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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인용구 Apr 01. 2024

나만 없어 고양이랑 교양이

살면서 처음 가 본 피아노 연주회 후기

정말 좋은 자리에서 공연을 볼 수 있었습니다. 소정 고마워!!

    "임현정의 세계 최초 라흐마니노프 콘체르토 전곡 독주 편곡 독주회"에 다녀왔다. 카이스트 학생 대상으로 좋은 좌석을 무료 제공한다는 소식을 동아리 후배에게 전달 듣고 신청했는데, 무려 30만 원짜리(!!) 좋은 자리에서 연주를 감상하는 값진 경험을 했다.


잠깐잠깐, 잠시 피아니스트 임현정에 대한 소개가 있겠습니다.

음악계에 혜성같이 등장한 천재 피아니스트 임현정은 역사상 최연소로 베토벤 소나타 전곡 녹음을 진행하였고, 전설적인 음반사 EMI에서 전 세계를 대상으로 한 앨범이 발매되었다. 이 음반은 한국인 최초는 물론, 역사상 최초로 데뷔앨범이 빌보드 클래식 종합 차트 1위를 달성하며 클래식계의 전무후무한 기록을 세웠다.

3살에 음악을 배우기 시작한 후 그녀는 12세에 자의로 프랑스 유학길에 올라 콩피에뉴 음악원을 5개월 만에 수석 조기졸업 하였다. 그 후, 루앙 국립 음악원에 진학하여 만 16살에 조기 졸업을 하였고, 그다음 해 드뷔시와 라벨이 다녔던 세계에서 가장 역사가 깊은 파리 최고 국립음악원에 최연소로 입학, 또한 3년 만에 최연소 조기 졸업하였다. (후략)

- 팜플렛의 소개글 중

    ... 죄송스럽게도 나는 임현정이라는 분에 대해 전혀 알지 못한 상태로 공연장을 찾았다. 더 고백하면 라흐마니노프라는 음악가에 대해서도 이번에 처음 알았다. 검색해 보니, 낭만주의 음악의 사실상 마지막 세대의 작곡가이자 피아니스트로, "전 세계의 피아니스트들이 뽑은 레코딩 시대의 가장 위대한 피아니스트"라고도 한다. 사실... 낭만주의 음악이 무엇을 말하는지도 나는 모른다... 나는 그저 30만 원 가치의 공연을 무료로 볼 수 있다는 아주 속물적인 이유로 분에 넘치는 자리에 앉아 있었던 것이다.


그런 내가 감히 연주가 어땠느니, 편곡은 어땠느니. 이런 감상을 이야기할 자격이 있을까?


    무슨 자격지심이야, 당연히 되지. 연주회는 대단했다. 극악의 난이도를 자랑하는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노 협주곡을 무려 "독주 편곡"으로, 그러니까 원곡에서 오케스트라가 담당하는 부분까지 오직 피아노 한대로 연주하는 것이었으니. 피아니스트의 손이 건반 위를 이리저리 날아다니며 엄청난 에너지를 전달하는데, 정말 압도적이라는 말로밖에 표현할 수 없었다. (한 친구의 말을 빌리면, 음표로 맞는 기분이었다.) 아니, 타자로 따지면 한 1500타는 치시는 것 같은데요? 카메라에 건반 눌리는 게 안 잡혀요... 그렇다고 소리가 뭉개지는 것도 아니고, 주제가 되는 음과 반주가 되는 음의 구분도 확실하고, 완급 조절도 훌륭했다-고 피아노 좀 쳐본 친구가 말했다. (잘은 모르지만 나도 그렇게 생각했다!) 그런 미친 테크닉의 연주가 인터미션 포함 3시간, 순수 연주 시간만 145분 동안 진행되었다니, 다시 생각해도 말이 안 된다. 세계 최초 인정이다. 기네스북 등재 시켜드려야 한다.


    다만 내가 이토록 "대단한 연주자가 대단한 음악가의 곡을 대단한 체력과 집중력으로 대단히 훌륭하게 연주했다"라고 밖에 말할 수 없는 이유는 단 하나다. 나는 이 공연에서 구체적으로 어떤 부분이 좋았고 어떤 부분은 아쉬웠는지 말할 정도로 클래식에 대해, 작곡가 라흐마니노프에 대해, 피아니스트 임현정에 대해 알지 못한다. 오케스트라가 함께한 원곡도 모르고, 임현정의 다른 연주나 다른 피아니스트의 라흐마니노프 곡 해석을 본 적도 없으므로 비교할 만한 대조군조차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막연하게 "대단했다"는 건 확실하게 느꼈다. 그렇다면 만약 내가 이 문화를 조금 더 잘 알았다면, 조금 더 교양을 갖췄다면 얼마나 더 더 좋았을까? 너무 분한 것이다, 내 알량한 어휘력이. 이렇게밖에 좋았음을 표현하지 못하는 것이.


    내가 할 줄 모르는 언어로 된 영화를 보는 느낌. 배우는 혼신의 힘을 다해 연기를 하고, 관객들은 눈물을 흘린다. 나는 그 자리에 어울리지 않는 사람처럼 제3자가 되어 그들이 공유하는 것을 가늠할 뿐이다. 솔직히 말해서 145분의 러닝타임 내내 집중하지도 못했다. 건반의 신이 내려온 것처럼 (또는 다른 친구의 말을 빌리면, 악령에 씌인 것처럼) 열정적으로 연주를 이어나가는 피아니스트를 넋 놓고 바라보다가 나는 어떤 상념에 빠졌다. 시험 직전에야 집중해서 듣는 강의처럼, 내가 해석하고 처리할 수 없는 수많은 정보들이 나를 지나쳐 나갔다. 아는 만큼 들린다 -는 말을 여실히 실감하는 하루였다.


    아는 만큼 들린다. 만약 내가 아무런 감동도 받지 못하고 공연장을 나왔다면, 그냥 "나는 클래식이랑 안 맞나 보다~" 하면 되는 일이다. 그런데 슬픈 건 딱 아는 만큼은 들렸다는 것. 사실 표를 받고 한 시간 남짓한 시간 동안 공연장 주변 공원을 거닐면서 벼락치기 공부를 했다. 라흐마니노프의 생애와 음악적 특징에 대해서, 각각의 협주곡은 몇 개의 악장으로 이루어져 있고 어떤 감정을 다루고 있는지. 그중에서도 가장 유명하다는 피아노 협주곡 2번은 미리 예습으로 들어보기도 했다. (심지어 이미 어디서 들어본 적이 있음.) 그래서 독주회에서도 2번의 1악장을 들을 때만큼은 '아, 원곡에서는 현으로 표현하는 걸 피아노만으로 이렇게 표현하는구나, ' '아 이 부분 알아' 하는 환희?를 느꼈단 말이다. 특히 마지막 "파가니니를 주제로 한 광시곡"을 들을 때는 파가니니의 어떤 작품의 멜로디인지는 모르지만 분명 아는 멜로디에 들어가는 여러 변주를 느끼며 정말 "재밌게" 즐기는 순간도 있었다. 그 러 니. 내가 넋 놓고 음표 마사지를 받는 시간이 너무 아쉬웠던 거지.


    아니, 진짜 근데 너무 대단한 거 같음. 어떻게 악보도 없이 145분 동안 저렇게 밀도 있는 음악을 연주할 수 있지? 2시간짜리 1인극 각본을 외워라 해도 어려울 것 같은데, 저렇게 많은 음을 어떻게 기억해서 박자 하나 음 하나 놓치지 않고 선명하게 연주할 수 있냐구요. (사실 틀렸어도 내가 눈치를 못 챘음.) 머슬 메모리 뭐 그런 건가.


    아무튼. 내가 공연장을 나오면서 느꼈던 여러 감정 중에 어떤 "반성"이 섞여있었던 것은, 이런 이유였다. 세상에는 내가 형언조차 할 수 없는 어떤 아름다움이 있다. 심지어 많은 사람들이 큰 비용을 감수하면서까지 그것을 향유한다. 그것에 대한 동경과, 그러지 못하는 자신에 대한 반성. 열등감이나 자격지심과는 다르다. '힝, 나만 소외당한 기분이야'가 아니라, '나는 왜 이런 것들을 진작 탐미하지 않았지' 같은 느낌의 아쉬움. 조금만 관심을 기울여도 커다란 감동으로 보답하는 새로운 세계가 있다. 나는 왜 그런 것들에 선을 긋고 살았나.


    비단 클래식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과학을 공부하면서도 나는 그런 아름다움을 많이 발견했었다. 세상은 눈에 보이지 않는 원자와 분자로 이루어져 있음을, 그들은 서로 어떤 힘을 주고받고 어떻게 상호작용하는지 배움으로 설명되는 수많은 현상들. 그 공부의 즐거움을 나는 언제, 어쩌다가 멈췄더라. 나는 언제 물리학도의 자아를 버렸더라. 


    물론 예술은 어렵다. 솔직히 글은 그래도 좀 관심과 애정을 많이 쏟았으니까, 작가의 의도나 표현의 아름다움 이런 것을 조금은 이해하고 나도 사용할 수 있게 된 것 같은데. 음악은 여전히 잘 해석이 되지 않는다. 가사가 없는데도 곡의 의도를 해석할 수 있다는 것이 너무 신기합니다. 오늘 같이 연주회를 들은 친구는, 피아노 협주곡 2번의 1악장을 전에 들었을 때 "죽음"을 말하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이번에 2악장을 들어보니 그렇게 빠져나온 영혼이 이리저리 돌아다니다가 다시 원래의 몸으로 돌아오더라, 1악장에서 몸을 빠져나올 때의 테마가 다시 들리기에 "부활"이라는 주제를 말하고 있구나, 이렇게 구체적인 언어로 곡의 감상을 말했다. 나는 심지어 그 반복되는 테마가 무엇인지 알 것 같으면서도 죽음과 부활에 대한 이야기로 이것을 해석할 수 있는지 도통 모르겠는 것이다. 그림도 마찬가지, 무용 같은 것도. 비언어적이면서 심미적인 예술에서 "대단하다/좋다" 말고 그것을 형언할 말을 찾고 싶다. 하,, 좀 더 교양 있고 싶다 시팔~.

     그러려면 공부를 해야겠지. 공부를 조금만 하면 언제나 새로운 지식과 감동을 얻을 수 있는데, 솔직히 말해서 나는 너무 게을렀던 것 같다. (그렇다고 공부를 안 하고 사냐, 하면 그런 건 아닌데...) 가만히 생각해 보면 교양 쌓기는 어려운 게 아니다. 많이 보고, 여실히 느끼고. 가끔 해설과 나의 해석과 비교해 가며 그렇게 그 분야의 언어를 익히는 것 아닌가. 그 과정이 꼭 지겹고 재미없을 필요는 없잖아. 오늘만 해도 즐거웠잖아. 조금은 배움도 있었던 것 같고. 어디 가서 이제 나도 라흐마니노프 아는 척할 수 있음. 연주회는 어땠어요? 누가 물어보면 친구 말 빌려서 대답도 할 수 있음. 이렇게 좋은 경험이 쌓여서 고양이처럼 작고 귀여운 교양이, 나에게도 생겼으면 한다.


    솔직히 수업료가 매번 30만원이라면 좀 곤란하긴 하겠지만, 이렇게 좋은 기회가 있다면 앞으로도 마다하지 말자. 유튜브로 조성진의 라흐 협주곡 2번이랑 임윤찬의 협주곡 3번도 들어봐야지. 문화 생활을 더 많이 할 수 있으면 좋겠네~ 이런 생각을 하게 된 주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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