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뜻이 있는 곳에

조동사 will과 명사 will

by 기자A

조동사는 한자로 '도울 조'를 붙인 것처럼 동사에 어떤 뉘앙스를 첨가해 동사의 기능을 돕는다.

걸을 것이다(will), 걸을 수 있다(can), 걸어야만 한다(must), 걸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might)...

조동사가 없었다면 우리는 이 수많은 표현을 일일이 별개의 동사로 외워야했을테니

얼마나 경제적인 조력자인지 가슴을 쓸어내리게 된다.


이 중에서 미래를 나타내는 표지인 조동사 will은 명사뜻도 있다.

바로 '의지'다.

의지가 있어야 미래에 어떠한 일을 하게 되니까, 이 두 용법은 자연스럽게 생겨났음을 짐작할 수 있다.


if there's a will, there is. a way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다는 오래된 구절은

열심히 물을 길어올리듯 노력하는 사람들에게 한줌의 희망을 준다.

그런데 맘 한켠에 자리잡은 의심이 스멀스멀 피어오르는 때가 있다.

우리가 프로메테우스처럼 저녁이면 굴러떨어질 바위를 억지로 억지로 반복해 올리는 것이라면?

의지만으로 가능한 일이 있을까? 복권당첨이나 대통령 당선은 의지로만 될 수 없는게 당연하지 않은가?

이렇게 우리 손을 벗어난 인간사, 자연의 섭리를 톱아보다보면

인간의 자유의지will는 좁다란 서랍에 갇혀있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이 대목까지 쓰고 길을 잃었을때

내 무릎에 앉아있던 강아지가 내 왼팔 위로 두 앞발을 척 하니 올렸다.

어떤 계시처럼 느껴지는 순간, 의도치 않았겠지만 내게는 격려로 다가오는 어떤 몸짓

인간은 결국 그런 단서를 하나 하나, 해변에 흩어진 조개껍질처럼 주워서 또 앞으로 나가는 존재가 아닌가

가만히 있어도 봄은 오고

붙잡고 싶어도 아쉬운 봄이 갈 것이다.


세상에 변하지 않는것은

모든것은 변한다는 명제 뿐이라는 말이 새삼 와닿는다.

거대한 우주에서 개인의 의지는 모래알 한 알보다 보잘것 없을지 모르지만

그렇다고 당장 모두가 인생을 스스로 끝낼 일은 없을테고 그게 바람직하지도 않음을 우리는 안다.

무용한 생각의 바퀴에서 살짝 벗어나 이제 출근을 해야겠다.

그리고 이 생각 자체도 결국은 나를 만들어가는 벽돌 하나가 되겠지.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 요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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