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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인용구 Jul 03. 2024

착하게 살자

우리 서로의 양심이 되자


1. 우리는 왜 착하게 살아야 하는가


    "경찰과 도둑"이라는 놀이가 있었다. 결국은 술래잡기인데, 괜히 이름을 그렇게 지어서 이유 모를 선악구도가 형성되곤 했다. 자기는 도둑을 하기 싫다며 우는 친구도 더러 있었고, 도둑의 승리 조건은 '끝날 때까지 잡히지 않는 것'이었으니 모든 게임은 경찰의 승리로 끝날 수밖에 없는(!!) 모순적인 구조의 놀이였다. (도둑이 잡힐 때까지 게임은 끝나지 않아…)


    권선징악. 어렸을 때 우리에게는 선과 악의 구분이 대단히 중요했던 것 같다.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내가 착한 사람'인 것이 중요했다. 영화를 보면 '얘는 착한 놈, 쟤는 나쁜 놈' 따위를 먼저 설정한 후에야 영화에 몰입할 수 있었다. 당연히 주인공은 '착한 놈'이어야 했고, 결말은 해피 엔딩이어야 했다. 조금 더 머리가 크고, 더 많은 영화를 본 후에야 그 프레임을 벗어날 수 있었다. 반동인물이 꼭 악당은 아니었고, 주인공은 자주 '마냥' 착한 놈이 아니었다. 동화 "잭과 콩나무"를 다시 읽는데, 이런 멍청하고 도둑질을 일삼는 살인자에게 감정이입을 하며 거인의 죽음에 통쾌해하던 어린 나를 왜 우리 부모님이 가만히 두셨을까 싶었다.


    어렸을 때의 나는 단지 '착해야 한다'는 것만 알았지, 선은 무엇이며 정의는 무엇인지 잘 알지 못했다. 자라면서 그 고민을 수없이 했다. 결국 그것은 삶의 방향성과 직결되는 질문이었기 때문이다.

Q. 어떻게 살아야지?
A. 착하게 살아야 돼!
Q. 그럼 착한 건 뭐지?

그러나 선악을 구분하려 하면 할수록 그 경계는 점점 모호해졌다. 동시에, 제법 많은 사람들에게 선악은 이미 최우선의 고려사항이 아님을 알게 되었다.


- 인간의 자유의지는 허상이란다. 결국 자연의 순리대로 너는 행동하는 것. 자연에는 선과 악이 없으니 괘념치 말거라.
- 요즘 세상에 착한 건 멍청한 거지. 손해 보고 살지 마셈. 인간은 어차피 다 이기적임. 쓸데없는 고민할 시간에 네 밥그릇이나 잘 챙기지 그래.
- 애초에 “착해야 한다” 자체가 학습된 거고, 착한 아이 콤플렉스에 불과한 건데. 왜 착하려고 그래? 그거 어차피 다 위선임


    이런 말들. 착하게 살아야 한다는 전제 자체가 흔들리는 순간들이 있었다. 특히 '인간은 이해득실에 따라 행동한다.'라는 패러다임은 그럴듯한 설득력도 갖추고 있어서, 이성적으로는 그들의 말을 이해하고, 심지어 동조할 때도 있었다. 그러나 그것을 인정하면 안 될 것 같았다.


    유쾌하지 않았다. 특히, 자기만족이라는 말, 위선이라는 말이 가슴을 후볐다. 이 시니컬한 녀석들에게 나의 정의를 관철시키리라. 참된 행복은 선을 행함에 있다는 것을 증명하리라. 사랑과 정의의 이름으로… 우당탕탕. 치열한 언쟁을 거듭했지만 한 번도 의견이 수렴한 적이 없었다. 결국은 "현실을 모르고 낭만적인 소리나 하고 있네" 하고 고개를 저으며 돌아서는 사람들을 보며, "당신들도 내가 옳다는 걸 알면서 현실과 타협한 거 아니냐"라고 자위하곤 했다..


    그러나 그들의 말은 일부 옳았다. 아니, 그 이전에 '내가 옳다'는 것이 틀렸었다. 잠깐 자가진단을 해봤다. 나는 도대체 얼마나 착하고 정의롭기에, 뭐가 잘났다고 정의의 수호자 행세를 했을까. 애초에 나는 선이 아님을 알면서도, 부정임을 알면서도 별 가책 없이 행했던 적이 많았다. 자기만족, 위선이라는 그들의 말이 아픈 것은 그것이 맞는 말이었기 때문이다.



2. 저는 위선자입니다



    착하게 살아야 하는 이유도 모르면서 착하게 살자고 하고 다녔다. 그런데 정작 나는 정의롭고 착한 사람도 아니었다. 나는 위선자였다. 좀 더 솔직해지기로 했다.

 

    여기서 잠깐, 정의(justice)의 정의(definition):

 진리에 맞는 올바른 도리.


    진리.. 진리를 탐구하는 것은 자연대 버리고 공대 들어갈 적에 그만두었다. 나의 더 원초적인 동기, 진심은 옛날 글에서 찾을 수 있었다.


하지만 내가 좇았던 것은 진실이 아니었다. 내가 오히려 바랐던 것은 믿음이었다. 진실을 보고 싶다고 이야기하지만, 사실은 우리가 믿는 것이 진실이라고 확인받고 싶었을 뿐이다. 내가 실제로 옳은지는 중요하지 않지만, 내가 옳다고 믿는 것을 사람들에게 설득할 수 있기를, 그럼으로써 내가 옳다고 믿는 대로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랐다. (중략) 내가 믿는 이상은 곧고 아름답다. 그것이 진실이기를 바라고 믿는 나는 그들에 의하면 위선을 부릴 수밖에 없다.     - 2017.01.17.


    애초에 나는 정의를 좇지 않았다. 나는 보편적 정의를 수호하는 게 아니라, 개인의 정의를 변호하는 것뿐이었다. 나와 그들, 우리는 각자의 정의를 변호하고 있었다. 관계라는 키워드를 끌어들인 후에 그것은 더 분명해졌다. 나는 내가 좋아하는 착한 녀석들의 삶의 방식이 부정당하는 것이 싫었던 것이다.


    예컨대, 주변에 아무도 없다면 나는 서슴지 않고 무단횡단을 한다. 법규는 원칙이라기보단 도구, 그러니까 무언가가 잘못되었을 때 논쟁의 여지를 없애기 위한 약속이라고 생각한다. 나의 양심은 내가 정립한 원칙이지만 법규가 그것과 동일선에 있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이르자면 나는 사회적 정의인 법에 대해 오히려 제법 소홀한 인식을 갖고 있는 사람이다. 그러나 만약 내가 아끼는 사람이 엄격한 준법시민이라면, 나는 잠자코 그의 곁에서 텅 빈 도로를 보며 파란 불을 기다릴 것이다. 적어도 그 사람과 함께 있는 동안만큼은 법을 잘 지키는 사람이 되고자 노력하는 것이다. 법에 가치를 둬서가 아니라, 그 사람과 함께하고 싶어서.


    문제가 단순해졌다.

    나는 착한 사람이 되고 싶은 게 아니었다.

    나는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과 닮고 싶었을 뿐이다.


3. 나는 왜 착하게 살고자 하는가



    말도 안 되게 착한 친구가 있다. 절대 욕도 하지 않고 필요로 할 때에 한 번도 기대를 저버린 적이 없는, (2D) 아이들을 좋아하는 아이 같은 녀석이다. 특히 본받을 점은 그 친구는 '고민 없이' 선을 행한다는 점이다. 몇 년째 기부를 하고, 헌혈이 가능한 날짜가 되면 쿨타임마다 헌혈을 한다. 왜 하냐고 물어보면, 할 수 있으니까. 하고 싶으니까. 제 딴에서는 자기가 즐거운 일을 한다고 하는 것인데, 그것이 언제나 주변 사람들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준다. 그냥, 말도 안 되게 착한 녀석이다.


    작년의 일이다. 동아리 활동으로 축제에서 스낵랩을 팔았다. 2500원 합리적인 가격에 푸짐하고 맛난 은막 스낵랩. 이윤은 많이 남기지 못했지만 파는 음식에 자부심을 가지고 좋은 사람들과 즐겁게 으쌰으쌰한 좋은 추억이 되었다. 그날의 여러 일화 중 유독 기억에 남는 일이 있다. 오후 5시가 조금 넘어서였을 것이다. 아직 마감까지는 시간이 조금 남았는데, 거스름돈으로 쓸 잔돈이 부족해지는 일이 있었다. 은행도 문을 닫은 시간이라 어찌할까 고민을 하다가, 내가 무릎을 치며 의견을 냈다. "아, 우리 학교 코인노래방 있잖아. 거기 동전교환기 쓰자." 나름 기발하다고 생각하던 차에, 그 말도 안 되게 착한 녀석이 웃으며 "미쳤나 봐ㅋㅋ" 이러는 것이다.


    농담이라도 하는 줄 알았나. 괜히 웃으며 "엥, 안 되냐 ㅋㅋ" 하고 재차 확인했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당연히 안되지"였다. 흠. 왜일까나. 그러면 안 되는 이유가 뭐지. 그런데 놀랍게도 그 순간에는 그런 고민이 전혀 들지 않았다. 어딘가 데인 것처럼, 순간 막 부끄러움 비슷한 감정이 확 올라오면서 무엇이 잘못인지 따질 겨를도 없이 그냥, "당연히 안 되는" 것처럼 느껴졌다.


    신기했다. 나름 옳고 그름의 잣대는 세웠다고, 뚜렷하게 소신 있게 사는 사람이었다고 생각했는데. 말도 안 되게 착한 녀석이 안된다고 하면 그건 나쁜 일이겠지,라고 생각을 순간 했다. 그리고 그게, 나쁘지 않았다. 잘못이 아닌 일이라도 네가 마음에 안 든다면 무슨 소용이지 싶었다. 네가 착하다고 믿는 것을 나도 착하다고 믿기로 했다.


    나와 그 친구는 매우 다른 사람이다. 내가 아무리 노력한들 그 친구처럼 말도 안 되게 착한 녀석이 될 리가 만무하고, 사실 그럴 필요도 없다. 내 눈에는 한없이 착한 녀석이지만 나도 얘가 "선 그 자체", ‘그저 빛’ 이런 건 아니라는 것도 잘 알고. 애초에 이 녀석 하는 짓 보면 그렇게 합리적인 녀석도 아니다. 그래도 이 친구를 닮고 싶었다. 그래서 그냥, 이 친구를 좋아하기로 했다. 좋아하면 닮는다니까. 약간 종교 같은 것이다. What would Jesus do. WWJD를 스스로 되새기며 그분의 뜻을 섬기는 종교인들의 마음처럼, 나도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따르기로 했다.


    걱정하지 마라. 나의 정의를 오롯이 남에게 맡기겠다는 말이 아니다. 한 친구를 예로 들었지만, 내 주변에는 착한 사람들이 많다. 다시 말해, 내가 착하게 살고 싶은 이유가 되어주는 사람들이 많다. 올바름에 대한 고민을 멈추지 않을 것이다. 나의 가치관을 더 분명히 하고, 내가 옳다고 믿는 대로 살기 위해 앞으로 더 노력할 것이다.


    글을 요약하자면 이렇다. 우리가 착하게 살아야 하는 이유는 아직 모르겠지만, 내가 착하게 살고자 하는 이유를 찾았다고. 그로 인해 더 이상 스스로를 위선자로 느끼지 않으면서 선을 위하고, 착하게 사는 것에서 진정한 자기만족을 얻는 사람이 될 수 있을 것 같다는 것. 더 이상 선민의식에 빠져 자위하는 일은 없겠구나 하는 안도감. 나의 신념에 가치를 두는 것보다, 가치는 나의 사람에 두는 것이 좀 더 행복하다는 생각.


    뭐 그런 이유로, 착하게 살자.



    6년 전, 페이스북에 썼던 글이다. (그러니까 은막 스낵랩를 판 것은 2017년의 일이다.) 정돈된 글은 아니었기 때문에 (아니, 옛날의 나는 왜 이렇게 따옴표를 많이 썼을까?!) 맞춤법을 퇴고하면서 살짝 표현도 다듬었다. 그래도 이따금 생각날 때마다 찾게 되는 글. 당시의 경험 덕분에 나는 서로의 다른 정의를 존중하면서, 동시에 나의 정의를 위해 더 확신을 갖고 싸울 수 있는 사람이 된 것 같다. 세상사의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것은 나의 권한이 아니지만, 나의 좋고 싫음의 기준, 호불호는 오로지 나의 것이니까.


    뭔가, 그 후로도 많은 사람들과 서로 정을 나누며 서로를 닮아가기도 하고, 서로의 정의를 부딪히기도 하면서 내가 생각하는 올바름은 많은 변화를 거쳤다. 언젠가는 치를 떨며 싫어하던 누군가의 행동을 이해할 수 있게 되기도 하고, 전혀 의식하지 않았던 부분에 대해 잘못됨을 느끼기도 한다. 그렇게 정형되어 가는 나의 윤리에 나는 어느 정도 자부심을 느낀다. 당신들이 나의 자부심이기에. 우리 서로의 양심이 되자. 서로의 도덕이 되자. 앞으로도 그렇게 착하며, 애착하며 살자.


- 커버 이미지는 내 최애 닥터 12대 카팔닥의 멋진 연설 장면.

I do what I do because it's right.
Because it's decent.
And above all, it's ki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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