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출발
회사에 입사한 지 어느덧 4년이 넘어가는 날이 오고야 말았다. 학생 때는 두루뭉술하게 UX 디자이너가 될 거야!라고 마음먹었고, 그렇게 회사에 입사하고 나니 현업 디자이너의 역할과 한계에 대해 깨닫는 나날들이 곧바로 이어졌다. 생각보다 많이, 아주 많이 트렌드와는 머나먼, 회사 생활이 시작되었다. 새로운 디자인 툴이 나와도, 윈도 기반으로 PPT로 화면과 플로우를 설계했고, 상사가 바뀌면서 책 만들 때나 쓰던 인디자인으로 가이드라인 문서를 다시 처음부터 작성하는 상황이 벌어졌다. 당시 회사 밖에선 스케치가 서서히 도입되기 시작하던 때였다. 당연히 좌절할 수밖에 없었다. 회사 밖의 생태계는 빠르게 변화하고 있는데 나만 하염없이 대기업 인하우스 디자이너로서 도태되어가는 것만 같았다. 위기감에 무작정 동기와 함께 퇴근 후 새로 출시됐다던 프로토타이핑 툴을 배우러, 간단한 수준의 웹 코딩을 배우러 정신없이 다녔다.
자기 계발이라는 좋은 제도가 있었고, 번아웃 증후군이 도에 다다랐을 때 미련 없이 1년을 쉬었다. 6개월은 무너진 생활습관을 바로잡으며 그냥 무작정 쉬었다. 9 to 5, 10 to 6 근무에 길들여진 직장인의 생활에서, 낮에도 스벅에 갈 수 있고 코엑스에 놀러 갈 수도 있으며 무작정 전시를 보러 훌쩍 ddp로 놀러 갈 수 있는 유유자적한 생활로 바뀌어갔다. 회사에 가지 않으니 만성적으로 오던 두통, 묵직했던 뒷목의 통증이 사라졌고 웃음이 많고 멍 때리기를 좋아하던 원래의 나로 돌아갔다. 그냥 운동만 해도, 근처 공원에 산책을 가도, 그냥 인터넷 서핑만 해도 즐거웠다. 그렇게 반년을 보내고 다시 반년.... 종종 배우고 싶은 강의를 들으러 다니고 길게 여행도 다녀온 후, 회사로 복직했다. 솔직히 말하자면, 쉬는 동안 큰 노력을 하지 않았다. 휴직을 결정했을 땐, "도저히 디자이너로서 성장할 수 없는 이 회사, 내가 떠나고 만다!"라고 다짐했지만 1년 동안의 릴랙스 된 생활을 맛보면서 그 생각이 점점 흐려졌다. 동시에 이런 생각도 들었다. 그냥 좀 쉬면 안 되나? 쉬는 동안에도 치열하게 무언가를, 넥스트를 준비해야 하나?..... 그래서 진짜 그냥 쉬었다. 하고 싶은 거 하고, 배우고 싶은 거 좀 배우고, 놀기도 많이 놀았다. 그렇게 휴직 기간이 훌쩍 지났다.
기대도 하지 않았지만 역시 회사는 변해있지 않았다. 10년이면 강산이 변한다고 했지만, 1년은 변하기엔 좀 많이 짧은 시간이었다. 쉬었던 만큼, 강도 높지만 재미없는 일들이 모조리 내게 쏟아졌다. 어떤 선배가 그랬다. 쉬고 오니 얼굴이 너무 좋다고. 하지만 2주만 지나면 너도 우리랑 똑같이 영혼 없는 무표정이 될 거라고. 그녀의 예상은 적중했고, 2주가 되기도 전에 내 얼굴에서 표정이 빠르게 사라져 갔다.
그래서, 나는 결심했다. 만들기를 좋아해 디자이너가 되었으니, 평생 무언가를 만드는 것을 습관적으로 즐겨보겠다고. 그것이 손으로 만드는 것이던, 마우스나 태블릿을 이용한 것이든 간에. 아주 짧은 사용 시나리오일 수도 있고, 요즘 다시 배우기 시작한 프로토타이핑 툴을 이용한 마이크로 인터랙션일 수도 있고, 사이드 프로젝트를 통해 론칭해보고 싶은 모바일 앱일 수도 있을 것이다.
회사에 있는 동안 충족하지 못했던 만들기에 대한 갈증, 디자이너로서 도태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불안감. 이 두 가지를 타파하기 위해 퇴근 후 사이드 프로젝트를 만들어가는 과정을 기록하기로 결정했다. 일주일의 내가 어떤 것을 고민했고, 어떤 생각이 들었으며, 무엇을 만들었고, 만드는 동안 느낀 것이 무엇이었는지를 글과 그림으로 남기려고 한다. 일종의 성장 보고서인셈이다. 나와 비슷한 회사에 다니는, 같은 직무를 하고 있는, 수많은 디자이너들이 고민했을 일련의 과정을 내가 어떻게 해쳐나갈 수 있는지 그 방법을 찾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