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2024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정수 Oct 10. 2024

카림 아이노우즈, <모텔 데스티노>

존재로서의 원죄

카림 아이노우즈, <모텔 데스티노> - 존재로서의 원죄   

인간의 본성 상, 욕망에 적합하거나 이로운 것은 결혼 제도가 아니라 끝없는 연애 내지는 바람이다. 조르주 바타이유의 에로티즘을 따른다면 말이다. 인간은 불가능한 관계를 실현하거나, 금기의 경계선을 넘었을 때 흥분하고 전율한다. 그렇기에 연인은 어떻게든 신비롭거나 위대하여 쉽게 닿을 수 없을 듯한 분위기를 풍겨야 한다. 그마저도 모든 감각은 상대적이어서 결혼이라는 제도가 “당신들은 이제 국가가 승인한 연인”이라고 땅땅! 공표하게 되면 한때 간절하던 상대의 신비로움이 실종되어 권태에 빠진다. 서류가 둘을 묶어놓은 그 순간부터 상대는 불가능하지도 않고, 금기도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서로 배신하지 않게끔 관계를 유지하려면 서로가 바라는 신비를 유지해야 하지만, 인간이란 모름지기 유한하기에 밑천이 드러나는 법이다. 결국엔 추억이 된 위반을 향해 고개를 회전하고 다시금 위태롭게 경계를 넘고자 동공을 돌린다. 그리고 아이노우즈는 신작 <모텔 데스티노>에서 이러한 인간의 ‘운명’을 탐구한다.  

   

1966년 포르탈레자 태생의 카림 아이노우즈는 알제리인 아버지와 브라질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브라질의 영화감독이다. 그는 작품 대부분에서 성을 탐구한다. 하지만 보편적이고 통상적인 성 관행이나 역할을 재현하진 않는다. 그의 작품에선 생물학적으로 타고난 성별인 '섹스', 거기에 당연히 따라오는 '젠더'를 거부하고, 섹스와 불일치한 젠더를 지향하는 '트랜스젠더'가 자주 등장한다. 직접적인 성 전환이 아니더라도, 그가 다루는 여성들은 항상 전근대적인 여성 젠더를 거부하기에 느슨한 트랜스 젠더라 칭할 수 있다. 욕망에 있어서든, 경제에 있어서든 가부장제의 남성성과 닮은 주체적인 젠더를 여성들은 입는다. 성 지향성도 마찬가지로 이성애 중심적인 이데올로기를 아주 맹렬하게 거부한다. 

이렇게 아이노우즈의 성은 단단히 정박하기보단, 자유롭고도 쾌활하게 표류한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태어나면서부터 불가항력적으로 정해진다고 믿는 아주 단단한 닻과 같은 성과 정 반대다. 가볍고도 경쾌한 성의 유희를 예찬하는 주인공들은 '여행'을 떠난다. 아이노우즈 그 자신도 오롯이 브라질인도 아니고, 그렇다고 알제리인도 아닌 정체성을 지닌 것처럼, 그 무엇도 정해지지 않은 성을 지향하는 주인공들 역시 여러 나라를 떠도는 '노마드'다. 아이노우즈는 ‘로드무비’인 <슈리 인 더 스카이>, '바다'를 떠도는 뱃사람들이 등장하는 <푸투루 해변>, <인비저블 라이프> 등 장르를 선별하거나, 인간을 둘러싼 물리적 저변을 비추며 ‘여행자’인 성의 천성을 부각한다.

그러나 이 여행이 늘 낭만적이지는 않다. 주인공이 나고 자란 사회에서 성 정체성과 지향성의 자유로운 전유를 허락했다면, 이들은 굳이 떠돌지 않았을 것이다. 그들은 지금 여기서 불가능하기에 어쩔 수 없이 떠나야 하는 ‘난민’이다. 그래서 이들은 모국에 태어나면서 선천적으로 지녔던 소중한 것들, 특히 ‘가족’을 포기한다. 그래서 아이노우즈의 영화는 반쪽짜리다. 선천적인 것이 가능하면 후천적인 것이 불가능하고, 후천적인 것이 가능하면 선천적인 것을 포기한다. 그런 점에서 아이노우즈의 이상적인 작품이라 할 수 있는 <슈리 인 더 스카이>나 <마담 시타>에선 대안 가족을 이루며, 선천적인 것과 후천적인 것 양자를 모두 취하는 형태를 보여준다.      


그는 신작에서도 이곳저곳을 오가는, 정확히는 난민으로서 무언가에 쫓기는 이야기를 연출한다. 본 작품을 후원한 제작사들의 위엄 넘치는 로고로 가득한 도입의 크레딧, 시각으로서 영화는 아직 무(無)에 가깝다. 유의미한 무언가를 비추는 카메라의 역할을 조금도 느낄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청각은 아예 무의미하지 않다. 철썩거리는 소리가 계속 들려오며 무언가가 있다는 사실을 계속 환기한다. 그것은 바로 파도 소리다. 그 파도는 모래사장을 향해 지속적으로 밀려오며 무언가를 가져다준다. 바닷물이 담고 있던 티끌들이 모래사장에 모여 거대한 유(有)를 이루고, 카메라는 그것을 비추며 비로소 영화다운 영화가 시작된다. 즉 아이노우즈에게 흐르고 가져오는 물이야 말로 유, 곧 생명의 원천이다. 무에서 유로의 이행이 가만히 머물러있지 않는 '변화'인 것처럼, 동시에 물은 쌓아올린 유를 이러저러하게 변화시킨다. 쉴 새 없이 찰싹찰싹 대지와 마찰하면서 생긴 결과가 침식된 암벽들이다. 지금은 구멍이 숭숭 뚫려있지만, 한때는 작았을 수도 있고 어떤 흠결도 없이 완전했을 수도 있다. 생성과 파괴의 양가성, 그것이 바로 물의 속성이다.

그 무수한 물의 결실 중의 하나가 바로 인간이라 하겠다. 도입부에서 포착되는 헤럴드와 호르헤 형제는 물이 만들어낸 생명체로서 인간의 속성을 여지없이 보여준다. 그들은 충만하게 현재를 보내고 있으며, 심지어 미래 역시 낭비하기 싫은 듯 호르헤는 헤럴드에게 제 자식의 대부가 되어달라고 요청한다. 매 순간 끊임없이 흐르고 움직이며 채워내는 파도와 닮아있는 것이다. 또한 이들 형제는 과거에 어머니의 남자친구로부터 가혹한 폭행을 당했고, 결국에는 호르헤가 그를 살해할 수밖에 없었던 비극적인 과거를 지니고 있는데, 그 억압으로부터 변화하려는 물과 같은 의지도 보여준다. 그 철썩대는 물의 아이들은 리드미컬하게 움직이는 카메라 워킹으로 포착된다. 카메라와 영화 역시 끊임없이 움직이고 변화하는 물의 세계에 속했기에 탄생한 결과라는 듯 말이다.     


하지만 물의 자녀들은 바다에 살지 않는다. 이들은 액체와 정반대의 성질을 지닌 육지에 산다. 파도와 밀접한 육지는 변화로 가득하다. 무언가가 더해지기도 하고, 또 무언가가 깎여 사라지는 유동성으로 가득하다. 그러나 비교적 물과 유리된 육지에서 변화를 찾아보긴 어렵다. 물이 가볍고 경쾌하게 흐른다면, 육지는 무겁고 둔탁하게 멈춰있다. 흐르는 액체는 예기치 않은 가능성의 원천이다. 욕조에 대뜸 뱀이 침투하고, 수영장에 조류가 빠져 있는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육지에선 다른 기대를 할 수 없다. 육지는 시체를 은닉하는 장소이자 묘지다. 물과 달리 육지는 불리한 증거를 들추지 않을 것이기에, 묻어두면 꽤 오랜 시간 그 상태로 쭉 유지된다. 그 육지의 풍광을 포착할 때 카메라는 영화이기보단 사진에 가깝다.

그래서 육지의 규칙은 물의 아이들인 인간에게 썩 어울리지 않는 것이 사실이다. 헤럴드에게 물의 속성이 드러나는 장면은 도입부와 중반부에 다이애나와 염문을 펼칠 때다. 도입에서는 헤럴드와 호르헤의 관계를 마냥 형제라고 생각하긴 어려웠다. 아이노우즈의 작품이기에 두 남성이 프레임에 공존한다면 사회의 일반적인 통념을 따라 친구이거나 형제라 생각하기 선뜻 어렵기 때문이다. 더욱이 두 남성이 바닷가에서 유희를 즐기는 장면은 언뜻 보면 꽤 에로틱하게도 보이고, 호르헤가 헤럴드에게 대부가 되어달라고 요청할 때 헤럴드의 아쉬워하는 표정은 오해를 사기에 충분하다. 또한 헤럴드의 꿈에 호르헤가 등장하고, 그의 꿈은 악몽이 아닌 이상 다이애나가 등장하는 등 꽤 섹슈얼하다. 이러한 요소들은 둘의 관계를 '미결정적'으로 만든다. 어떤 방향으로 흐를지, 또한 어떤 형태로 변신할 지 알 수 없는 물과 같다. 다이애나와 헤럴드의 불륜도 마찬가지다. 본디 둘은 사장과 손님, 고용주와 피고용인의 관계라고 단단히 약속했다. 하지만 물의 특성을 지닌 인간, 그래서 계속 새로운 것을 찾아 헤매고 금연 장소에서 어떻게든 흡연하려는 그들은 정해진 관계에 만족하지 못한다. 이들은 다른 국면을 상상하고 실현하기에 이른다.     


상상하기 위해선 닫히거나 결정되어선 안 된다. 물론 그런 상태에서도 여러 가지 대안을 상상해볼 수 있지만 그것은 실현 불가능한 몽상에 그쳐 흥미가 떨어진다. 우리는 미약하더라도 실천할 수 있을 때 온 힘을 다해 상상한다. 아이노우즈는 상상의 원천을 '측면'이나 '뒤태'를 부각하는 촬영으로 보여준다. 본 촬영 역시 두 형제가 유희를 즐기는 도입부와 헤럴드와 다이애나가 처음으로 정사를 하는 장면에서 도드라진다. 측면은 대상의 얼굴 반쪽만을 알려준다. 뒤태는 정면을 아예 모른다. 그래서 비결정적인 이목구비, 그것으로 표상되는 존재의 영혼과 내면과 자아를 상상하게 된다. 그것이 어떤 모습이냐에 따라 나와의 관계도 무한하게 변화할 수 있다. 이때 인간은 무한히 자유롭다. 그러나 '정면'은 다르다. 이제 대상의 이목구비를 상상할 수도 없고, 그것에 표상되는 비가시적인 요소들도 대강 굳어졌다. 정면이 보여주지 않는 뒤태는 내게 큰 의미가 없기에 상상할 필요도 없다. 그래서 측면과 달리 정면은 밤비노에게 저당 잡힌 헤럴드와 호르헤 형제를 비출 때, 운명 모텔에 귀속된 헤럴드의 삶을 촬영할 때 연이어진다. 

또한 한 번 정면이 노출되면 측면이나 뒤태를 다시 보더라도 더는 상상할 수 없다. 상상의 해답지를 공유한 셈이기에 말이다. 그래서 우리는 그 정면이 희미해지게끔 멀어질 필요가 있다. 도입부에서 두 남자를 미결정적으로 묘사할 수 있었던 이유가, 카메라가 형제라는 사실로부터 저 멀리 '롱숏'이었듯, 역시 다이애나와 헤럴드의 정사도 이렇게도 저렇게도 보일 수 있을 정도로 CCTV에 작게 노출되는 것처럼 말이다. 그렇게 존재는 작아지고, 출렁이는 바다나 '여백'으로 가득한 초원에서 클라이맥스 헤럴드의 말처럼 우리는 다시 태어날 수 있다. 그렇게 지금 여기의 얼굴로부터 저 멀리 떠나 다른 삶의 형태를 상상하는 것이 아이노우즈의 여행이다. 그렇게 여행을 떠날 때 헤럴드는 여러 개의 ‘거울’ 속에 위치한다. 하나의 존재가 동시에 여러 다른 차원 속에 다양한 형태로 존재하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아이노우즈가 선택한 16mm 필름이라는 형식의 속성을 고찰할 필요가 있다. 이는 좀 더 자세히 후술할 원주민과 여성에게 각인되는 통념적 정면을 반영하는 형식일 수 있다. 16mm 필름은 거칠고 조악하다. 현재는 비싸졌을지 몰라도 과거에는 35mm 필름에 비해서 다소 허접하다고 단언할 수 있는 매체였다. 심지어 16mm 필름은 딱 그만한 값어치에 일조하듯 거칠고 흐릿하며 자글거린다. 아름답게 미화하기는커녕 정액과 피와 딜도와 마약으로 가득한, 그 악취를 숨기기 위해서 독한 향수를 칭칭 휘감은 추하고 더럽고 미천한 삶을 여과 없이 보여주는 형식인 것이다.

동시에 16mm 필름의 특성은 '해안적'이라 말할 수 있다. 동서고금을 막론한 미술사에서 내륙과 해안의 미술은 아주 큰 차이가 있다. 내륙은 변화가 적기 때문에 마치 미켈란젤로의 윤곽선처럼 조각과도 같은 선을 중시하는 반면, 수면에 분산된 무수한 빛의 프리즘에 친숙한 해안 지방에선 입체적인 색채와 패턴을 중시하는 경향이 있다. 그리고 영화에선 디지털이 대상의 윤곽을 또렷하게 재현하는 내륙적 특성을 보인다면 신비롭고도 오묘한, 현실의 것 같지 않은 색채를 구현해내는 필름이야 말로 해안적인 특성을 지닌다고 하겠다. 따스함과 냉정함이 공존하는 아침의 오묘한 빛깔, 야밤의 괴괴하면서도 현란한 조명, 모텔 내의 네온사인 등 운명으로부터 도망치고 제게 정해진 정면을 어떻게든 변화하고픈 액체적 의지가 16mm 필름에 가시화되는 것이다.

이는 16mm 필름으로 촬영된 숏을 이어내는 편집도 좌우한다. 운명의 모텔에 귀속된 이후에는 다이애나와의 불륜과 일리아스와의 짜릿한 공존, 모코에 의한 위태로운 적발을 제외하고선 편집이 꽤 평탄했다. 그러나 초반부의 경우 해변에서 어떠한 제약도 없이 유희를 즐기다가, 대뜸 정반대의 속성인 밤비나가 살인청부를 하는 숏을 잇는다. 하지만 이에 굴하지 않는 헤럴드는 그 정면이 또렷하게 보이는 오후를 거부하고, 그 모든 것이 모호해지며 서로의 몸이 측면이나 뒤로 포개지는 밤의 모텔로 향한다. 하지만 그 결과가 파트너의 배신과 호르헤의 죽음인 것처럼 숏의 속성이 전혀 예상하지 않은 방향으로 흘러간다. 그것이 운명에서 달아나면서도 또다시 운명에 붙잡히는, 물의 아이들 인간의 여정이다.      


하지만 영화에선 모두가 여행을 떠나지 않는다. 정면이 만족스럽지 못하거나 떳떳하지 못한 이들은 원주민이다. 반면 백인들은 늘 정면을 당당하게 내세운다. 살인청부를 요구하거나 그 살인청부에도 눈 하나 깜빡하지 않으며 일리아스는 다이애나를 창녀취급하고 헤럴드에게 무례한 쓰리썸 요구를 하는데도 조금의 수치심을 느끼지 않는다. 이들은 변화하려 하지 않는다. 사채업자이거나 견고한 사업장을 건립한 이들은 파도가 가져다준 티끌로 성채를 이뤘다. 이제는 그 파도가 자신의 궁전을 침식시키지 않게끔 사활을 걸고 그 자리를 지키고자 무거운 닻을 내린다.

반면 원주민은 여행을 떠난다. 원주민들의 이목구비에는 늘 '빚쟁이'라는 고정관념이 각인되기 때문이다. 호르헤와 헤럴드 형제는 어려서부터 기댈 곳이 없었다. 친부는 죽었다거나 상파울루로 도망쳤다고 알려져 있고, 그래서 혼자 된 엄마는 남자친구를 사귀며 그에게 의존할 수밖에 없었으며, 그 남자친구는 형제를 폭행했다. 그렇게 궁핍한 환경에서 자라다보니 자연스레 밤비노의 도움을 받다가 그녀의 손아귀에 귀속된 것이라고 추측할 수 있다. 이후 그녀의 사업장에서 탈출하여 모텔 데스티노로 향한 이후에도 일리아스가 헤럴드를 대하는 태도는 왜 원주민의 얼굴이 빚쟁이이자 노예일 수밖에 없는지 보여준다. "너를 숨겨 주겠다, 그러나 대가로 너는 나의 잡역부가 되어야 한다." 원주민은 그러한 얼굴을 만드는 시스템에 속해있고, 또한 그 얼굴이 가야할 '도로'를 따라갈 수밖에 없다. 그렇지 않다면 밤비나는 라파엘을 보내서 헤럴드를 징벌하지만, 그 길의 끝에서 호르헤가 죽어있다. 그래서 헤럴드는 차라리 길을 이탈한다.

여성 역시 자신의 얼굴을 측면으로 돌리는 존재다. 백인에게 귀속된 원주민과 마찬가지로 남성에게 붙잡힌 여성 역시 욕망을 거세당한다. 그녀들은 돈을 벌기 위해서 성을 도구화한다. 헤럴드 형제의 어머니도 그랬으리라 생각할 수 있고, 영화 속 만연한 매춘부들도 마찬가지다. 만약 그녀들이 성을 남성을 위해 바치지 않고, 오직 자신만의 욕망을 추구하면 처벌받아 마땅한 대죄로 여겨진다. 다이애나가 일리아스에게 그나마 덜 귀속되기 위해 피임을 철저히 하여 덜 공포스럽게 섹스를 즐긴다. 하지만 그마저도 들킨다면 일리아스가 자신을 질책할 것이라고 벌벌 떤다.     


이렇게 본성을 거세당한 이들은 모텔로 숨어든다. 그들은 운명이어야 하지만 기득권에 의해 빼앗겨 버린 운명을 모텔에서 되찾는다. 그 모텔엔 신음으로 가득하다. 인간의 것뿐만 아니라 사람이 쳐다보든 말든 뻔뻔하게 교미를 하는 당나귀의 것들부터, 신음과 무관하게 이곳저곳 쏘다니는 고양이까지 그야말로 야생 그 자체다. 거기서 인간은 자신의 운명, 자유로운 천성과 거세하지 못한 동물성을 환기한다. 이는 인종과 성 차별로 인해 부당하게 정해진 정면을 극복하는 것일 수 있으나, 정작 또 다른 위기를 불러온다. 인간에 의해 인위적으로 금기시된 섹스든, 본질적인 형태의 섹스든 양자 모두 매우 위험천만하기 때문이다. 전자는 처벌을 당하고, 후자는 막대한 에너지를 소비하며 작든 크든 폭력을 동반하고 그 행위의 결과인 임신과 출산도 막대한 위험을 부담해야 한다. 미겔이 복상사로 사망하는 것, 자신의 목을 졸랐던 헤럴드에게 오히려 흥분하는 다이애나, 욕망을 추구하며 밀고자가 되고 '호모'란 욕을 듣는 모코가 그렇다. 그래서 운명이란 복원해야 할 것임과 동시에 또다시 떠나야 하는 이율배반적인 것이다.

동시에 모텔은 온전한 야생이 아니다. 일리아스가 모텔을 더 확장하고 수완을 내고 싶어 하는 것처럼 야성성과 인위성이 기묘하게 공존하는 공간이다. 섹스를 하다가도 손님의 전화를 받고 나체로 칫솔로 날라야 하는 그런 공간이다. 이 인위성은 헤럴드가 달아나고 싶어 하던, 기득권이 만들어낸 작위적 운명을 또다시 불러온다. 백인과 남성의 섹스는 과시적이다. 어느 한 투숙객은 일리아스와 헤럴드에게 자신만만하게 보라는 듯, 더욱 거칠고 자신만만하게 삽입하는 모습을 과시한다. 반면 여성과 원주민의 섹스는 숨어야 하는 것, 떳떳하지 못한 것으로 전락한다. 그들이 빚쟁이이자 노예로서의 업무를 잘 수행하고 있는지 CCTV가 감시한다.      


제 욕망을 추구하면 어떻게든 죄를 짓는 본성적 원죄, 기득권이 만들어낸 시스템에 의해 태어나면서부터 빚을 지는 인위적 원죄, 이 모든 존재로서의 원죄에 잠식되어 그 죄를 지을 수밖에 없다고 당연하게 생각할 때 인간은 꿈꿀 수조차 없게 된다. 도망치면서 상파울루로 향하는 꿈을 꾸던 헤럴드는 모텔 데스티노에 머물며 어느 순간 운명에 만족한다. 이때 다가오는 꿈은 주체적인 것이 아니라, 수동적이라 말할 수 있는 악몽이다. 그에게 밤비나와 라파엘이 점프스퀘어로 닥쳐온다. 주체적이고자 할 땐 편집으로서 '거역'을 이어냈다면, 수동적이고자 할 땐 '순응'이 닥쳐오는 것이다.

그래서 우린 그 모든 존재로서의 원죄에서 달아나야 한다. 그래야만 우린 진정하게 주체적으로 다시 태어난다. 시스템이 만들어낸 인위적 원죄에서 달아나고, 단념하기 어렵더라도 다이애나를 향한 그리움을 접어두고 주체적인 삶을 위해 얼음광산으로 향하는 결단 역시 필요한 것이다. 아이노우즈는 인간이라는 종이기에, 그 인간의 본성이 만들어낸 인위성 때문에 생겨난 두 개의 운명을 야성과 산업이 공존하는 모텔이라는 공간에 집약하여 보여준다. 특히나 그 날 것의 인간 또는 브라질인의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서 헤럴드 역엔 비전문배우를 캐스팅하고, 기성 배우라 한들 기교를 최대한 내려놓게 만든다. 아이노우즈는 모텔에서 우리의 현실을 집약하고, 이러한 가운데 현란한 색채가 일렁이는 연출의 여정을 떠나며 그 운명을 거역하고자 하는 인간의 삶을 비춘다. 연출이랄지 또 다시 똑같은 운명으로 회귀하게 되는 구성은 흥미롭지만, 다만 모텔에서의 일상이 다소 평범한 통속극으로 전락한 점이 아쉽다. 운명이기에 통속적일 수밖에 없다면, 그 운명의 원죄를 더 짜릿하게 가시화할 수 있는 연출을 고안했다면 어땠을까 싶다. 

매거진의 이전글 토마스 살바도르, <산이 부른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