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덟 번째 회사 이야기 - 유학원 -

자만심, 불안감에 기대감 한 꼬집

by 퀴터

그리고 이 글을 쓰는 현재 나는 일 년째 학원 강사로 일하고 있다. 일본으로 유학 가고 싶은 학생들에게 입시 일본어를 가르친다. 지금까지 해본 일 중 가장 마음 편하고 웃을 일이 많아 한동안은 계속할 생각이다. 고등학생들이란 의외로 냉소적이고 말이 잘 통하는 것이다. 그들은 자기들이 충분히 때 묻었다고 생각하는데 사실은 그렇지도 않다. 세상에 대해 다 안다는 듯 투덜대고 있어도, 아직 삶에 대한 무궁한 기대가 남아 있는 그들의 눈빛은 어른들의 그것과는 확연히 다르다. 어딘가 조금 자만스러운, 하지만 불안함과 기대감도 섞여 있는 눈빛. 비율은 개개인마다 다르지만 하여튼 그런 재료로 만들어진 눈을 하고 있다. 살 만큼 살아 본 어른들의 눈빛은 대개 회한과 포기, 자격지심 같은 것으로 이루어져 있다.


나는 10대 때 나를 인격체로 존중하지 않는 어른들이 싫었기 때문에 나 자신은 그런 어른이 되지 않을 생각이다. 학생에게 반말도 하지 않는다. 아이들은 인격을 무시당한 적이 많기 때문에 자신이 사람으로서 존중받고 있는지 아닌지 금세 알아본다. 어른들은 주의할지어다. 이렇게 말하니 내가 마치 훌륭한 어른이자 좋은 선생이라도 되는 것 같지만, 사실 나는 속으로 학생들을 질투하곤 한다. 일본 유학을 가기 위해 학원씩이나 다닐 정도면 부모가 돈이 많다는 뜻이다. 한남더힐이나 타워팰리스에 사는 학생도 많다. 10대에 이미 여기저기 외국에서 살다 온 아이들도 많다. 그 애들을 보고 있으면 부족함 없이 자랐다는 표현으로는 부족하다. 목에는 에어팟 맥스를 걸치고 다니며 수업 시간에는 최신형 아이패드에 필기한다. 그 나이에 차는 테슬라를 탄다고 한다. 나는 그 모습을 보면 돈에 쪼들리던 내 모습이 떠올라 울적해지곤 하는 것이다. 나도 일본 유학을 다녀오긴 했지만 살짝 무리해서 간 것에 가까웠다.


수많은 K-부모들과 마찬가지로, 우리 부모님은 학벌을 무척 중시했기 때문에 무리해서라도 나를 외국의 좋은 대학에 보내고 싶어 하셨다. 물론 나도 유학을 갈 수 있어서 감사했다. 하지만 일본에서의 생활은 쉽지 않았다. 60억짜리 아파트에 사는 애들과는 씀씀이가 너무 달라 어울리기 힘들었다. 동기들이 오모테산도에 2만 원짜리 팬케이크를 먹으러 가자고 할 때 부담이 되어 거절해야 했고, 다리가 아프면 택시를 타는 그들과 달리 나는 30분 이하 거리는 무조건 걸어가고 그 이상은 지하철을 탔다. 그들이 여름방학에 서핑 갈 때나 겨울방학에 스키장 갈 때 나는 낄 수 없었다. 뭐 별로 끼고 싶지도 않았지만.


비단 유학생 사회의 문제가 아니라, 돈 많은 집 애들은 ‘부자’ 테두리 바깥세상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모양이다. 과 동기인 한 일본인은 나에게 “무례하게 굴려는 건 아닌데, 너네 부모님이 선생님인데 너 일본 유학 어떻게 보낸 거야?”라고 물었다. 대학교 영어 회화 수업 때 영어로 한 질문이었다. 물론 그것은 내가 살면서 들은 말 중 제일 무례한 말이었다. 그놈은 뭐가 궁금했던 걸까. 운 좋게도 로또에 당첨돼서 여기에 올 수 있었어! 뭐 이런 대답을 기대한 건가? 나는 너무 당황해서 불쾌감조차 제대로 표현하지 못했다. 다음 수업 때 이번에는 그놈이 왜 일본에 왔느냐고 물었다. 나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한국 대학에도 많이 지원했는데, 다 떨어지고 여기 하나 붙어서 어쩔 수 없이 왔어.”라고 말해 주었다(거짓말이지만). 심지어 그놈은 대학 입시도 치르지 않았다. 싱가포르에 있는 대학 부속 사립 고등학교를 나와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대학에 입학했다고 한다.


이따위로 입시 없이 출신교 이름만으로 사립대학에 입학하는 것을 일본에서는 ‘에스컬레이터를 탄다’고 표현한다. 일본은 (자칭) 귀족 중심의 입시제도가 마련돼 있어, 초등학교부터 쭉 에스컬레이터를 타는 경우도 많다. 물론 학비는 엄청 비싸고 아무나 입학도 못한다. 학교 측에서 집안과 배경을 보기 때문이다. 옛날 일본 드라마 ‘꽃보다 남자’를 혹시 보셨는지. 거기에서 주인공 츠쿠시는 ‘서민’이라는 이유로 사립학교에서 무시를 당한다. 놀랍게도 거품 없이 현실 고증이 아주 잘 된 설정인 것이다.


내가 일하는 학원에서도 비슷한 일이 일어나고 있다. 학비 몇억만 확실히 가져가면 외국인 유학생에게 문을 활짝 열어주는 일본 의료계 대학이 여러 군데 있다. 심지어 일본어를 못해도 괜찮다! 자소서에는 지망 이유를 쓸 공간이 단 세 줄밖에 없어 부담도 없다. 위 학교들은 일단 형식적인 온라인 면접만 치르고 (자국어로 말하면 된다. 통역사가 옆에서 면접 대답을 통역한다) 합격부터 시켜준 후 천천히 일본어 능력시험을 준비하라고 응원한다. 아주 높은 수준을 요구하지는 않기 때문에 그야말로 누구든지 입학이 가능하다. 돈만 준비하면.


이런 일을 지켜보고 있자면 당연히 서글프다. 하지만 단점 없는 직장이 어디 있겠는가. 그래도 눈에 쌍심지를 켠 사람이 나를 노려보는 곳에서 일하는 것보다야 기대감을 간직한 순수한 눈망울들에게 공부를 가르치는 게 낫다. 가끔 그 눈망울이 너무 흠집 없이 깨끗해서 나에게 상처를 주더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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