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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 여행의 끝

8월 다섯째 주 - 강원도 속초 (3) / 연재 후기

by 인용구

서점 구경을 마친 우리는 택시를 타고 대형마트로 이동했다. 저녁으로 먹을 고기와 술을 넉넉히 사고, 비빔면과 햇반 같은 탄수화물도 빼먹지 않았다. 장보기를 마치고 숙소로 돌아오니 대략 오후 세 시. 냉장고에 사 온 음식들을 넣어놓고 우리는 곧바로 바다로 향했다.

아이 좋아

소년에게서 해에게


전에 이야기한 적이 있는지 모르겠지만, 나는 여름 피서지로 계곡과 바다 중 하나를 고르라 하면 늘 계곡의 편에 서는 사람이었다. 차가운 물이 시원스럽게 흐르는 모습은 상상만 해도 더위가 물러간다. 하얀 물보라를 일으키며 경주하듯 달리는 물소리. 푸른 산이 내뿜는 신선한 공기, 계곡물에 담가 놓았던 잘 익은 수박. 눈과 귀, 코와 입, 피부까지—말 그대로 오감 전체를 만족시키는 최고의 피서지가 아닐 수 없다. 다녀오면 온몸이 모기에 뜯기고, 근육통에 다리는 멍투성이가 되기도 하지만, 그 모든 것을 능가하는 즐거움을 선물해 주는 것이 계곡이었다.


반면 바다는 사람은 많지, 물은 짜지. 가끔 바다를 돌아다니다 보면 묘하게 따뜻한 수역(?)이 있어서 기분이 나쁠 때도 있다. 발바닥에 붙는 모래도 찝찝하고. 계곡은 계곡마다의 매력이 있는데, 해수욕장은 어디를 가든 늘 보던 해변 같아 그다지 마음이 가지 않았다.


그런데 최근 몇 년 동안 계곡에는 가지 못했다. 대신 매년 바다는 꼬박꼬박 찾으면서, 조금씩 그 매력을 알아가는 중이다. 일단 탁 트여 있는 것이 좋다. 막힘없이 뻗어나가는 시선이 하늘과 바다의 경계에 닿는 그 느낌이. 또 왠지 모르게 조금 감성적이게 된다. 바다만이 전해주는 위로가 있다. 나를 온전히 담글 수 있을 만큼 큰 바다에 몸을 맡기면, 말 그대로 바다에게 안기는 기분이 든다. 계곡에서는 즐겁게 노느라 감상에 젖을 틈이 없지만, 이곳에서는 물장구치다가도 문득 가만히 물 위에 떠 있노라면—부유함과 허무함, 그런 감정의 파도가 마음을 쓸고 지나간다.


이번에도 친구들과 헤엄도 치고 서로 물도 먹이며 즐겁게 놀다가, 이따금씩 마음이 벅찬 순간들이 있었다. 그렇다고 조울증 같은 건 아니고, 그냥 많이 행복했던 것 같다. 서른을 바라보는 나이에도 이렇게 유치하게 놀 수 있는 친구들이 있다는 게 좀 기뻤던 것 같고.


별개로 진짜 유치하게 놀았다. 이번에 찾은 재밌는 놀이 - "해변의 변사체"라고 나는 부르는 놀이인데. 그냥 떠밀려온 시체처럼 누워있으면 작은 파도에도 몸이 엄청나게 과격하게 내팽개쳐진다. 디스코팡팡이 따로 없다. Ragdoll physics, 정말 헝겊인형처럼 몸이 나뒹구는데 미친 사람처럼 웃음이 나온다. 근데 그냥 진짜 미쳐 보였나 봄. 친구들이 추하다고 외면하는데 조금 섭섭했음.

인어아저씨 (사진 저 아님!)

어쨌든 그렇게 한참 놀고 나니 배가 고파졌다. 숙소로 들어와 차례로 씻고 저녁 식사 준비를 했다. 슬리퍼를 신고 음식을 나르다가 바다 쪽을 바라보는데, 또 놀고 싶었다. 즐거웠다 해(海)야. 내년 여름에는 계곡을 다시 가봐야겠어. 지금은 살짝 바다가 더 좋아지려고 해.


처..........ㄹ썩, 처..........ㄹ썩, 척, 쏴..........아.
저 세상 저 사람 모두 미우나,
그 중에서 똑 하나 사랑하는 일이 있으니,
膽(담) 크고 純精(순정)한 소년배들이,
재롱처럼, 귀엽게 나의 품에 와서 안김이로다.
오나라, 소년배, 입 맞춰 주마.
처.........ㄹ썩, 처..........ㄹ썩, 척, 튜르릉, 꽉.

- 최남선, <해에게서 소년에게> 중
속초해변 너 아주 좋아 칭찬해

안녕, 모두 안녕. 다시 안녕.


저녁 식사 준비는 순조로웠다. 이미 수차례의 MT로 단련된 경력직 아저씨들은 시키지 않아도 각자 할 일을 해냈다. 음식과 술을 나르는 동안 한 명은 불을 피우고, 누가 고기를 굽는 동안 누구는 햇반을 돌리고, 또 다른 녀석은 식기를 세팅하고, 나머지 한 명은 비빔면을 만들었다. 팀워크 굿.


그나저나 혹시 여러분은 고기 1인분이 몇 그램이라고 생각하시나요? 식당에서 돼지고기 200g, 소고기 150g을 1인분으로 파는 것에 저는 종종 분노합니다. 진짜 1인분만 먹고 살아볼래? 움파룸파 기준도 아니고, 성인 남성에게는 턱없이 부족하다고 생각해요. 물론 내가 많이 먹는 편도 맞지만. 이번 저녁 식사에서는 넷이서 삼겹살이랑 갈매기살 항정살 해서 대충 두 근 반 정도 먹었다. 거기에 소세지에, 각자 밥에, 비빔면도 세 봉지 끓여 먹었으니. 풍족한 저녁 식사였다. (이래놓고 부족하다고 밤에 피자 한 판 더 시켜 먹었다.)


종일 많이 걷기도 했고, 바다에서 한참 놀며 피곤한 하루를 보낸 탓일까, 친구들이 11시도 되지 않아 불 끄고 잘 준비를 했다. 안돼~ 이 저질 체력들아!! 더 놀아줘.. 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나도 머리를 땅에 대자마자 기절하고 말았다.

20대 후반에도 멈추지 않는 헝그리 정신

... 그러나 자정이 되기 전 부활했다. 아쉬움 때문인지 눈이 절로 떠졌다. 백수로서의 마지막 날, 8월의 마지막 하루가 시작되는 순간을 놓치고 싶지 않았어. 이미 코를 골며 자는 녀석들을 내버려두고 조용히 밖으로 나왔다.


자정에 가까운 시간이지만 해변에는 여전히 젊은 친구들이 많이 놀고 있었다. 사람들이 터뜨리는 폭죽을 보며 맥주 한 캔을 마셨다. (폭죽 원래 안 되긴 해!) 돗자리를 깔고 앉아서 밤바다를 바라보는 여성들, 탄탄한 몸매를 자랑하듯 내보이며 요란하게 술자리를 하는 청년들. 손을 잡고 걷는 커플들. 예쁜 청춘. 각자 저마다의 방식으로 여름의 마무리를 하는 풍경이 보기 좋았다.

여름에게, 건배
에메랄드빛 밤바다

그런 생각도 들었다. 여기 돌아다니는 20대 친구들은 높은 확률로 다 나보다 어리겠구나. 나는 스물아홉이니까. 아홉수의 서글픔, 보다는 어떤 애틋함을 느꼈다. 부럽다, 야. 좋을 때다. 나도 좋을 때지. 10년 후의 나는 지금의 나를 부러워할 테다.


문득 나의 이십 대를 돌아보게 되는 것이었다. 스무 살부터 지금까지 쭉. 대전에서, 학교에서 머무르면서. 놓치고 산 것도 꽤 많겠지. 클럽 한 번 안 가보고, 미팅 한 번 안 해보고. 미친 척 휴학하고 자랑할만한 일탈을 저질러봤다거나, 흔치 않은 나만의 경험을 쌓아보지도 못한 것 같다. 그렇다고 나의 그 시간을 "평범하게"라던가 "재미없게"라고 말하면, 그건 나에게도 또 누군가에게도 실례일 것 같다. 밀도 있게, 성실하게 살아냈다. 그것만큼은 확실하게 말할 수 있다. 갈라진 복근 한 번 가져본 적 없지만, 연애 경험도 많지 않지만. 나의 청춘도 여러분의 청춘 못지않은 시간이었다오. 그러니까 나는 부러울 것도, 부끄러울 것도 없는 거야. 그럼 됐어. 너무 잘했어.


좋을 때야, 청춘을 살아내는 동안에도 그것을 늘 기억했으면 좋겠어. 그것을 늦게 깨닫고 후회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각자의 방식으로 저마다의 이십 대를 살아가는 동생들에게 해주고 싶은 조언은 그것뿐이다. 비교할 필요도 없지. 남들처럼 하지 않았다고 해서 그것이 잘못된 것은 아니니까. 스스로에게만 떳떳하면 그럼 된 거야..


으악, 아련한 눈빛으로 꼰대 같은 말이나 건네는 음침한 늙은이라 죄송합니다. 사실 나도 어린데 ㅋㅋ. 슬슬 학교를 떠날 때가 됐구나 느끼는 순간이 이런 때다. 너무 화석 포지션에 익숙해졌어. 나도 내년에 회사를 다니면 다시 신입, 막내 포지션이 될 것이다. 새로운 사회에서, 다시 처음부터 하나하나 배워나가며 나만의 삼십 대 이야기를 채워가겠지.


귀여운 막내는 못 되겠지, 그러기엔 너무 커버린 몸이다. 그리고 어디서 배웠는데 귀여운 거에 나이 들어서도 집착하면 추태래... 영포티 뭐 이런 거. 그치만 나는 귀여운 척하는 게 아니라 진짜 귀여운 건데. 30대가 되어서는 또 그 나이대에 맞는 새로운 매력을 또 발굴하여, 또 나의 사람들에게 사랑받는 방법을 터득하지 않겠나. 유능한 막내, 다정한 동료, 재밌는 형, 든든한 남편, 멋진 아빠. 이런 수식어가 붙는 30대가 되기를 바란다.


그래서 이십 대의 마지막 여름이 지나가는 것이 아쉽기도 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기대가 된다. 할 만큼 했지, 이제 다음 계절로 넘어갈 마음의 준비도 어느 정도 된 것 같아. 머무르고 싶다고 머무를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닥터 후(postdoctoral)하는 1년의 유예기간이 주어졌으니 그 귀한 시간을 십분 활용하여 나의 이십 대와 잘 작별하고 싶다. 어, 이거 화락이네. 오랫동안 해왔던 생각이란 뜻이다.


당장 내일부터 9-to-6 출근을 해야 하지만, 그것도 이제 사회생활을 위한 훈련이다. 자유롭게 살긴 했어, 대학원 분명 힘들기도 했지만 편하게도 살았다. 불규칙적이고 즉흥적인 삶이 젊음의 특권이라고 생각한 적이 있다. 그래서 9월 출근이 정말 싫었던 것 같다. 하나의 죽음, 한 시대의 끝 같아서. 그런데 끝이 있어야 시작이 있는 거니까. 오라, 달콤한 죽음이여. 이게 아니지. 사랑하는 이여, 마침내 나는 너에게 간다.


사랑하는 이여
오지 않는 너를 기다리며
마침내 나는 너에게 간다
아주 먼 데서 나는 너에게 가고
아주 오랜 세월을 다하여 너는 지금 오고 있다
아주 먼 데서 지금도 천천히 오고 있는 너를
너를 기다리는 동안 나도 가고 있다

- 황지우, <너를 기다리는 동안> 중


나의 모든 시간을 사랑할 수 있기를 바라며.

안녕, 나의 어제야. 오늘의 사람들아, 모두 안녕. 다시 만날 내일까지 부디 안녕.



긴 여행의 끝


맥주 한 캔을 몰래 해치우고 온 나는 방에 슬그머니 돌아와 잘 잤다. 첫날 먹었던 순대가 맛있었는지, 마지막 날은 또 아바이순대를 먹기로 했는데 아예 속초에 '아바이마을'이라는 동네가 있더라고. 사실 아바이마을에 독보적으로 리뷰가 많은 식당이 하나 있어서 거기를 염두하고 갔는데, 막상 택시에서 내렸는데 눈앞에 보이는 식당 아주머니의 호객에 '아무렴 어떠냐' 싶어 들어가 먹었다. 속초관광시장 근처 "장터순댓국"보단 좀 아쉬웠지만, 화가 날 정도로 맛이 없거나 하진 않았다.

순대는 여기도 참 맛있었어요

버스 시간까지 조금 여유가 남아 카페에 들어가 각자 핸드폰 좀 보다가, 녀석들은 올 때처럼 고속버스터미널로, 나는 시외버스터미널로 홀로 향했다. 나는 사실 조금 더 시간을 넉넉하게 빼두었기 때문에, 걸어갈까 하다가 재밌는 것도 발견했다.

귀여워! 재밌어! 나도 끌어보고 싶어!!

갯배라는 건데, 아바이마을이 살짝 섬처럼 되어있거든요. 설악대교나 금강대교를 통해 드나들 수 있는 동네인데 여기 통행료 500원으로 배를 타고도 육지로 이동할 수 있었다. 갯배는 짧은 거리를 줄로 연결하여 그것을 따라 왕복하는 나룻배 같은 거였다. 별다른 동력원이 없고, 승객이 직접 줄을 끌어 이동해야 하는데 그 메커니즘이 소소하면서도 재밌어서 좋았다. 다음에 속초를 오면 갯배를 타고 다시 아바이마을을 찾아야지. 이 재밌는 걸 혼자 타서 좀 아쉬웠다. 엄청 막 익사이팅한 이동수단도 아니긴 했지만.


대전으로 돌아가는 데는 거의 여섯 시간이 걸렸다. 버스가 거의 강원도 이름 들어본 지명에서 모두 정차하는 것 같아. 집에 도착했을 때는 솔직히 좀 많이 지치더라. 가방을 벗자마자 씻지도 않고 침대에 누웠다. 피곤한 하루. 피곤할 법도 하지. 이번 주말뿐만 아니라, 두 달 동안 정말 주말마다 열심히도 돌아다녔다. 지겹도록 놀았다... 아냐, 단 한 순간도 지겹지 않았어. 그래서 이 글은 어떻게 마무리해야 할까. 이 연재는. 어린 시절 숙제로 쓰던 방학 일기처럼, 이 문장이 좋겠다.


방학동안 맛있는 것도 많이 먹고,
엄마 아빠랑 친구들과 신나게 놀았다.
참 재미있었다.




짧게 쓰는 연재 후기:


9월이 지나고 어느덧 포닥 생활도 50일차에 가까워지는데, 생각보다 크게 달라지는 건 없었습니다. 여전히 술도 잘 먹고요. 늦게 자고도 어떻게든 출근은 해서, 아직까진 무리 없이 잘 생활하고 있습니다. 주말에도 어디 놀러가거나, 산도 오르면서 즐겁게 살고 있어요. 너무 엄살이 심했다. 나쁘지 않네요 하하.


이번 <박사님은 놀고 싶어>라는 연재를 통해 총 스무 편의 글을 썼습니다. 지각도 많았고, 가끔 말없이 휴재를 하기도 했는데요. 귀찮을 때도 있었지만 덕분에 좋은 추억을 기록으로 남길 수 있어서 기쁩니다. 이 연재가 없었다면 어느 주말엔 그냥 여행 포기하고 집에서 쉬는 날도 있었을 것 같은데, "재미있는 이야깃거리를 만들고 와야지" 하는 마음으로 더 열심히, 뜨겁게 놀았습니다.


'연재'라는 형식 덕분인지 브런치에서도 더 많이 노출되어, 그동안 썼던 다른 글보다 많은 관심도 받아서 즐겁게 글 썼습니다. 다른 주제로 또 새로운 연재도 해볼까 봐요. <박사님은 놀고 싶어>를 사랑해주신 모든 분들꼐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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