오롯이 존재하지 못하기 때문에, 란티모스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인간의 부조리’를 영화로써 응시한다.      


<카인즈 오브 카인드니스>의 세 이야기 모두를 아우르는 힘 역시, 타인이 나를 지배하는 '수동성' 내지는 '객체'라는 이름의 부조리라 하겠다. 본 작품의 도입이자 첫 번째 이야기 시작부터 그 힘이 가시화된다. 거대한 저택 주변을 촬영하는 카메라는 분명 어떤 사람이 이동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사람이 다른 길로 새지 않고 저택 안으로 당도할 것이 당연하다는 듯 미동 없이 멈춰 있다. 다음 숏에서 정 반대의 카메라 워킹인 능수능란한 달리 숏이 그 남자와 비비안이란 여자를 비추는데, 비슷한 촬영임에도 둘의 이동에는 현저한 차이가 있다. 그 남자를 불러들여 면접을 보는 비비안의 발걸음은 자유롭고 유려한 반면, 저택에 찾아온 남자의 발걸음은 비비안의 발화와 손짓에 의해 수동적으로 결정된다. 본디 이동은 자유의 조건이다. 내가 해야 하고, 또 하고 싶은 무언가를 실현하는 힘이다. 그러나 그 이동이 타인에 의해서 결정되고 있다는 사실이 도입에서 드러나는 것이다.

다행히도 저택 시퀀스가 끝난 직후 영화는 찰나적으로 해방된다. 태양이 내리 쬐는 오후의 저택에 귀속되지 않고, 대뜸 밤의 도로가 포착된 숏으로 이동하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고용되었던 남자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로버트라는 자가 프레임의 정중앙을 차지하고 있어서 감상자를 어리둥절하게 만든다. 그 남자가 어째서 고용되었고, 무슨 일을 하게 될지 궁금해 하는 감상자의 '시선'에는 불쾌한 것이나, 영화 자체로 봤을 때는 매우 자유로운 연결이다. 감상자의 욕망에 지배되지 않고 란티모스가 잇고 싶은 숏으로 마음대로 이동하는 편집이니 말이다. 그러나 이질적으로 연결된 시퀀스에서도 로버트는 누군가의 지시를 따라 교통사고를 일으키고, 그 로버트를 쳐다보는 이는 비비안에게 고용된 바로 그 남자다. 자유분방해보였던 편집조차 비비안이라는 주인에 의해 결정된 이동이었던 것이다.

비비안마저 지배하는 1부에서 가장 높은 권위를 가진 신, 레이몬드는 모든 카메라 워킹과 편집을 결정할 수 있다. 편집은 레이몬드의 발화가 실현되는 장치에 불과하다. 레이몬드가 로버트에게 지시한 바는 필시 다음 숏에 모조리 실현된다. 만약 레이몬드의 성에 차지 않는다면, 그가 생각하는 완벽에 다다를 때까지 다른 숏으로의 진입을 금지하고, 이상을 연습하는 숏을 끝없이 반복시킨다. 편집이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는 카메라가 레이몬드의 계획을 받드는 로버트를 마치 '그림자' 마냥 감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카메라는 로버트의 동선을 꿰고 있다는 듯,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미끄러지며 그를 아주 가까이 클로즈업한다. 이는 로버트가 레이몬드를 거부하고 잠시의 자유를 되찾았을 때, 그의 발걸음을 한 템포 늦게 따라가 자꾸만 롱숏을 형성하며 '빈 공간'을 비추는 워킹과는 딴판이다. 이때의 그는 예상하기 어려웠기에 카메라는 자꾸만 늦은 것이다. (물론 이조차도 멀리서 굽어보는 레이몬드의 계략이었기에 카메라는 그를 아예 놓치지는 않았다.) 반면 카메라가 비추는 로버트는 레이몬드가 ‘이미 알고 있는 사람’이다. 그래서 미래마저 레이몬드의 계획을 배반하지 않는다면 눈에 훤하다.      


그 이동은 첫 번째 이야기에서 특히 두드러지지만, 신에 의해 수동적인 객체로 전락하는 나머지 이야기에서도 충분히 느낄 수 있다. 2부의 다니엘은 무인도에 낙오되어 어떻게든 생존하고자 성격을 개조한 현재의 리즈가 가짜라며 외면한다. 그가 아는 것은 그의 비위를 맞춰주던 과거의 고분고분한 리즈뿐이다. 3부의 조셉에게 에밀리 역시 그가 아는 '아내'의 모습이어야만하고, 에밀리가 떠돌이 개와 루스를 대하는 태도 또한 마찬가지다. 떠돌이 개와 루스는 에밀리를 모르고, 사실 에밀리도 그들을 잘 모르지만 그럼에도 안다. 린다 내지는 메리로, 루스는 수의사가 아니라 영도자로서 미리 그려놓은 계획 내지는 기준에 맞춰 알고 있었다. 이때도 편집은 1부와 마찬가지다. 다니엘이 원치 않는 리즈의 모습을 비추다가도, 끝끝내 그에 의해 자진해서 손가락을 자르고 폭행으로 유산되며 간까지 꺼내주는 그녀의 모습 이후 그가 바라는 과거 리즈의 초상이 연결된다. 조셉의 욕망은 저녁 식사에 불참한 에밀리에 의해 다음 숏에 이어지지 않았지만, 가부장제에서 신적 권위를 부여받은 남성은 어떻게든 여성을 원하는 모습으로 연결하고, 그 가부장제의 모든 법을 유린하며 무단 침입하고 난폭 운전하는 에밀리 역시 원하는 방향으로 편집하고야 만다. 지배자들의 특권이란 내가 보고 싶은 것을 촬영하고, 그렇게 되어야 하는 것을 이어내는 편집에 있다. 여기에 더해 신의 권능을 가시화하는 또 다른 연출은 ‘흑백’이다. 흑백은 ‘플래시백’에 사용되기에 과거에 상응하고, 또한 컬러에 비해 많은 것을 제한하는 흑백 상황에서 피지배자는 수동적인 객체로 전락하며 신들의 통제권을 가시화한다.

상대를 수동적인 객체로 규정할 수 있는 이들은 모두 신적 지위를 지녔다. 레이몬드는 고층 빌딩에서도 가장 상층에 위치한다. 닿기 어려운 하늘 꼭대기에 걸터앉은 그에게 지상은 식은 죽 먹기다. 그 힘은 자신을 위하기도 하지만, 동시에 그에게 충성하는 로버트의 소망을 이뤄준다. 그가 원하는 부인이나 컬렉션 등 자신에 의해 객체로 전락하는 보상을 충분히 건넨다. 대신 그의 소망을 온전히 이뤄주진 않는다. 아이를 갖고 싶다는 소망은 늘 유예한다. 왜냐하면 모든 소망을 다 이룬 존재는 신에 필적하여 절대자를 필요로 하지 않기에, 결여가 남아있어야만 그것을 해결해줄 수 있는 신에게 충성하는 법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인간 로버트는 기꺼이 '아도니스'가 되어 제우스-레이몬드의 술잔에 넥타르를 따른다. 2부에선 인간을 지배하는 구조를 구성하고 관리하는 ‘경찰’이 다니엘이기에 그는 다음 숏에 자신이 원하는 ‘신체 훼손’을 이어낸다. 신체가 훼손된 사람이 문제와 결여가 많아 신이 다루기에 편리하다. 3부에서 조셉은 에밀리를 특수 강간하고도 처벌을 당하지 않는다. 오히려 밀교에서 쫓겨나는 쪽은 피해자 에밀리다. 가해자 남성이 추악한 욕망을 저지르고도 처벌을 당하지 않는 신으로 만들어주는 가부장제의 힘을 체감할 수 있다. 

    

그런데 여기서 의문이 생긴다. 3부 전체를 아울러서 신이라는 개념에 근접한 이는 레이몬드 밖에 없다. 다니엘은 몰락하는 신이다. 본래 구조를 관리하고 지배할 수 있는 독점적인 지위를 가졌던 '백인 남성'의 곁에는 경쟁자 '흑인 남성'이 있고, 여성조차 결코 고분고분하지 않다. 다니엘이 바라는 순종적인 리즈의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욕구에 솔직하며 아버지에게 손찌검을 하고 대드는, 가부장제에 균열을 내는 여성이 자리해있다. 심지어 더 아이러니한 것은 영화 내내 신적 존재-남성보다는 인간-여성의 유능함이 부각된다. 무인도에서 어떻게든 버텨낸 존재는 흑인 남성이 아니라 백인 여성 리즈요, 3부에서 생사를 결정하는 루스도 신이 아니라 인간에 상응하는 여성, 신적 지위를 가진 에밀리 또한 여성이다. 그렇다면 오히려 신이 인간을 필요로 하지, 인간은 신을 굳이 필요로 하지 않는다. 신으로 불리는 남자가 가짜 신이고, 인간을 상징하는 여성이 사실은 진짜 신인, 무언가가 단단히 잘못 뒤집힌 상황이다. 

영화 전체를 관통하는 또 다른 보편성은 젠더와 인종의 스테레오타입이다. 인간이자 진짜 신들은 1부의 로버트를 제외하면 대체로 여성이고, 반대로 가짜 신은 남성이 다수다. 그래서 신과 인간은 젠더로서 나뉘는데, 남성은 특정 상황에서만 관용을 베푼다. 레이몬드와 다니엘처럼 제 기준에 들어맞는 객체 앞에서만 다정하고, '병원'과 같은 특정 공간에서 간호사라는 직업, 역할을 따라야만 친절하다. 그렇지 않다면 에밀리의 손목을 거세게 잡아끄는 조셉처럼, 리즈에게 손찌검하는 다니엘처럼 대체로 매우 흉포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성은 '가해자'라는 자신의 맨얼굴을 노출하기는커녕 가면을 쓴다. 로버트처럼 손이나 발을 다쳤다며 절뚝거리고, 다니엘은 정신장애로 인해 간병이 필요한 환자로 규정되며, 조셉 역시 홀로 딸을 키우는 제 불쌍하고도 외로운 모습을 어필한다. 총 세 개의 각기 다른 차원 속에서 남성들은 공통된 젠더, ‘피해자로 위장한 가해자’를 입고 있다. 

이 남성의 젠더를 두고 여성들의 반응이 각기 달랐다면 세 가지 이야기는 더욱 다채로웠을 것이다. 그런데 여성의 반응이 성 역할 및 관행을 따라 세 이야기 모두 유사하게 펼쳐내기에, 다름 속에서 동일함이 도드라진다. 분명 오늘날의 여성은 변화한다. 중간 지배자인 비비안, 자신이 농락당했음을 깨닫고 미련 없이 떠나는 사라, 남성 없이도 충분히 생존해낸 리즈, 법을 지키지 아니하고 오히려 자신만의 법을 만드는 에밀리처럼 말이다. 하지만 그녀들은 제 주체성을 오롯이 실현하지 못한다. 그녀들 앞에 선 '피해자를 연기하는 가해자 남성'이 전근대적인 여성의 성 역할, ‘모성’을 자극한다. 남성은 오직 병원에서만 간병인으로 등장하는 반면, 세 이야기 모두에서 여성은 고통을 호소하는 남성을 차마 외면하지 못한다. 절뚝거리는 로버트를 일으키는 리타, 다니엘이 자신을 위협하더라도 고마움을 느끼는 리즈, 끝끝내 조셉을 뿌리치지 못한 에밀리 등 대부분이 그렇다. 심지어 베트남계 미국인 여성 배우 '홍 차우'가 연기하는 세 배역에선 조금의 주체성도 찾아볼 수 없다. 늘 남성 곁에서 그들을 보필하며 젠더에 인종적 스테레오타입까지 더해졌다.   


즉 신적 존재는 제게 유리한 젠더를 놓지 않고, 인간적 존재 역시 제게 불리한 젠더를 떼놓지 못하는 실정이다. 젠더에 의해 무능한 가해자가 동정을 받는 반면, 유능한 피해자는 어두운 제 등잔 밑을 보지 못한다. 그럼에도 젠더가 힘을 잃어가며 신들의 종말이, 또 다른 형태의 르네상스가 부상하고 있음에도 왜 신화는 끝나지 않는가? 세 이야기의 각기 다른 결말이 신이 여전히 존재하는 여러 이유를 보여준다. 첫 번째는 인간이 필요로 하는 자원을 오랜 시간 이어져 온 가부장제에 의해 신이 모조리 독점하게 되어서, 신한테서 벗어난 인간이 진정한 자유를 누릴 수 없기 때문이다. 족쇄에서 풀려나도 인간이 하고 싶은 것을 모조리 신이 선점하고 있기에 다시금 인간은 신화적 세계로 발을 내딛으며 인간적 역할을 수행한다. 그것은 현대의 새로운 신화, 신자유주의적 자본가의 이미지를 고스란히 보여주는 레이몬드한테서 드러난다.

두 번째로는 나쁜 젠더를 한 번이라도 수행하면 존재에게 치명적인 공격을 가해 헤어 나오지 못하게 만든다. '허'스토리를 집필할 수 있던 리즈는 끝끝내 고루한 성 역할을 수행하다가 쇠약해진다. 육체와 정신 모두가 쇠락해가며 스스로 온전한 판단이 불가능하게 된 리즈는, 다니엘 곁을 떠날 수 없게 되고 가부장제에 다시금 수감된다. 결혼이라는 한 번의 결정으로 임신과 출산이 이어지고, 이혼 이후에도 전 남편과 딸 곁을 떠날 수 없는, 제 몸이 단단히 ‘오염’된 에밀리 역시 마찬가지다. 죽은 것을 되살리는 여성 젠더를 수행하다가 죽음에 이르게 된 루스는 어떠한가. 이처럼 나쁜 젠더는 한번 발 디디면 헤어 나올 수 없는, 오히려 더더욱 세게 붙잡는 덫과 같다. 반대로 좋은 젠더는 존재에게 그것을 유지하고 반복할 수 있는 권력을 수여함에, 그 젠더가 박탈될 순간에도 완강하게 고집을 부리며 발악한다. 그래서 신들을 끌어내리기란 쉽지 않다.

세 번째로는 몰락하는 신들이 망상장애를 치료하지 않음에 현실은 부정되고, 그들은 제게 부여된 권력을 이용하여 바라는 가상을 현실로 대체한다. 끝끝내 리즈는 사망하고 대신 남겨진 것은 가짜 리즈가 죽고 진짜 리즈가 돌아왔다고 믿는 다니엘의 '히'스토리며, 그 거짓이 진실을 잠식하다 못해 구조마저 이룬다.   

   

가짜 신은 늘 파괴하고 앗아가는 반면, 그 자리에 무언가를 채워 넣는, 심지어 죽은 자를 일으키는 능력을 가진 자는 오히려 인간이다. 가짜 신은 자신이 앗아가 버린 세계에 다시금 무언가를 채워 넣기 위해서, 또한 그 변덕과 성욕을 다 받아줄 세뇌된 진짜 신을 갈망하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보편적인 여성 및 미국, 더 나아가선 호모 사피엔스가 처한 부조리다. 숭상되는 가짜 신들의 무능력함과 그들을 숭배하는 진짜 신들의 가련하면서도 우매한 운명…

다만 그 주제의식은 심히 불쾌해야만 경각심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 물론 본 작품도 충분히 불쾌하고 고통스럽지만 란티모스의 이전 작품들, 특히 그리스 시절에 비하면 부조리의 강도가 다소 약하다. 그 이유는 연출에 있다. 그리스 시기의 작품들은 저자본으로 제작되었다. 이 말은 곧 현실과 원천 분리된 환상의 세계를 마련할 수는 없었다는 얘기다. 그래서 의도하였든 의도하지 않았든 현실의 거칢과 생생함을 반영할 수밖에 없었고, 그 현실에 속한 감상자는 충격을 외면하기 어려웠다. 지금 당장 내 곁에, 심지어 내게 발생하는 일이라고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런데 미국에서 시네아스트로서 인생을 확장해가고 있는 란티모스는 제게 주어진 대규모 자본을 활용하여 속칭 '때깔 좋은' 작품을 만들고 있다. 바로 그 아름다움, 심미성이 문제다. 감상자를 만족스럽게 만드는 힘이 바로 아름다움이기에 형식으로는 충격이 경감되고, 또한 이해되지 않는 것을 설득시키는 아름다움이기에, 부조리함에 몸서리치기는커녕 그저 수용하게 된다. 또한 대규모 자본은 현실을 지우고 가상을 형성할 수 있기에, 내 일이 아니라 남 일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즉 형식의 퇴조가 옴니버스극으로써 폭로한 이 세계의 추악한 보편성을 효과적으로 부각하지 못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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