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 다섯째 주 - 강원도 속초 (2)
여행지에서 아침에 늦장 부리는 시간이 좋다. 바깥으로 나가는데 오직 나의 의지만이 작용할 때. 출근을 하지 않아도 된다는 점에서 주말과 비슷하지만, 뭔가 여행지에서는 좀 더 적극적이고 능동적으로 이 여유를 즐기게 된다. 사실 나는 혼자 여행을 할 때는 그 시간을 밀도 있게 (짧게) 누리는 편인데 ㅋㅋ 친구들과 가면 한없이 늘어지는 느낌도 있다. 아마 서로를 재촉하고 싶지 않다는 배려 때문이겠지.
그래도 얼른 일어나, 밥 먹어야지.
아침 겸 점심으로 물회를 먹기로 했다. 회를 안주로 술 먹고, 물회로 해장하는 것. 이게 바로 권력 아닐까? YouTube를 보니 속초에는 3대 물회라는 게 있다고 하던데, 그중 가장 크고 유명한 곳이 "청초수물회"라는 곳이었다. '청초하다'라는 수식어는 나의 미래 연인에게 잘 어울리는 말이었으면 좋겠다. 숙소와 더 가까운 곳은 "속초항아리물회"도 있었는데, 이름이 예뻐서 사심이 작용했다. 적어도, "봉포머구리집"보다는 이름은 좋잖아요. 그쵸? 사실 청초수물회도 우리가 아는 청초(淸楚)는 아니고 뒤에 있는 청초호(靑草湖)에서 따온 이름인 듯한데, 그것도 익숙한 한자로 이루어져서 꽤 이쁜 이름이죠. 푸른 풀. 풀은 풀이지 암.
청초수물회는 1층 카페를 제외하면 4층 건물을 통째로 사용하는 이른바 대기업형 식당이다. 성수기 점심시간에는 에버랜드를 능가하는 엄청난 웨이팅이 있다고 해서 조금 걱정을 했는데, 우리는 성수기보단 늦은 시기에 가서인지, 11시 점심시간보단 이른 시간에 간 덕분인지 웨이팅은 없었다. 자리에 앉은 우리는 대표 메뉴인 해전물회와 섭국을 주문했다. 섭은 홍합의 강원도 방언이래. 이 지방에서만 먹는 향토 음식이라기에 기대가 됐다. 메뉴판에 성게알 비빔밥도 있길래 그것도 하나 주문해봤다.
해전물회는 비주얼이 과연 압권이었다. 이름에 걸맞게 실한 해삼과 전복이 하나씩 크게 올라가 있었다. 이름은 알 수 없는 다양한 회도 넉넉하게 올라가 있는 듯 보였다. 양푼이 깊어서 좀 기대를 했는데 접시처럼 깔린 회 아래에는 살얼음 육수가 빙수처럼 얹어져 있었다. 물회, 생각해보니 회 토핑 초장 빙수네. (비슷한 얘기를 그때 여행에서도 했던 것 같다.)
사실 물회를 엄청 좋아하는 건 아니라, 내돈내산은 처음 해봤다. 애초에 회를 먹을 때도 초장보다는 간장에 찍어먹는 것을 좋아하고, 대놓고 산미가 강한 음식은 불호에 가깝다. 가격도 좀 비싸지, 2인분에 48,000원이면. 쿠우쿠우 평일 런치가 23,900원이니, 뷔페를 가는 게 200원 싼 셈이다.
그럼에도 이번 여행 메뉴에 물회를 포함시킨 것은 나였다. 어이어이, 구 박사. 혹시 지금 "편식" 하는 겁니까? 너 음식 가려? 물회를 안 좋아하는 게 아니라 맛있는 물회를 안 먹어본 거겠지. 물회는 크게 '속초식 물회'와 '포항식 물회'로 나뉜다고 하는데, 그중 우리에게 익숙한 차가운 육수에 말아먹는 물회가 바로 속초식 물회라고 한다. 다섯 시간이나 걸려서 온 물회의 본고장. 그것을 대표하는 맛집에서 물회의 맛을 알 수 있다면, 그깟 수업료쯤은 아깝지 않았다. 더군다나 함께 '물회 원정'에 흔쾌히 응해준 동료들도 있는데 무엇이 두려울까.
그래서 먹은 물회는 어땠냐구요? 맛있었어요~ 청초한 맛. 바다처럼 청량하고 초산처럼 새콤한 맛. 차가운 육수에 따뜻한 밥을 말아먹는 것에 다소 거부감을 갖고 있었는데 직접 먹어보니 나쁘지 않았다. 신맛이 입맛을 돋워서 계속 먹게 되는 매력이 있었다. 사실 해삼과 전복도 값에 비해 맛있는지 모르겠다고 생각했었는데, 이번에 먹었을 때는 꼬독꼬독한 식감이 분명 보양식 같은 느낌을 주었다. 회도 물회를 전부 해치울 때까지 매 순간 회가 씹혔던 것을 생각하면 양은 충분했던 것 같다. 가끔 여름이면 생각날 수 있을 것 같아, 빙수도 냉면도 만원이 넘어가는 세상에 조금의 사치를 부린다면 물회를 먹는 자신도 상상할 수 있었다.
섭국은 매력있었다. 일단 빨간 국물이어서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흰 국물의 홍합탕과는 다르고, 그렇다고 짬뽕에 가까운 것도 아니었다. 살짝 시원한 육개장 느낌. 차가운 물회와 번갈아 먹으니까 마치 냉탕과 온탕을 넘나들며 뛰노는 아이처럼 즐거웠다. 근데 이제 성게알 비빔밥은 조금 돈 아까웠음. 성게알이라는 식재료 자체가 오마카세에서나 만날 수 있는 고급 해산물이라는 건 알지만... 밥에 비비니까 딱히 그 성게알의 매력을 느끼지 못했다. (비비기 전에 한 번 먹어볼걸...) 22,000원이라는 가격이 일단 너무 사악하지. 이건 주문 실수로 하자.
전체적으로 비싼 느낌은 있었다. 원래 물회를 안주로 또 소주를 먹는 상상도 하며 친구들과 입맛을 다셨는데, 막상 식당에 가서 음식을 주문하고 나니 여기서 술까지 주문할 생각까진 들지 않았다. 청초수물회. 좋은 경험이었지만 재방문 의사는 없음이다. 분명 물회의 전형적인 맛, 대조군으로서 손색이 없는 맛이었지만 아마 다음에 속초를 오더라도 다른 물회집을 방문해보지 않을까.
식사 후에 우리는 긴 산책을 하기로 했다. 사실 내가 가고 싶었던 서점이 있었는데, 그쪽으로 향하는 길에 구경거리도 많은 듯 해서 발길을 이끌었다. 먼저 청초호를 둘러서 한바퀴 걸었다. 걷는 동안 웬 갈치가 수영하는 듯한 높다란 빌딩을 보았는데, 이름이 '피노디아 엑스포타워'였다. 가까이서 볼수록 흉측해서 '후후, 대전 한빛탑 1승이다,' 라고 생각해버렸다. 에펠탑도 파리 만국박람회 때 지은 엑스포타워라면서요. 엑스포가 열리면 꼭 특이한 탑 하나는 지어야 하나보죠?
속초는 알 수 없는 곳 같았다. 청초호 정자 앞의 모 교회 앞에서는 예수님을 만났고, (*신성모독 주의)
그 바로 옆에 있는 "석봉도자기미술관"은 코린토스 양식의 기둥을 사용하는 그리스 신전같은 외관으로 우리의 이목을 사로잡았다.
석봉도자기미술관은 한석봉과 관련있는 장소는 아니었고, 석봉이라는 호를 사용하는 조무호 선생님이 직접 만들고 수집한 여러 도자기 작품들을 만날 수 있는 공간이었다. 무더위 속 운명처럼 들어간 미술관에서 나는 하나의 작품 앞에 홀린 듯 멈춰섰다.
...에어컨은 위대한 예술품이지. 그렇고 말고. 아, 왜 이렇게 웃음벨 투성이지 ㅋㅋ 굉장히 무례하게 속초를 즐기고 말았다.
한참 경관(?)을 즐기며 속초를 뚜벅뚜벅 걸어 도착한 곳은 "문우당 서림"이라는 책방이었다. 전주에서 방문했던 양귀자 작가의 "홍지서림"은 사실 굉장히 무난한 동네 서점 느낌이었는데, 우연히 알게된 이곳은 굉장히 책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꾸며놓은 공간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서가의 구성부터 '한국문학', '사회정치' 이런 분류가 아니라, 책장마다 책의 구성과 전시하는 방식에 고심한 흔적이 엿보였다. 이른바 책 큐레이팅을 시도한 것이 좋았다. 또, 쉽게 접할 수 없는 로컬 작가들의 작품이라던가 독립출판물도 다양하게 만날 수 있어서 주인장이 굉장히 MZ하고 요즘 유행한다는 '텍스트 힙'도 이해하시는 분이구나 싶었다. 특히 인상깊었던 것은 "작가의 방"이라고, 하나의 작가에 대해 작품들과 좋은 글귀들을 모아놓은 작은 공간이 있었는데. 내가 방문했을 때는 박완서 작가를 테마로 있었다. 이게 분기마다 혹시 작가가 바뀌려나? 궁금했다. 모쪼록 백문이 불여일견, 속초를 갈 일이 있다면 꼭 한 번 방문하는 것을 권한다. 책을 좋아하는 분들이라면 분명 좋아할만한 곳.
사실 이곳은 다음날 친구들과 헤어진 다음에도 몰래 다시 찾았다. 버스 시간 전에 조금 시간이 뜨더라고. 책을 사지는 않고, 문뜨 소설모임에서 추천받은 김승옥의 <무진기행>을 읽었다. 최인훈의 <광장>을 굉장히 좋게 읽었는데, 그랬더니 후배가 추천해주더라고. 개인적으로는 <광장>이 훨씬 좋았다. 아, <광장>에 대해서는 따로 서평을 써볼 생각도 있으므로 여기서는 조금 말을 아끼겠다.
저녁 약속이 생겨버려서 오늘은 이정도 분량으로 글을 마무리합니다!
금요일, 이번 연재의 마지막 글로 돌아오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