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쿼카링 Sep 11. 2024

[서평]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

"어그로 아니고 정말로 존재하지 않습니다"


룰루밀러,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 곰출판


어머, 이 책은 꼭 사야 해!” 종이책을 자주 충동구매하는 편입니다. 덕분에 방 곳곳에는 읽다 만 책더미들이 바벨탑마냥 위태롭게 흔들리고 있었으나, 최근에 책장을 더 들여서 간신히 정리했습니다. 이 책도 베스트셀러에 올랐던 만큼 제목만 아는 정도였는데, 읽던 잡지에 한 면짜리 광고가 올라온 것을 보고는 왠지 모를 이끌림에 그 자리에서 주문해 버렸습니다(요즘 시대에 한 페이지 가득 책 광고라니, 매력적이지 않나요?).

1.
이야기는 저자가 '데이비드 스타 조던'이라는 저명한 어류학자에게 관심 가지며 시작됩니다. 어린 시절 저자는 과학자인 아버지로부터 인생은 무의미하다고 배웁니다. 아버지의 지극히 ‘T’적인 교육방식 때문에 저자는 목적 없는 삶에 홀로 던져진 느낌으로 혼란스러워 합니다. 이에 그녀는 인생을 지탱해 줄 무언가를 갈구하게 됩니다. 그 와중에 데이비드의 특별한 행적이 그녀의 눈에 들어옵니다. 두 번의 천재지변으로 일평생 수집한 물고기 표본이 전부 멸실되었음에도 절망 속에 주저앉기는커녕, 박차고 일어나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 불굴의 의지를 보여준 데이비드의 일화에 매료된 저자는 그의 삶을 추적하기 시작합니다. 그의 확신에 찬 태도, 인생을 개척하는 의지에서 데이비드는 혼돈이 가득한 인생 속에 어떤 정답을 찾아낸 사람이 아닐까 기대한 것이죠. 아래 사진 속 그의 얼굴을 좀 보세요. 지적으로 적당히 벗겨진 머리, 학구열이 가득해 보이는 눈빛, 굳은 의지를 보여주는 것만 같은 콧수염... 절로 신뢰가 가는 느낌입니다.


David Starr Jordan(1851~1931), 이미지 출처: Britannica

 

청년 시절의 데이비드는 자연의 경이를 사랑하고 신비로운 세계의 이면을 탐구하는 진지한 생물학도였습니다. 그의 끝 모르는 열정과 노력은 세상에 인정받아 초대 스탠퍼드 총장직까지 역임합니다. 어느 날 엄청난 지진이 발생하여 대학교를 타격했습니다. 헐레벌떡 자신의 연구실로 뛰어들어간 데이비드는 끔찍한 광경을 목도합니다. 그가 평생에 걸쳐 세계 각지에서 수집하고 손수 이름 붙여주었으며 애지중지 관리해 온 물고기 표본들이 온통 바닥에 엎질러져 데이비드는 모든 것을 잃어버립니다. 여러분이라면 어떨 것 같나요? 저라면 신을 원망하며 방구석에 틀어박혀 현실을 부정하고 싶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데이비드는 절망하지 않습니다. 아직 상하지 않은 물고기 표본을 한 마리씩 조심스레 집어 올렸고, 기억을 더듬어 물고기 비늘 위에 한 땀 한 땀 이름을 바느질하여 붙입니다. 다음 번에 이런 일이 벌어져도 이름을 잃어버리거나 이름표가 섞이지 않게 하려고요. 이로써 그는 굴하지 않고 투쟁하는 인간승리의 산증인이 됩니다(심지어 이런 지진으로 인하여 물고기 표본을 전부 잃는 경험을 그는 살면서 두 번씩이나 겪습니다).

그러나 데이비드는 완벽하고 초인적인 인간이 아니었습니다. 저자는 데이비드의 삶을 깊게 파볼수록 인간적 결함을 넘어서 그의 참혹한 진면모를 마주하게 됩니다. 동료 교수의 불륜을 고발하는 사서를 오히려 협박하여 학교를 떠나게 만들지를 않나, 그를 불신하여 총장직에서 쫓아내려는 학교 설립자인 스탠퍼드 부인의 석연치 않은 독살 사건에 연루되었다는 의심을 받습니다. 무엇보다도, 그는 미국 사회 지도층으로서 우생학의 열성적인 지지자가 되어 수많은 주에서 사회에 '부적합한' 이들을 강제 불임화하는 법안이 통과하도록 주도했습니다. 그 결과 다수의 거리의 부랑자, 장애인들이 강제적으로 불임화 수술을 받고, 평범함과 거리가 먼 인생을 살게 되었습니다.


2.

저자는 순수했던 과학도가 우생학의 대부가 된 원인을 젊은 시절의 데이비드에게서 발견합니다. 소위 '자연의 사다리'가 존재한다는 믿음, 즉 세상은 열등한 존재와 우등한 존재로 분류되며, 열등에서 우등한 존재를 향하여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는 방향성이 있다는 것. 이러한 개인적인 믿음에서 모든 것이 시작되었다고 저자는 결론 내립니다. 이 믿음을 실증하기 위해 데이비드는 수많은 물고기를 광적으로 수집했고, 어떠한 고난에도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그런 데이비드의 눈에 부적합한 이들은 자연의 사다리 법칙을 거스르는 돌연변이였습니다. 응당 생물이라 함은 보다 우월한 존재로 진화해 나가야 할진대, 열등한 이들이 자손을 남기는 것은 그에게 있어 참을 수 없는 자연에 대한 모독이었을 겁니다. 그렇게 데이비드는 괴물이 됩니다.


그런데 데이비드의 믿음은 자연에 우열이란 없고 수많은 개체 각자의 생존방식만이 존재한다는 (그도 진지하게 배웠을) 다윈의 가르침에 정면으로 반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쩌다가 그릇된 길로 빠졌을까요? 저자는 자연의 사다리 법칙이야말로 혼돈뿐인 세상에서 데이비드가 인생의 질서를 되찾고, 흔들림 없이 나아갈 수 있는 이정표 같은 존재였을 것이라 해석합니다. 저자는 이 믿음을 데이비드가 버리는 것은 도저히 불가능했을 것으로 봅니다. 굳건한 믿음을 버리는 순간 데이비드의 세계는 의미를 잃고, 저자가 어린 시절부터 느꼈던 것과 같은 혼돈 속에 자신을 내던지는 것과 마찬가지가 될 테니까요.

어린 시절 데이비드가 주동한 정책 탓에 끌려가 강제 불임시술을 당한 '애나'와의 인터뷰를 마치고 나오는 길에 저자는 깨달음에 이릅니다. 누군가 중요한 존재인지 아닌지는 관점의 차이만이 있을 따름, 살아있는 모든 것이 자연 속에서 중요한 존재가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죠(이는 다양성을 중시하는 다윈의 자연선택과도 일맥상통하는 내용으로 보입니다). 우생학자에게 애나는 쓸모없는 결함 덩어리이며 자손생산을 중단시켜야 할 인류를 위협하는 존재에 불과하였지만, 사실 애나는 그녀가 사는 아파트 주민들에게는 없어서는 안 될 소중한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멀리 돌아갈 필요 없이, 우리 모두 곁에 있는 누군가에게 소중한 사람이 됨으로써 의미를 찾을 수 있습니다. 이제 저자는 인생의 이정표를 찾기 위해 고군분투하지 않아도 됩니다. 왜냐하면 더 이상 우리는 세계 속에 무의미한 존재가 아니기 때문이죠!


3.

깨달음을 얻은 이후 저자는 생물을 분류하는 분기학자들과 만납니다. 그리고 생물학적으로 ‘어류(물고기)’란 범주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직관적으로 받아들이기 어려운 과학계의 정설에 직면합니다(더불어 어류를 분류하는 데 일평생 헌신한 데이비드에게 소소한 통쾌함을 느낍니다). 무슨 의미냐 하면, 물속에 살고 비늘을 가졌다는 이유만으로 어류라 분류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물고기라 부르는 다수의 개체는 진화적 특징상 오히려 포유류에 훨씬 가까습니다. 만약 우리가 어류라는 범주를 고집한다면, 결과적으로 새와 소, 인간까지 어류라고 불러야 한다는 역설에 빠지게 됩니다.


결국 저자는 직관에 반하겠지만 물고기라는 개념을 내려놓기를 권합니다. 이 메시지는 비단 물고기에 국한되는 것만이 아니라, 세계를 바라보는 관점의 확장을 요구합니다. 이로써 우리가 가진 제한된 인식의 벽은 허물어지고 지평은 확장되며, 나아가 더 경이롭고 다채로운 세계를 접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저자는 양성애자로, 동성의 반려자를 맞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리고 더 없는 행복감과 충만감을 얻습니다. 이성애라는 통념의 물고기를 버린 결과죠. 한때 저자를 매혹했으나 실망스럽게 만들었고 나아가 경멸받은 데이비드도 자연의 사다리 법칙이란 믿음의 물고기를 버리지 못했습니다. 그 결과 우생학의 신봉자로 후세에 오명을 남겼을뿐더러, 애나와 같은 이들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남기고 말았습니다.

 

한편 저자는 과학자들에 의해 동물의 행동이 얼마나 폄하되고 인간과의 유사성이 외면되는지 짧게나마 언급합니다. 예를 들어 침팬지의 ‘키스’는 ‘입과 입 접촉’, 영장류의 ‘친구’를 ‘특히 좋아하는 파트너’로 칭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를 두고 영장류학자 프란스 드 발은 “언어적 거세”라며 반발했다고 합니다. 동물은 우리와 완전히 다른 존재이고, 지능적인 면에서 언제나 인간보다 하등하다는 믿음 또한 인류가 앞으로 내려놓아야 할 물고기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어쩌면 우리는 무의식적으로 ‘제2의 데이비드’가 되어 소중한 존재들을 간과하고, ‘제2의 애나’ 같은 파국을 조장하고 있는지도 모르죠.


물론 모두가 물고기를 버릴 수는 없을 겁니다. 저자의 아버지는, 


“아이고, 나는 그게 뭐든, 아직 내가 해방되지 않은 것으로부터 해방되기에는 너무 늙었어.”


라고 불평하며 물고기를 포기하길 거부합니다. 하지만 설령 그렇다 할지라도, 질서가 지배하는 정돈된 세계를 갈망하는 우리로 하여금 제한된 세계를 표상하는 ‘물고기’라는 단절된 벽을 인식하는 것만으로도, 더 넓은 세계로 항해할 수 있는 가능성의 영역에 한 발 내딛는 것이 아닐까요? 결론적으로 저자가 말하고 싶은 바는 다음과 같다고 봅니다.


“자연계의 모두가 소중한 존재입니다. 이를 깨닫기 위해서 자신도 모르는 사이 마음속 가지고 있을 ‘물고기’가 무엇인지 고민해 보아요.”



4.

이 책은 독자가 어떤 내용을 인상 깊게 읽었는지에 따라, 놀라운 깨달음의 이야기가 될 수도, 한 인물의 전기가 될 수도, 신선한 과학적 사실로의 안내가 될 수도 있습니다. 저에게는 타고난 스토리텔러인 저자의 이야기를 따라가는 즐거움을 선사했을 뿐만 아니라, 분기학이란 생소한 학문을 접하는 기회도 되었습니다. 더군다나 저자가 책의 말미에 자주 인용한 '캐럴 계숙 윤'의 <<Naming Nature(한국어 제목: 자연에 이름 붙이기)>> 장바구니에 담아두게도 되었고요. 곧 제 방 책장에 한 권이 더 얹힐 것 같습니다(실은 글을 수정하고 있는 지금 이미 사놓고 읽을 각을 재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물고기'라는 개념을 내려놓는 데 동의하시나요? 

우리가 지금도 가지고 있고, 누군가에게 상처줄 수도 있는 다른 종류의 '물고기'는 무엇이 있을까요?

살면서 ‘물고기’를 버린 경험이 있으신가요?

 

*이 글은 필자가 인스타그램에 올렸던 글을 일부 수정한 것입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