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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인용구 Dec 22. 2022

호모 비덴투스

보는 사람, Homo Videntus.

視. See. 보다.


    우리가 외부 세계로부터 정보를 받아들일 때 의존하는 감각의 80%는 시각이라고 한다. 백문이 불여일견(百聞不如一見), 세상을 이해하는 데에 있어 보는 것의 중요성은 지대하다. 영어에서는 무언가를 이해했을 때 "I see"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우리말도 "들어보다, 만져보다, 맡아보다, 맛보다…" 다른 감각에 대한 행위마저 '-보다'라는 말로 끝맺지 않는가? 우리가 사물이나 현상을 받아들이는 태도를 '관점(point of view)'이라고 부르는 것도 우연이 아닐 것이다.

    돌이켜보면 나는 아주 옛날부터 "시(視)"라는 행위에 관심이 많았다. 다시 말해 공부를 좋아했다. 아는 만큼 보인다길래. 내가 머리에 든 것이 많아야 세상을 똑바로, 제대로 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좋게 표현하면 호기심이 많은 꼬마였지만, 고백하면 나는 틀리는 게 두려웠던 소년이었다. 시험에서 95점을 맞는 것이 두려웠다는 건 아니다. 잘 알아보지 않았을 때 반드시 따라오는 손해가 두려웠다. 무지(無知)든 무관심이든, 제대로 보려는 노력이 없다면 누군가를 오해하고 상처를 줄 수 있다는 것이, 또는 정말 아름답고 좋은 것을 놓칠 수 있다는 것이 무서웠다. 책을 들여다보며 시력은 나빠졌지만 "잘 보는 힘"을 키워나갔다. 아는 만큼 보인다, 아는 것이 힘이다. 잘 보는 것이, 곧 세상을 살아가는 힘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세상은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다, 때로는 우리의 감각이 진실을 속이기도 한다- 나는 이것을 과학을 공부하며 배울 수 있었다. 예컨대 '원심력'이라는 개념이 그렇다. 원심력은 실재하는 힘이 아니라, 구심력이 작용하는 물체에 관성으로 발생하는 감각을 설명하기 위한 개념이다. 관성, 현재의 상태를 유지하려는 성질. 지구만 해도 제자리에서 빙글빙글 도는 동시에 태양 주위를 핑핑 돌고 있는데, 그 엄청난 속도를 나는 체감해본 적이 없다. 이것도 관성 때문이다. 어떤 상태에 익숙해지는 것은 비단 우리의 게으름에 인한 성질이 아닌 자연의 이치라, 우리는 보고 듣고 느끼는 낯익은 것들이 전부라는, 진실이라는 착각에 너무나도 쉽게 빠지고 만다.

    애초에 우리가 가장 의존한다는 시각부터가 얼마나 불완전한지. 우리의 눈은 400~700nm 파장의 소위 '가시광선' 영역의 빛만을 인식할 수 있다. 마이크로파나 감마선 같은 빛은 볼 수 있기는커녕 닿는 순간 내 몸의 세포들을 끓여버리거나 찢어발긴다.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다... 그럼, 일부라도 제대로 보아야 할 것 아닌가! 우리가 인식하는 세계에서도 눈의 한계로 인한 착시(optical illusion) 현상이 발생한다. 평행선의 정의는 "서로 만나지 않는 두 선"이다. 그런데 우리의 눈은 원근감으로 인해서 아득히 멀리 있는 물체를 점으로 인식하고, 그런 까닭에 평행한 두 선도 한 점에서 만나는 것처럼 인식해 버린다. 서로 만나지 않는 두 선이 만나는 점, 이 불가능의 위치를 소실점(vanishing point)이라고 부른다. 마치 인간은 결코 전부를 있는 그대로 볼 수 없고, 그렇기에 전지할 수도, 전능할 수도 없다는 결론의 마침표처럼. 소실점은 내게 무력감의 방점이었다.


    틀리는 것이 무서워 공부했더니, 내가 아는 모든 것이 거짓일 수도 있다는 회의주의에 도달해 버렸다. 그래, 우리는 평생 상(image)만 보는 동굴 속의 인간들이고, 평생 이데아(idea)에 닿을 수는 없겠구나. 귀납의 세계에서는 단 하나의 진리도 허락되지 않는구나. 그렇다면 이 모든 게 무슨 소용인가, 나는 무엇에 기대 살아가야 하는가... 회의주의는 쉽게 허무주의로도 변질했다. 쌓은 지식에 비해 삶을 대하는 지혜를 충분히 갖추지 못해서, 보이지 않게 방황을 많이 했다.

    그런 나를 위로해준 것은 인문학이었다. 생각해 보면 "인간은 전지전능할 수 없다"라는 말은 너무 자명한 것이다. 그게 가능한 존재는 '신(神)'이라 불린다. 애초에 인간에게 주어지는 100년의 생애는 수천 년에 걸쳐 축적한, 그러나 아직도 불완전한 인류의 지식을 모두 깨우치기에도 모자란 시간이다. 물론 내가 좇는 것이 전지전능도 아니었지만, 이 거대한 세계관에서 나는 찰나를 살아가는 무력한 티끌에 불과하다는 생각은 외로움을 주었다. 그러나 영겁과 무한의 우주 안에서- 두려운 불확실과 미지 속에서- 어떻게 허무주의나 무력감에 빠지지 않고 살아갈 수 있는지 앞서 고민한 사람들이 있었다. 윤회를, 신을, 사랑을… 믿음을 제공하는 종교에서. 회의를 반복하는 '나'만큼은 실존한다고 말한 데카르트. 그를 비롯한 철학자와 경제학자, 심리학자들의 견해(見解)들에서. 나와 닮은 소설의 주인공과 시의 화자들에게서 나는 위로를 받았다. 그 과정에서 마음에 드는 어떤 답을 찾은 것은 아니지만, 나의 고민과 감정이 나만의 것은 아니었다는 것을 깨닫는 것만으로도 공부와 삶을 이어갈 용기가 생겼다.

    물론 나는 이공계의 길을 걸어온 사람이기 때문에 인문학에 대한 식견(識見)이 깊지는 못하다. 저렇게 한참 인문학 책을 읽었던 시절도 대학 입시가 어느 정도 결정 난 시점의 작은 추억이다. 대학에 들어온 후로는 책보다는 인간들과 치고받는 시간이 더 많았고, 다만 숫자를 쓰는 공부는 내가 제일 잘해왔던 것이라 관성적으로 이어 나가게 되었다. 그럼에도 "시(視)"라는 행위에 대한 관심은 여전했는데, 운 좋게 지금은 '보는 것'을 이해하는 데에 종사하고 있다.


    내가 대학원에서 연구하는 학문은 컴퓨터 비전이라는 분야인데, 말하자면 컴퓨터가 시각 정보를 이해하고 처리할 수 있도록 학습시키는 것을 목표로 한다. 컴퓨터는 아주 영특한 학생이지만 아직 카메라와 마이크의 입력으로 우리처럼 세상을 보고 듣는 것에 익숙하지 않다. 헬렌 켈러를 가르치는 설리번 선생님의 마음으로, AI 공학자들은 우리에게 너무 당연한 것들을 컴퓨터의 시선에서 하나씩 다시 바라본다. 그러면 의외로 대답하기 난처한 질문들이 많다. 우리는 어떻게 저 사물을 고양이로 인식하지? 고양이를 어떻게 배경으로부터 분리해낼 수 있는 거지? 뾰족한 귀와 복슬복슬한 털? 그럼  뾰족함, 복슬복슬함은 뭐지? 그것을 컴퓨터에게 어떻게 설명하지? 이렇듯 시각의 원리를 복습하면서 새롭게 발견하는 것들이 있다.

    이를테면 학습은 곧 편견을 배우는 것이다. 컴퓨터는 학습 데이터를 해석하며 일반화의 과정을 거쳐 얻은 편견으로 평가 데이터에 대해서도 대답을 내놓는다. 기계학습을 공부하다 보면 모델이 평가 단계에서 잘 작동하지 않는 이유를 설명하기 위해 '과적합 (Overfitting)'이라는 개념이 나오는데, 이것은 학습 데이터의 부족으로 발생하는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라고도 이해할 수 있다. 편견은 나쁜 것이 아니다, 경험에 의한 추론은 당연한 학습의 원리이다. 나쁜 것은 경험 부족과 성급한 일반화다. 그렇다면 많이 경험하지 못한 것에 대해서도 올바른 판단을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Few-shot learning), 경험에서의 통계적 편향성으로 발생하는'차별적인 편견'은 어떻게 막을 수 있을까 (AI justice), 이렇게 공학에서 다루는 문제와 접근들로부터 삶에도 적용할 수 있는 지혜를 도출하는 재미가 있다.

    어떻게 보면 나의 분야는 제법 대놓고 인문학을 하기 좋은 공학 분야라고 생각이 든다. 그리하여, 비록 아직 자랑할 만한 논문 하나 내놓지 못한 풋내기 대학원생임에도 나는 내 분야에 자부심을 느낀다. 새로운 기술을 제안하여 학계에 족적을 남기는 일은 하지 못했으나, 지금 나의 공부에서 의미를 찾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잘 보고 싶다. 박사과정을 잘 마쳐서 '본다'라는 행위를 수년간 고민한 사람의 시야를 얻고 싶다. 인공지능이라는 새로운 도구의 등장으로 인해 넓혀지는 인문학의 지평에서도 나의 역할이 있을 것이라고 믿는다. 나아가 내가 이해한 視의 원리를 삶에도 잘 적용해서, 행복하게 인생을 일궈나가는 모습을 모두에게 보여주고 싶다. 


    공학도의 길을 걷고 있지만, 나는 시인(詩人)이 되고 싶다는 꿈도 있었다. 브런치에 올린 글도 대다수가 시였으나, 스스로를 '시인'이라 부르기에는 부끄러움이 많았다. 그러나 나는 이미 시인(視人)의 길을 걷고 있었다. 공학을 통해, 글을 통해, 세상을 더 잘 바라보는 사람이 되고 싶다.


시인(視人). 보는 사람. Homo Vident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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