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가 나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주셨음을 깨달은 날
로스쿨 휴학이 만료되던 날의 일이다. 겁쟁이인 내게 자퇴 수속이란 왠지 기분 나쁘고 무서운 일이어서, 나는 마지막의 마지막이 되도록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고 가만히만 있었다. 학교에서 ‘이대로는 곧 제적 처리’라며 여러 번 전화와 메일과 문자가 왔지만 나는 마치 죽은 사람처럼 아무 대응도 하지 않았다. 그들과 통화를 하기도 싫었고 뭔가 액션을 취해서 연락을 주고받게 되는 것도 싫었다. 그러다 휴학 기한의 마지막 날이 오자 나는 비로소 제적처리가 되었다. 나는 더 이상 휴학생이 아니었고 학교와 나는 서로를 끊어낸 것이었다. 일종의 잠수이별이랄까. 세상에 최악의 이별이 바로 잠수이별이라지만, 그곳에 나를 그리워한 사람 따위는 없으니 상관없었다. 행정실 직원들을 귀찮게 한 점은 조금 미안하긴 하지만.
제적 처리 전날, 오후 세시쯤 아빠가 전화를 하셨다. 나는 당연히 로스쿨 얘기인 줄 알았다. 그러나 내가 전화를 받자마자 아빠는 다급한 목소리로 ‘도라지배즙(아빠가 1년 전에 담가 발효시킨 즙) 뚜껑을 열어서 보관하라’는 말부터 하셨다. 왜 그러시느냐고 묻자 아빠는 망설이듯 아무것도 아니라고 했다. 뭔가를 숨기는 듯한 목소리였다. 아빠는 ‘여하튼 뚜껑을 살짝 열어서 보관하라’는 말만 반복하셨다.
“아빠 그 얘기하려고 전화하신 거예요?”
“응! 그럼 오늘 하루도 잘 보내라!”
“......”
그 순간 눈물이 쭉 나왔다. 그날이 아빠가 그렇게도 바라왔고 기뻐하셨던 내 로스쿨과의 연이 영영 끊기는 바로 그날이었는데, 아빠에게도 연락이 가서 아빠도 알고 계셨을 텐데, 아빠는 도라지배즙 보관에만 관심이 있었던 것이다. 아빠와의 통화 후에 닻처럼 무겁고 녹슬어 있던 내 마음은 민들레씨처럼 가벼워졌다. 내 마음의 무게 중 굉장히 큰 부분이 아빠에 대한 죄책감이었기에.
재미있는 것은 애초에 내가 그 도라지배즙을 먹어야 하는 이유가 로스쿨에서 생겼다는 점이다. 거기서의 극심한 스트레스로 인해 내게 천식이 생겼고, 우리 아빠는 누가 도라지와 배 등을 담가 1년 동안 발효한 것을 먹고 천식이 나았다는 소문을 듣고 똑같이 따라 제조한 것이었다... 알고 보니 아빠가 집에서 소분하여 보관하던 도라지배즙의 재고 하나가 그날 갑자기 터져서 유리병이 다 깨졌다고 한다. 그래서 아빠는 내가 갖고 있는 병도 깨질까 봐 서둘러 전화하신 것이었다. 이 사건이 영원히 내 안에서 중요한 에피소드로 기억될 것임을 나는 그날 느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