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기자A Aug 24. 2021

불초상에는 ‘불’이 없다

사회언어학과 모국어 직관




그동안 그 명성을 익히  들어왔던 셀린 시아마 감독의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을 드디어 봤다.

영화의 배경이 되는 18세기 프랑스에서 여성은 자신의 혼인 여부 조차 스스로 선택할 수 없다.

극중 여성 화가인 마리안느는 자신이 여성이기 때문에 그릴 수 있도록 허락된 주제가 극히 제한돼 있다고 말한다.

여성 화가는 여성의 누드만 그릴 수 있을 뿐, 남성의 누드 혹은 남성적인 주제는 그리는 게 허락 되지 않기 때문에 몰래 그려야 한다고도 덧붙인다.

심지어 전시회에 자신의 작품을 출품할 때도 아버지의 이름으로 출품을 해야하는 그런 시대의 이야기다.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을 세 글자로 줄이면?


사회 언어학적으로 이 영화의 풀네임과 줄인 이름에 대해 얘기해 보고 싶다.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 한글로 아홉 글자 긴 제목이다.

세간에서는 흔히 '불초상'이라고 줄여서 말한다.

재밌는 점은 원문에 불이라는 말이 들어가지 않는다는 거다.

하지만 한국어 모국어 화자라면 어렵지 않게 원제와 줄인이름 사이의 관계를 유추할 수 있다



세상을 바꾸는 시간->’세바시’처럼 긴 한국어 제목을 줄이는 것은 흔히 각 단어의 첫 글자를 따와서 합치는 것이 주류를 이뤘다.



그러다가 ‘신데렐라+아줌마’를 다룬 극 ‘줌마렐라’로 대표되는 각 단어의 의미 핵심 부분을 따서 붙이는 줄임법이 나왔다.

한 심리언어학 교수는 신데렐라와 아줌마를 한 단어로 합쳐보라고 하면 90% 이상의 한국어 화자는 ‘줌마렐라’라는 답변을 쓸 것이라고 장담했다.

신데줌마, 아줌렐라 등의 소수 의견도 나오겠지만 직관적으로 모국어 화자에게 가장 자연스러운 조어법이 있다는 의견이다.



사회언어학은 이처럼 한 단어를 더 잘게 나누는 기준점이 모국어 화자에게는 동일하게 존재한다면서 욕설이 들어간 실험으로 이를 예증하기도 했다.

영어에서 ‘필라델피아’라는 단어 사이에 ‘fucking’이라는 욕설을 넣어보라고 하면 대부분의 영어 모국어 화자들은

필라 퍼킹 델피아 라고 말한다.

필 / 라델피아 도 아니고 필라델 / 피아도 아니고

필라 / 델피아 라고 단어를 반으로 가르는 어떤 기준점이 머릿속 모국어 직관에 들어 있다는 것이다.






줄인제목도 머리써서 만들어야 하는 시대


드라마 ‘이별에 대처하는 우리들의 자세’라는 작품 역시 긴 이름을 가졌다. 어떻게 줄여볼까. ‘이대우자’?, ‘이별자세’?

이 드라마 제작사는 줄인 이름을 아예 ‘이별대세’로 지어서 드라마 방영시부터 함께 홍보했다. 우리 드라마의 풀네임은 이렇게 길지만 네 글자로는 이렇게 불러달라는 주문이다.


이는 최근 미디어계의 유행이기도 하다. 긴 제목을 쓸 거면 줄인 버전의 제목을 제작사에서 제안하는 것. 그리고 이때 줄인 제목 역시 또 하나의 의미를 내포하는 경우가 많다. 애초에 줄인 버전의 제목을 염두에 두고 풀네임을 만든다는 얘기도 된다.






불초상으로 돌아가보자. 국내 포털 네이버 검색어를 기준으로 살펴 보면 국내 2020년 1월 16일 개봉한 이 영화의 줄인 제목은 최초에 두운을 따서 ‘타여초’라고도 표기 된 적이 있다. 배급사나 국내 마케터가 처음부터 ‘불초상’을 밀지는 않은 것 처럼 보인다. 그러나 어느순간 자생적으로 등장한 ‘불초상’이라는 줄임말이 입에 착 붙으면서 ‘타여초’를 자연스럽게 밀어냈다.


2020년 1월 당시 ‘타여초’로 이 영화를 지칭하는 네이버 지식인 질문은 두 건에 불과하다.






불은 우리의 뇌에서 시작됐다


이 영화를 본 한국어 모국어 화자들이 왜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을 ‘불초상’이라고 줄이게 됐을까.

영화 전체에 걸쳐서 반복되는 불의 이미지 때문이 아닐까 추측해본다.

타닥타닥 타오르는 모닥불의 이미지, 영화 극초반에 등장하는 그림의 이름이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이라고 소개되는데 그 그림 속의 불꽃, 마리안느가 어둑한 저택에 밤 늦게 도착해 모닥불과 양초에 의지해 몸을 말리고 허기를 채우는 모습, 어둑한 저택을 채우는 모닥불, 심지어 엘로이즈의 드레스에 붙는 불꽃까지


이 불의 이미지는 ‘타다’, ‘타오르다’ 라는 동사보다 강력하게 우리의 감각을 자극하고 뇌는 이것을 ‘불’이라는 명사로 언어화한다,

즉, 직관적으로 어떤 것을 명명할 때 명사가 동사에 우선한다는 전제를 세울 수 있을 것이다.


이 영화의 연관 검색어에는 다양한 제목 오기가 함께 올라있다. ‘불타는 여인의 초상’, ‘불타오르는 여인의 초상’ 등이 그렇다.

아마도 ‘불초상’이라는 줄임말 때문에 원문에 ‘불’이라는 단어가 있을 것이라고 예상한 관객이 많아서일것으로 사료된다.





다양한 사례를 댓글로 함께 나눠주시기 바랍니다. 향후 공부하면서 다뤄보고 싶은 주제 중 하나라서 미리 써놓습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낭만주의에는 낭만이 없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