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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인용구 Jun 12. 2022

과학기술자는  현실주의자인가? 이상주의자인가?

플라톤의 선분의 비유에서 바라본 과학

들어가기 앞서.

먼저 아래 이어지는 글이 컴퓨터 비전과는 큰 관련이 없음을 밝힌다. 아래는 KAIST 학부 재학 시절 1학년에 수강한 HSS127 윤리학 강의에서 중간고사 대체 과제로 제출했던 글이다. "과학기술자는 현실주의자인가? 이상주의자인가?"라는 주제로, 중간고사 이전의 강의에서 등장한 개념을 활용한 에세이를 작성해야 했다. 작성한 에세이에는 관념론과 실재론, 플라톤의 선분의 비유가 등장한다. 필자는 해당 과목에서 A+를 받았다. (뿌듯)


    과학(科學). KAIST 1학년 공학도인 나는 앞으로 몇 년 동안 꼼짝없이 과학을 공부하게 생겼다. 그 이후로도 과학은 높은 확률로 내 생계를 책임지며 삶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할 것이다. 과학은 공부해야 할 하나의 과목을 넘어서 나의 삶의 가치관을 실현해 나가기 위한 수단이기에 그 의미를 고민해보아야 한다. 본문에서 나는 과학 행위를 어떤 의미로 해석할 수 있는지 고찰하고, 과학기술자는 현실주의자와 이상주의자 중 어느 쪽에 가까운지 규정해보려고 한다. 나아가 행복하게 살아가기 위해서 나는 과학 행위를 삶에 어떻게 적용해야 하는지 고민해볼 것이다.

    과학의 사전적 정의는 "사물의 구조, 성질, 법칙 등을 관찰 가능한 방법으로 얻어진 체계적•이론적 지식, 특히 자연계에 대한 지식의 체계"이다.* 말하자면, 감각 대상들에 대한 관찰로부터 찾아낸 형이상학적인 질서라고 할 수 있겠다. 과학의 궁극적인 목적이 '앎'에 있다면, 과학 행위는 플라톤의 이데아, 즉 진리를 좇는 과정이다.

    과학을 공부하면서  희열을 느낀 적이 있었다. 역학적 에너지 보존의 법칙, 열역학에서의 Hess 법칙, 유체에서의 Bernoulli 법칙  물리학을 배우면서 여러 식을 배우지만 그것이 모두 에너지 보존 법칙의 서로 다른 표현형이라는 것을 알았을 때가 그랬다. 서로 다른 문제에서 같은 결론을 이끌어내는  수식들은 내게 마치 실재하는 진리가 자신을 찾아달라고 호소하는 듯한 느낌을 주었다. 물론 위의 법칙들을 내가 스스로 발견한 것은 아니지만, 이것은 내가 경험한 가장 강렬한 과학 행위의 기억  였다. 과학 행위는 관찰로부터 가설을 세우고, 논리적 사고와 수학이라는 도구를 활용하여 현상을 이해하고자 하는 과정이다. 말하건대, 플라톤의 선분의 비유에 등장한 noesis 향한 철학 과정이라고   있다.

플라톤의 선분의 비유**

     이쯤에서 일차적으로 과학을 규정짓자면, 과학 사유(dianoia)는 분명 가지계(可知界) 영역의 행위이지만, 관념론적인 행위는 아니다. 과학에서 생각하는 진리는 인간의 인식과 독립되기 때문이다. 객관적이고 절대적인 관념들을 쫓는다는 점에서 과학은 실재론에 입각하여 바라볼 수 있다. 즉, 형이상학적이고 절대적인 질서 혹은 법칙을 좇는다는 의미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새로운 의문을 제기할 수 있다. 과연 과학 질서는 실재하는 것인가, 아니면 그저 이름에 불과한 것일까? 진리는 발견되는 것인가, 정의되는 것인가?


    나는 과학 질서에 어떤 보편적인 절대 진리가 실재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물리의 가장 기본적인 논의는 두 물체 간의 상호작용, 즉 힘(force)을 다루는 데에서 시작한다. 고유한 물리량을 가지는 어떤 물체는 주변에 장(field)을 발현시키는데, 사실 이 '장'의 실재를 증명할 방법은 없다. 그저 논리적인 전개 과정에서 우리가 이름 붙인 하나의 모델이며, 그것이 잘 들어맞는 것뿐이다. 개인으로서는 매우 아름다운 해석이라고 생각하기에 실재하는 관념이라고 믿고 싶지만, 그도 그럴 수 없는 게 우리가 참이라고 믿고 있던 모델에서 오류가 발견된 선례는 충분히 있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것이 원자 모델에 대한 이야기이다. Dalton의 원자 모델을 받아들인 이후 우리는 세상을 이루는 기본 입자에 대한 고찰을 계속 진행해왔고, 그러는 과정에서 원자에는 전하를 띈 핵과 전자가 존재한다는 것을 알았다. 이후 핵을 공전하는 입자로 믿어졌던 전자는 Bohr 모델에 이르러서는 입자이지만 파동으로 역시 해석할 수 있다는 견해를 내놓았고, 현대에 이르러서는 아예 전자라는 것이 존재하여 특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확률함수의 형태로 나타난다는 오비탈(Orbital) 이론까지 등장한다.

    전자는 입자인가 파동인가? 애초에 전자는 실존하는가? 양자 개념이 도입되면서, Heisenberg가 불확정성 원리를 통해 전자는 관측을 시도할 때만 전자가 특정될 수 있으며 그 역시도 운동량이나 위치를 동시에 확인할 수 없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존재와 관측에 대한 개념은 다시 세워졌다. 현대 과학은 기존 상식을 부정하고 철학의 범주를 넓히고 있다. 이런 예시가 존재하기에 장(field)에 대한 개념 같은 통상적인 과학 지식 역시 부정되지 않을 거라는 확신을 할 수 없는 것이다. 보편적 절대 진리의 존재를 증명하기 이전에, 우리가 진리라고 주장하는 그것이 과연 정말로 절대적인지 우리는 알 수 없다.


    지금까지 글의 전개 과정을 정리하자면, 과학 행위는 자연계에 대한 이데아를 쫓는 과정이며, 과학에서 발견하는 질서를 관념적 실재론적인 견해로 해석할 때 우리가 절대적•보편적 진리에 이르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주장하였다. 그렇다면 주제로 돌아와서 나의 입장은 무엇일까? 과학자는 결국 불가능한 꿈을 꾸고 있다, 요컨대 '과학자는 실패할 운명의 이상주의자'라는 것일까? 그렇지 않다. 나는 완전한 이데아에 도달하지 못하더라도 과학은 의미가 있다고 믿는다. 애초에, 과학자는 이상주의자가 아니기 때문이다.

    과학자는 이상주의자가 아니다. 그 이유는 과학적 실재론과 관념적 실재론의 차이에서 발생한다. 전에 서술했듯이, 과학은 객관적이고 인간의 인식과 독립된 체계를 구성한다. 동시에, 그 체계를 구성하는 과정은 감각이 아닌 지성에 의존한다. 이런 부분에서 과학은 수학과 많은 면에서 유사하지만, 둘은 가장 기본적인 전제가 다르다. 과학은 가시계(可視界)에 그 기반을 두기 때문이다. 수학은 개념으로 시작하지만, 과학은 현상에서 시작한다. 그렇기에 수학과 과학은 추구하는 바가 다를 수밖에 없다. 수학은 엄밀한 논리로 체계를 확장하는 것을 우선한다면, 과학은 현상을 모순 없이 설명하는 것이 중요하다. 장이 실제로 존재하는지보다 중요한 것은, 장의 개념을 도입해서 힘을 잘 설명할 수 있는지가 더 중요하다는 뜻이다.

    물론 과학자는 절대 진리에 다가가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다. 대중에게도 잘 알려진 과학자이자 천재의 대명사, Einstein은 자연계의 4가지 기본 힘; 중력, 전자기력, 약력 그리고 강력을 하나의 장으로 설명하고자 하는 통일장 이론을 완성하고자 인생의 후반을 바쳤다. 나 역시도 과학을 공부하는 과정의 가장 큰 동기는 호기심이었고, 가장 큰 보상은 '딱 떨어지는 것에 대한 아름다움'이었다. 그러나 어떠한 아름다운 과학적 이론도 실험적 검증이 없으면 한낱 eikaisia에 불과하다는 말에는 모든 과학자가 동의할 것이다. 과학은 결국 지독하게 현실적이다.

    과학 행위는 재미있는 경계에 서 있다. 가시계에 발을 담근 상태에서 가지계를 구성해나간다. 형이상학적인 차원에서 수학하고 철학하나 결국 다시 돌아오는 것은 우리의 현실 세계이다. 그래서 과학의 의미는 지대하다고 생각한다. 이데아를 쫓는 수많은 이상주의자의 당위성을 제시해주기 때문이다. 현실과는 자칫 동떨어진 문제처럼 보이는 것들이 사실 우리의 일상과 아주 밀접한 연관이 있음을, 가시적인 현상들 이면에도 다른 차원의 질서가 존재하고 있음을 끊임없이 증명하고자 한다. 귀납적 관찰로 그냥 '그런가 보다'라고 남을 것들, pistis로 남을 것들에 지성을 적용하여 믿음의 근거를 제시한다.

    말하자면 '이상을 동경한 현실주의자'인 것이다. 이데아에 대해 고민을 하는 동시에 우리가 몸을 담근 현실을 인정한다. 그렇기 때문에 과학자들은 그저 관념론적 결론에 그치지 않고, 매우 현실적인 사고에 입각하여 그것을 다시 증명하고자 애쓴다. 과학기술자, 즉 공학자 역시 다르지 않다. 공학자는 얻어낸 지식을 현실 문제에 활용하는 데에 더 집중한다. 그런데 그 과정에서 공학자들은 다시 새로운 지식을 창출한다. 과학자들이 '발견'한다면, 공학자들은 '발명'한다. 운에 따른 요행이 아닌, 논리와 사고의 과정을 거쳐서 말이다. 결국 집중하는 문제나, 산출물의 가시성에서 차이가 있을 뿐 과학자와 공학자는 매우 유사한 과정과 사고를 거친다. 과학공학자는 가지계에 존재하던 최고선, 형상을 우리 삶의 일부로 구성하는 역할을 한다.


    조선 시대의 과학기술자 정약용은 실학의 기본 정신으로 '실사구시(實事求是)'와 '이용후생(利用厚生)'을 꼽았다. 진리의 탐구만큼이나, 학문의 이로운 쓰임을 고민하는 것은 중요하다. 공학자와 과학자는 현실주의자이다. 그러나 현실에 안주하지 않고 새로운 것을 계속 만들어나간다. 사랑하는 지식의 이로운 쓰임을 고민하여, 이데아를 현실 세계로 조금씩 끌고 온다. 비관하지 않는 현실주의자의 또 다른 이름은 실천하는 이상주의자일 것이다. 나 역시 끊임없이 지식을 탐구하고, 내가 생각하는 가치를 현실에서 구현해나가는 그런 능동적인 현실주의자가 될 것을 다짐해본다.


*출처: 위키피디아, "과학" https://ko.wikipedia.org/wiki/%EA%B3%BC%ED%95%99 

**이미지 원본 출처: http://www.john-uebersax.com/plato/plato1.h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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