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슬픈 일본 유학생활(의 시작)에 대하여

동일본 대지진 한방에 사람이 아주 겸손해진 이야기

by 퀴터

2010년, 고등학교 3학년 때 와세다대학에 합격하고 스스로의 멋짐에 한껏 취해있던 나는, 이제 내 인생은 탄탄대로이며 남들의 부러움을 살만한 성공적인 인생이 나를 기다리고 있다고 믿었다. 그때는 학벌 지상주의적 사고방식에 꽤나 사로잡혀있던 시기였다. 삶은 좋은 대학을 가느냐 아니냐로 완전히 달라지는 것이니, 와세다에 합격한 나는 인생의 과업을 완수한 것이었다. 내겐 이제 최고의 삶이 펼쳐질 일만 남아 있다. 나는 진심으로 그렇게 믿었다. 열아홉 살이 될 때까지 내 주변의 모든 사람들이 그렇게 말했고, 그 사실을 이해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수시로 강조했기 때문이다. 심지어 나는 대치동 키즈도 아니고 그냥 지방 출신인데도 그랬다.


그렇게 득의양양한 어린애였던 나는 이미 도쿄에 유학 중이던 언니와 함께 스기나미구에 방을 구했다. 아기자기한 동네의 작은 방 두 개짜리 맨션이었다. 당시 머릿속이 꽃밭이고 단순했던 나는, 삶의 의미를 어렵게 받아들이는 언니를 이해하지 못했다. 그때 언니는 사는 것이 힘들다고 했다. 나는 도쿄에서 대학생활을 보내며 이 도시의 주인공이 될 예정이었기 때문에 언니가 무슨 말을 하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정확히 뭐가 힘들어서 그렇게 눈물을 흘리는지 나는 알지 못했다.


그리고 2011년 3월, 낮에 언니와 집에서 작은 TV로 드라마 커피 프린스를 보고 있는데 대지진이 터졌다. 갑자기 창문이 쿵쿵거리며 무서운 소리가 났다. 창틀과 창유리가 부딪히며 내는 소리였다. 집안은 크게 흔들려서 제대로 서있기도 힘들 지경이었고 탁상 위의 컵이나 전신 거울은 하나둘씩 쓰러졌다. 언니와 나는 흔들리는 집에서 여권과 중요한 짐을 몇 가지 대충 배낭에 챙겨 밖으로 나갔다(그때 챙겼던 짐 중 기억나는 것으로는 물, 렌즈, 안경, 세면도구 등이 있다). 왠지 나가야 할 것 같아서 일단 밖으로 나가긴 했지만 어디로 가야 할지는 알 수 없었다. 핸드폰 전파도 먹통이라 인터넷으로 찾아볼 수도 없었다. 지진이 났을 때는 공터가 안전하다고 들은 바 있어, 우리는 막연히 가까운 공터를 찾아 걸었다.


계속 흔들리는 땅 위를 걸으며 나는 삶에 분노했다. 10대를 다 바쳐 열심히 공부해서 여기까지 왔더니 돌아오는 건 재난이라고? 나는 그때 정말로 그날 내가 죽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그 정도 진도라면 영화나 만화에서 본 것처럼 바닥이 갈라질 것만 같았다.


결국 언니와 나는 밖에서 한참 서성이다 두어 시간이 지나고 집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나는 몇 시간 전과는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다. 더 이상 나는 삶의 주인공이 아니었고 오히려 불행의 아이콘이라고 할 수 있었다. 열심히 공부해서 1 지망 학교에 합격해 일본 유학을 가더니 하필이면 바로 그 해에 초대형 자연재해를 만나고 후쿠시마 원자력발전소까지 터져 몇 년간 피폭 피해를 입게 생겼다니, 신세가 아주 처량하게 되었다. 내 고등학교 동기들이 내심 나를 보며 위안 삼을 것만 같았다.


뭐 사실은 아무도 그러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아무도 나에게 관심이 없었을지도, 내가 그 지진의 영향을 받았는지 궁금한 사람도 아무도 없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때 나는 모두가 나를 보고 자신과 비교하며 안도할 거라고 확신했다. 내가 다닌 고등학교는 학벌지상주의를 뼛속까지 심어주는 곳으로, 등급으로 나누어지는 성적 제도 안에서 우리는 기본적으로 남이 잘되면 스트레스를 받고 남의 인생이 안 풀리면 안심했다. 남이 한 문제 더 틀리면 내 등급이 올라갈 수도 있었다. 그런 분위기에서 3년을 보낸 탓에 나는 내 불행이 국내 TV에서 요란스럽게 나오는 것을 볼 때마다 수치심을 느꼈다.


우리나라 언론에서는 그 대지진을 내심 기쁘다는 듯이 요란스럽게 보도했고, 심지어 러시아 체르노빌 때의 충격적인 피폭 피해 사진 같은 것을 자료화면으로 내보내기까지 했다. 앵커들은 짐짓 심각한 얼굴로 ‘피폭’, ‘방사능’ 등의 단어를 수백 번씩 내뱉어가며 부정적인 이야기만 했는데 아마 최악의 상황을 상상하고 싶은 모양이었다. 뉴스에서 우려하는 내용에 따르면 이제 일본은 망했고, 앞으로 일본에선 수백 년간 기형아만 태어날 것이며 일본에서 생산되는 음식은 의심스럽고 전면 폐기되어야 할 것이었다. 그리고 물도 다 오염되어서 샤워도 외국산 생수로 해야 하는 수준이었다. 나는 잔뜩 상기된 앵커들의 모습을 보며 처음으로 인류에 대한 신뢰가 사라짐을 느꼈다.


나는 언니와 일본에서 구했던 방을 빼고 아예 귀국했다. 그리고 재난에 의한 입학연기를 신청한 뒤 1년을 아무것도 안 하며 보냈다. 주로 방에 누워 천장을 보며 우는 것이 나의 일과였다. 부모님은 갭 이어(Gap Year)라는 단어로 그 상황을 그럴듯하게 꾸며주고 싶어 했지만 잔인한 농담일 뿐이었다. 1년 후에는 입학을 할 수 있는가의 여부도 확실하지 않았다. 모든 게 세슘에 피폭돼 위험해서 대학을 아예 못 갈 가능성도 있어 보였다.


스스로가 대단한 주인공인 줄만 알던 나는 서서히 상황을 파악하고 자신이 특별한 존재도 뭣도 아님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그러니까 다른 명문대생들보다는 훨씬 일찍 자신의 작음을 깨달은 셈이다. 지진이 아니었다면 아마 나는 한동안 스스로가 꽤나 특별하고 우월한 존재라고 여기며 자신에게 취해 있을 수 있었을 것이다. 적어도 사회에 나가기 전까지는.


물론 자신의 평범함을 깨달았다고 해서 난데없는 불행에 대한 분노와 슬픔이 절로 사그라드는 것은 아니었다. 그래서 나는 인터넷에서 ‘고소당했습니다’, ‘고소장이 날아왔습니다’ 등의 극단적인 키워드로 글을 검색해 나보다 더 절망적인 사람들의 처지를 읽으며 힘을 냈다. 피소 연락을 받고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인터넷 지식인에 도움을 구하는 사람들의 글에는 급박함이 묻어나 있었고, 나는 적어도 저들처럼 법원 출석 걱정은 안 해도 된다는 점에서 상대적 안락함을 느낄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