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와 세계
최첨단 정보화 시대에 살고 있는 현대인, 그러나 우린 여전히 많은 것을 모른다. 우리에게 익숙한 건 나 자신에게 부여된 성별, 그것의 사회적 역할과 관행으로 범벅된 시야에서 얻은 정보뿐이다. 그래서 우리는 여전히 내가 타고나지 못했고, 또 부여받지 못한 성별에 의한 관점을 모른다. 심지어 오랜 역사 속에서 이념은 성별 사이에 크나큰 장벽을 쳐 놓았다. 가깝지만 결코 모르는 대상이 바로 이성(異性)이다. 또한 우리는 나 자신도 모른다. 우리가 아는 스스로는 한낮에 깨어있는 명석한 의식이지, 야심한 밤에 동공이 내려앉으면 스멀스멀 깨어나는 야수 같은 무의식이 아니다. 마치 타인의 시선이나 거울을 빌리지 않고선 접할 수 없는 나 자신의 얼굴이나 뒤태와 같은 것이 자신의 것임에도 불구하고 낯설다. 즉 먼 곳에 있는 정보를 알아도, 정작 가깝고도 친숙한 것들을 모르는 우리, 그래서 여전히 인간은 타자의 눈을 빌려 등잔 밑을 헤아릴 필요가 있다. 미야케 쇼의 카메라는 늘 가까운 것들의 사이, 기성/청년, 장애/비장애의 간극을 좁히는 작업을 수행해왔고, 본 작품에서는 성별과 장애로 이어진다.
1984년 훗카이도 태생의 미야케 쇼는 일본의 시네아스트다. 그의 영화는 늘 두 차원으로 양분되어 있다는 점이 특징이다. 과거/현재, 가상/현실 등으로 말이다. 등장인물들이 몸담는 세계가 분열된 이유는 ‘개념으로서의 세계’와 ‘실재로서의 세계’의 간극이 크게 벌어져 있기 때문이다. 세계에 대한 개념은 주로 어렸을 때 확립된다. 백지와 같은 뇌리에 처음 경험한 것들이 강렬하게 각인되고, 또 보호자가 세계는 이러 저러한 형태라고 알려준다. 그러나 오늘날의 세계는 적응하기 어려울 정도로 급변했다. 어렸을 때 기억한 개념으로서의 세계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일본의 '사토리 세대'를 만들어낸 경제뿐 아니라, 코로나 펜데믹으로 인한 접촉 방식의 변화 및 아날로그에서 디지털로의 이행도 빼놓을 수 없다. 미야케 쇼가 다루는 인물들은 그 두 세계 사이에서 늘 방황한다. 뿌리내릴 수 있을 거라 판단한 세계는 사라졌고, 뿌리를 내려야 하는 세계는 내가 기대한 세계가 아니다.
세계의 분열은 ‘관계’에도 큰 영향을 미친다. 긍정적이기 보단 부정적으로, 불통이나 몰이해의 형태로 말이다. 각기 다른 세계에 몸담고 있는 존재는 행동 양식이나 가치관이 현저하게 다르다. 그래서 이해할 수 없는 크나큰 간극이 발생한다. 또한 세계에 뿌리내리지 못한 존재는 자신을 오롯이 드러내지 못한다. 세계 속에서 승인되지 못한 자신을 주변부의 아웃사이더를 자처하며 은닉한다. 분열된 세계는 그 세계 속의 구성원 또한 분열시키는 것이다.
미야케 쇼는 늘 ‘필름’을 이용해 분열된 세계와 존재를 포착한다. 그것은 미야케 쇼 본인에게 확립된 영화라는 개념일 수 있다. 20세기 후반에 영화에 대한 개념이 확립되었을 그에겐 디지털보단 필름이 영화라는 개념을 규정할 테다. 하지만 그보다도 미야케 쇼는 필름의 효과에 더욱 주목하듯 보인다. 그는 필름의 그레인을 부각하며 거친 물성, 낡아가는 유한성을 가시화하는데 그것이 곧 전환기에 막을 내리는 세계의 풍광이다. 또한 오돌토돌 따끔거릴 것만 같은 필름의 매체성은 전환기가 인간에게 가하는 통증을 가시화한다.
하지만 미야케 쇼의 영화는 낡아가는 필름의 상태에 그치지 않는다. 원치 않는 세계를 외면하며 숨어버린 존재들이 자신을 드러낼 수 있는 수단, 필연적으로 각기 다른 표상에 속할 수밖에 없는 이들이 서로를 이해할 수 있는 장치(<너의 눈을 들여다보면>에서의 수어 자막)를 필히 사용하며 새로운 세계를 환대함과 동시에 옛 시대의 유산을 받아들이며 균열을 봉합하고 이해를 완성한다. 또한 흐리고 멀기에 그만큼 다가가고 싶은 필름의 매혹적인 아름다움을 활용하여, 서로의 요원한 세계를 다가가고 싶은 세계로 승화한다. 이로써 그의 영화는 끝끝내 다가가기에 이른다. 이제는 필름으로 젠더와 장애에 의해 정의된 두 세계를 비춘다.
도입부, 어둠 속에서 무언가가 자꾸만 자글거린다. 노스텔지어의 흐릿함과 아스라함, 꿈에서 본 듯한 미감과 흡사한 16mm 필름이 본 작품에서도 사용되었기 때문이다. 필름의 긍정적인 매체성 뿐만 아니라, 다소 부정적인 매체성이자 한계라고 칭할 법한 ‘거친 유한성’까지도 미야케 쇼는 긍정하기에 그레인을 굳이 숨기지 않는다. 이윽고 어둠이 개며 그가 비추고자 하는 세계가 드러나고, 이때 우리는 그레인이 그레인 그 자체가 아니라, 무언가 다른 것을 비추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된다. 미야케 쇼는 그레인과 유사한 무언가의 속성을 효과적으로 가시화하기 위해서 그레인을 강조한 것이다. 그것은 바로 아스팔트의 거친 표면이요, 세차게 쏟아지는 악천후의 빗방울이다. 그것들의 까끌거리는 감촉, 거친 표면, 날카롭게 튀는 느낌을 흡사 압정, 나사, 못 등의 감각처럼 가시화할 수 있는 그레인은 이윽고 후지사와라는 이름의 여자를 주저앉힌다. 아스팔트의 따가운 표면, 하늘에서 내리꽂히는 세차고 날카로운 빗방울은 PMS로 인해 감각이 극도로 민감해진 그녀를 쓰러트리고야 만다. 버스를 타고 '수평'으로 이동하려는 그녀를, '수직'으로 낙하하는 불가항력이 기어코 좌절시킨다.
즉 16mm 필름의 쓰임새는 본 작품에서 결코 낭만적으로 시작되지 않는다. 그것이 부각하는 모든 것은 '방해꾼'이다. 16mm 필름의 다른 역할도 마찬가지다. 16mm 필름은 희멀겋다. 잘 쓰이지 않는 8mm 필름에 비해선 선명해도, 16mm 필름보다 비교적 대중적인 35mm 필름과 매우 보편적인 디지털에 비해 현저하게 흐리고 어둡다. 그래서 16mm 필름이 어둡거나 거칠고 뿌연 것을 비추게 되면, 안 그래도 잘 안 보이는 것들은 더 안 보인다. 영화 속 그러한 공간은 후지사와와 야마조에가 원치 않은, 강제로 끌려가거나 무의식의 장난으로 인해 나도 모르게 가게 된 '시련의 세계'다. 그 차원은 비가 잔뜩 내리거나 어둡고 침울하며 난잡해서, 보고자 하는 것이 자명하게 보이지 않는다. 이는 후지사와를 조력하는 노리코와 야마조에가 그녀가 보고자 하는 것을 보게 만들어준다는 점에서 확연한 대비를 이룬다. 엄마가 운전하는 차량의 '와이퍼'가 세계를 투명하게 열어젖히고, 야마조에 역시 후지사와의 '세차'를 돕는다. 후지사와 또한 야마조에가 지금 당장 꼭 봐야만 하는 '알약'을 찾아주거나, 그 자신이 보고자 했던 '삶의 이유'를 되돌아보게 만들어주는 등 원하는 세계를 펼쳐다준다.
하지만 날을 개는 조력자들이 24시간 내내 곁에 붙어있을 순 없다. 노리코와 의사, 후지사와와 야마조에 서로가 없는 곳에서 이들이 통제할 수 없는 장애는 불가항력적으로 엄습하여 회사, 요가교실에서의 그들을 흐려지게 만든다. 특히 요가교실에서 후지사와의 의지가 약해졌을 때, 그녀는 별 것도 아닌데 신경을 자극하는 강사의 얼굴을 '거울'로 본다. 객관적인 대상 자체로는 별 문제가 없다. 그러나 거울이 좌우를 뒤집어서 보여주듯, 장애로 인해 자아의 주인이 뒤바뀌면 마찬가지로 시야 역시 180도 바뀌기 때문에 괜히 트집이나 꼬투리를 잡는다. 이때 16mm 필름은 시련의 세계를 객관적으로 포착할 뿐만 아니라, 그들의 장애로 인해 시련이 된 주관적인 표상, 걸림돌로 인해 흐려진 그들의 의식 역시 혼미하게 가시화한다.
이에 미야케 쇼는 16mm 필름에 '롱숏'을 적극 결합한다. 본디 자신은 매끄러웠고, 또한 가까웠다. 그런데 PMS와 공황장애로 인해 익숙한 나의 상태에서 멀어진다. 그렇게 닥쳐온 내 모습은 롱숏 속에서 '작다.' PMS로 인해 직장에서 실례를 범한 후지사와의 모습이 광대한 스크린이 아니라, 스크린 속의 또 다른 프레임인 '태블릿'에 담긴다. 전혀 다른 세계 속의 내 모습은 너무나 낯설다. 만약 일반적인 스크린이라는 프레임에 담긴다면 PMS로 인해 예민하게 굴거나 약물 부작용을 겪어 해일처럼 몰려오는 수면에 굴복해버린 모습 등이 롱숏으로 담긴다. 그들 자신의 의지가 극도로 작아진 것이다. 또한 가깝고도 친숙하던 자신과 멀어져, 그만큼 내게 나 자신이 어색하다.
이 소외와 낯섦은 결코 절대적이지 않다. PMS와 공황장애 모두 다 그들 자신이 통제할 수 없을지언정 최소한 스스로 인지하고 있다. 병원에서 병명을 확인할 때, 타로를 보며 자신의 상황을 인지할 때, 후지사와가 발견한 야마조에의 ‘친숙한’ 알약 등을 미야케 쇼는 롱숏 대신 '클로즈업'한다. 상대와 특정 상황에선 낯설지 몰라도, 질환 자체는 그들 자신에게 애증이자 악연으로서 '오랜 이웃'이기에 가까울 수도 있다. 그래서 롱숏은 똑같은 상황에서 상대적인 감정을 느끼는 여러 사람이 한 프레임을 공유할 땐 상대적이다. 후지사와가 야마조에를 이해할 수 없을 때 그는 비교적 전경에 위치하여 '풀숏'이나 '바스트 숏'인 반면, 그녀는 후경에 배치되어 롱숏이 되고, 그 입장이 서로 바뀌었을 땐 반대로 프레임을 점유한다. 먼 이유는 단지 상대가 나를 잘 모르고, 나 또한 그 상황에 익숙하지 않은 것이기에 충분히 가까워질 수 있다.
하지만 어떤 롱숏은 절대적이다. 바로 그들이 속한 회사와 마을을 넘어서, 그 모든 것을 아우르는 거대한 도시, 그것조차도 품어내는 광대한 세계를 포착할 땐 의심의 여지가 없는 절대적인 '익스트림 롱숏'을 사용한다. 그것은 우리가 서로를 이해하며 극복할 수 있는 상대적인 시련과 달리, 아무리 발버둥 쳐도 감당해야만 하는 의문이자 시한부와 같은 시련도 존재함을 가시화한다. 영화에선 두 주인공의 보호자격 인물들이 등장한다. 후지사와에겐 어머니 노리코, 야마조에에겐 아버지격의 인물 츠지모토와 연인임과 동시에 보호자를 자처하는 후지마다. 이들은 분명 후지사와와 야마조에의 혼탁한 세계를 씻겨준다. 그러나 이들 모두 다 자신에게 주어진 시련 속에서 휘청거린다. 가까이선 직접적으로 후지사와를 일으키고, 멀리서는 생필품을 보내주는 노리코는 도입 기준 5년 후 극도로 쇠약해진 모습으로 재등장한다. 한때 후지사와의 세계를 열어젖히던 그녀의 세계를 이젠 딸이 열어젖혀야 한다. 우리는 그런 선조의 필멸성 역시 똑같이 물려받으며 태어났다. 또는 이 시련의 세계 속에서 선조들은 그 물결에 대항하지 못할 만큼 가볍고 나약했고, 그 본성을 고스란히 자손에게 물려준 것이다. 그래서 클로즈업은 본 작품에서 무상하리만큼 짧다. 한때 다가갔다가도 이내 곧 멀어지는 것이 당연하다. 우리가 알게 된 것, 지금 여기서 자명하게 보고 있는 것이라 할지라도 그 찰나가 지나면 어떤 모습으로 변해있을지 모른다. 다시 모르게 되고 낯설어질 수밖에 없는 우리의 운명을 선조로부터 타고났다.
또한 아버지격의 인물 츠지모토한테선 '죽음'이 부각된다. 츠지모토 뿐만 아니라 회사의 상사 역시 망자를 기리는 제사를 지내고, 둘은 같은 트라우마 치유 모임에 참여한다. 죽음은 그들의 삶을 구성하던 가장 중추적인 존재들을 앗아갔다. 그 아버지들은 죽음을 감히 예견할 수도, 막을 수도, 그렇게 떠나간 자를 되살릴 수도, 잠시나마 만날 수도 없다. 유한함 앞에서 좌절하는 인간의 한계와 죽음 역시 후손들에게 전승되고 또 전승되어 클로즈업을 롱숏으로, 아예 텅 비게 만든다. 그래서 인간에게 절대적인 것이란 클로즈업이 아니라 롱숏이다. 우리는 잠시 주어지는 클로즈업을 그저 후회 없이 누려야 할 뿐이다.
다만 우리는 마냥 체념할 필요는 없다. 절대적인 것은 몰라도 상대적인 것은 충분히 극복할 수 있다. 또한 절대적인 것 역시 잠시 나마 유예할 수 있다. 알약을 잃어버린 채로 공황 발작과 맞닥뜨린 야마조에와 길거리에서 PMS 증세를 느낀 후지사와의 곁에 타인이 없었다면 그들은 장애가 불거져 죽음을 피할 수 없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타인은 그들이 아직도 세계에 거주할 수 있게 만들어준다. 서로는 '문'이다. 장애로 인해 나 자신이 두려워진 이들은 문을 단단히 걸어 잠근다. 나도 모르는 내가 자신을 어떤 방향으로 인도할지, 그래서 내가 어떤 세계를 마주하게 될지 두렵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결과는 '제한'이다. 문을 닫아서 원하는 곳에 가지 못하고, 하고 싶은 것을 하지 못한다. 엄하게 걸어 잠가 통제할 수 있는 세계란 좁다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들의 집과 회사에서의 어두컴컴한 프레임, 요양원 등이 그렇고, 야마조에의 공황장애가 대중교통을 두려워한다는 설정도 이동의 축소를 보여준다. 이런 와중에 조력자는 굳게 걸어 잠긴 문을 두드려서 ‘열고’, 그 문턱 너머를 엿보며 이해하고, 심지어 그 곳으로 진입한다. 거기서 그들 자신이 스스로를 위해서 해야 할 것임에도 불구하고 하지 못하는 것을 돕는다. 후지사와는 야마조에의 머리를 잘라주고, 그러다가 웃겨서 그의 감정을 되찾아준다. 그에게 자전거를 주어 넓은 세계에 용이하게 참여하도록 돕는다. PMS 전문 서적을 읽은 야마조에는 후지사와가 PMS에도 불구하고 회사에 계속 남을 수 있도록 조력한다. 서로는 세계를 함께 열고 나가며 감당하지 못할 변수와 우발을 감내해주는 조력자로서, 이를 위한 조건은 공감과 이해다.
또한 우리는 아무리 둔탁하고, 결코 변치 않을 것 마냥 확고하게 보이더라도 그 속내는 실없고 허무하다. 그런 우리를 변하게 만드는 바람, 비, 우주의 거대한 어둠 등이 아무리 가볍고 비어보이며 공허해보여도, 정작 그 흐름은 불가항력으로서 아주 견고하고 거세다. 모든 것을 결국엔 흐르고 변하게 만드는 불가항력 속에서 무거운 줄 알았던 우리는 그야말로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느낀다. 이런 와중 서로는 '닻'이다. 주인공들이 PMS와 공황장애로 인해 기력을 탕진하여 폐쇄적인 세계에 몸을 숨긴 동안, 조력자들은 이들에게 생필품과 선물, 잃어버린 물건 등을 ‘두둑이’ 가져다준다. 이로써 거대한 불가항력에 나부낄 위기에 처한 가벼운 이들을 다시 무겁게, 이 세계에 닻을 내리게 만들어준다. 즉 혼자라면 어제를 상상조차 못할 정도로 변화한 오늘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라면 오늘엔 어제가 이어져 있을 것이다. 혼자에서 우리가 된 그들은 더는 '지진'이 두렵지 않고, 자신의 장애에도 불구하고 세계에 참여하는 것이 무섭지 않다.
물론 아무리 버텨내고 또 버텨내도 우리가 극복할 수 있는 영역은 상대적인 것에 그친다. 우리에게 주어진 죽음이라는 어쩔 수 없는 운명은 결국에는 한 순간의 끝과 이전이 기억나지 않을 변화를 가져다주리라. 후반부, 회사를 포착한 '디졸브'가 그 숙명을 가시화한다. 회사에선 다들 서로 간식을 나눠먹고 조력하며 지금 이 좋은 순간을 조금이나마 길게 유지하려 한다. 하지만 디졸브가 보여주는 것은 이전 상태가 '잔상'으로서 이후 숏에 잠깐 남더라도, 결국에는 뒤바뀐 이후가 이전을 기억나지 않게 만든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영화 속 우주에 대한 나레이션처럼, 시련이 없다면 그 시련 속에서 발버둥치는 나, 위기 속에서 어떻게든 보존하고 싶은 것을 인식할 수 없는 법이기에 시련 속에서 소중한 나의 요소를 발견함과 동시에, 그 흐름을 차라리 즐기는 편이 낫다. 피보호자에서 보호자가 되는 후지사와처럼, 늘 이직을 생각했지만 현 직장에 보람을 느껴 정착하는 야마조에처럼 거스를 수 없는 변화나 즐거운 변신이라면 흔쾌히 수긍하는 편이 우리의 가벼운 생을 조금이나마 두텁게 만들어 즐길 수 있게 만들어 주리라.
즉 인간은 우리가 되기 위해 타인을 이해해야 하고, 또 시련의 세계를 명확히 인식해야만 거기서 받아들여야 할 것과 저항할 것을 찾을 수 있다. 그러한 숙명 앞에서 영화는 내 눈 앞에 잘 보이지 않는 미지의 자신과 친숙하지만 낯선 타인을 보이도록 이미지화하고, 종합 예술로서 청각과 언어를 덧대어 이해하게 만들어준다. 즉 미야케 쇼는 영화로써 우리 주변에서 이해되지 않는 친숙한 장애와 다름의 간극을 좁히지만, 그 과정 속에서 동시에 영화의 역할 역시 고찰한다. 16mm 필름과 카메라의 거리감은 이 탐구에 효과적으로 일조한다. 구성 역시 마찬가지로 후지사와와 야마조에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유형으로 시작됐지만 소박한 노력과 관심으로 결국엔 이해하며, 이동은 무언가로의 다가감이라는 것을 여실히 보여준다. 채워냄과 동시에 이중적으로 비워내는 흐름이라는 것도 말이다. 그 노력으로 도입에서 후지사와만 말하던 독백을, 클라이막스에선 야마조에한테서도 듣게 되었다. 다만 그 현란한 연출이 전반에 그친다. 전반에 타인과 세계를 이해하기 위해 전력질주를 한 모양인지, 후반은 그저 알게 된 것을 되새김질하는 수준에 그친다. 흥미로운 작품이지만 작품 전반의 균형이 다소 아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