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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이 시작되는 곳

8월 다섯째 주 - 강원도 속초 (1)

by 인용구

올해 8월은 다섯 번의 주말이 있었다. 전문연 출근을 시작하는 9월 1일이 월요일이었는데, 직전 주말은 그냥 집에서 쉬면서 개인정비 시간을 가져야 하지 않을까? 싶기도 했지만. 노는 게 질릴 때까지 놀아봐야지, 하는 마음으로 라스트 댄스 여행을 다녀왔다. 마지막 여행지는 다시 강원도 속초. 7월에 가족과 강원도 여행을 다녀오며 이미 들렀던 곳이지만, 고등학교 동창 친구들과 정해진 여행지가 또 동해 바다여서 한 번 더 방문하게 되었다. 사실 지난번 강원도 여행은 '산'에 좀 더 키워드가 맞춰져 있었다면, 이번에는 그냥 바다. 그런고로 불만 없는 바다. 어차피 이 조합이면 술이 메인이고 장소는 배경에 불과하다. 4인큐였는데, 안동을 같이 다녀왔던 코잔디가 이번에도 함께했다. 후후, 코잔디 보는 건 모찌롱 다다익선이다.



강원도는 너무 멀어


금요일부터 시작하는 2박 3일 일정이었다. 함께 가는 친구들은 이미 다 취업하고 돈 버는 녀석들이어서 금요일 연차를 냈다더라. 나는 '아직'은 백수니까~ 여행 전날도 한량처럼 문뜨 후배들과 놀며 술을 머리 깨지게 먹었다. 즐거웠다. 쓸데없는 얘기도 너무 많이 한 거 같긴 함. 몇 년 만에 노상 술자리를 한 거 같은데, 집에 돌아와 씻으니 새벽 5시였다. 침대에 누웠다간 버스를 놓칠 것이 분명해서 알람 소리를 최대로 틀고 의자에 앉아서 눈만 붙였다. 어차피 잠은 버스에서 실컷 자면 된다. 대전-속초는 무려 편도 5시간, 사실 잠을 자지 않으면 오히려 더 괴로운 여정이니 말이다.

캬 놀아주어서 고맙습니다 다들

그런데 글을 쓰며 생각할수록, 강원도는 대중교통 접근성이 너무 별로긴 하다. 대전이면 나름 대한민국 중심에 있어서 서울, 광주, 부산 모두 두 시간이면 갈 수 있는데 이건 뭐. 한반도의 등줄기 태백산맥을 넘어야 해서 어쩔 수 없다는 것은 알지만, 대전에서 속초, 강릉으로 직접 갈 수 있는 고속도로 하나 없다는 건 좀 아쉬운 일인 것 같다. 이번에도 경기도 이천, 원주를 거쳐 양양고속도로로 갔던 것 같은데, 지도를 보면 또 엄청 도는 건 아닌 것 같으면서도, 참 길이 길고 지루해서 좀이 쑤셨다. 전라도 사람이 강원도 간다고 생각하면... 와. 일단 서울 경유해서 가야 하지 않을까 싶은데, 차라리 제주도가 더 가깝겠다 싶더라.


속초 시외버스 터미널에 내렸을 때는 이미 점심시간이 훌쩍 지난 시점이었는데, 다른 녀석들도 상황은 비슷할 테니 각자 점심을 간단히 해결하고 숙소에서 보기로 했다. 친구들은 모두 고속버스 터미널에서 내렸으므로. 첫끼는 혼밥을 했다. 그래서 지난번에 아바이순대를 사 먹었던 "장터순대국"으로 곧장 달려가 순대국밥 하나로 해장을 든든히 했다. 와, 여기 국밥도 맛있다. 거의 돼지국밥 수준의 기름진 육수가 빈 속을 달래주었다. 순대는 또 말해 뭐 해. 호불호가 갈릴 수 있는 선지 특유의 냄새도 거의 없는, 깔끔한 순대였다. 최근에 먹은 "충남집" 순대가 식당에서 먹은 게 아니었어서 조금 아쉬웠는데, 머릿속의 순대국밥 랭킹 서열이 흔들리는 순간이었다. 물론 전날의 술자리가 제공한 여운, 그러니까 숙취가 음식 맛을 더 돋보이게 했을 수도 있으니. 섣부른 판단은 금물이다. 뚝배기가 채 다 식기도 전에 국밥을 해치우고, 우리의 숙소로 향했다.

아으 좋다 또 먹고 싶네

숙소는 속초해변에서 걸어서 3분 거리, 방에서 바다가 보이진 않지만 수영을 마치고 맨발로 돌아와도 될 정도의 좋은 위치에 있었다. 가격이 엄청 쌌는데, 아니나 다를까 좀 시설이 낙후되긴 했다. 근데 뭐, 남자들끼리 가는데 뭐 어떤가? 바닥이랑 지붕만 있으면 된다. 소파 하나 탁자 하나도 없는, 그냥 구석에 인원수만큼의 이불과 베개가 쌓여있는 펜션방이었는데, MT온 기분도 나고 약간 20세기 감성이 남아있어서 나는 오히려 좋았다.


방에 도착한 우리는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각자 바닥에 자리를 잡고 누웠다. 흔한 20대 후반의 여행 풍경. 첫날 저녁은 횟집에서 회를 먹고 시장을 들러 안주와 술을 사 와 방에서 먹는 것이 계획이었다. (이튿날 저녁은 바비큐를 하기로 했다.) 그러니 저녁까지는 쉬어야지. 8월 끝이 무색하게 여전히 밖이 몹시 더웠다. 위험위험. 휴대폰 충전도 하고, 체력 충전도 하고. 저녁 먹을 횟집을 검색하며 한 시간 정도 쉬었던 것 같다.



회사원들과 회 사 원없이 먹기


속초관광시장에서 회를 먹을까 하다가, 내가 지난번 방문 때 잠깐 사전답사 했던 바로는 거의 인당 5만 원 꼴로 가격이 형성되어 있었던 것이 기억이 났다. 여름이기도 하고, 사실 '맛있는 회'를 먹는다기 보다는 회를 먹는다는 '감성'을 먹는 것이 더 중요했기 때문에 좀 더 싸게 먹을 수 있는 방법을 고민했다. 그러다가 아래 대포항 수산시장 쪽에도 초장집이 여럿 있는 것 같길래 그쪽으로 가보기로 했다.


숙소에서 조금 떨어져 있었지만 바다구경도 할 겸 해안선을 따라 걷기로 했다. 외옹치라는 특이한 지명의 곶을 둘러 '바다향기로'라는 산책로가 조성되어 있었는데, 꼭 부산 해운대의 동백섬과 비슷한 구조로 되어있었다. 크기를 따지면 훨씬 작지만, 바다로 튀어나온 언덕에 대기업 리조트가 있는 것까지 비슷했다. 외옹치. 외옹치. 꼭 매미 울음소리 같다고 생각했다. <- 뭐 이런 시덥잖은 말을 하면서 걸으니까 땀은 많이 났지만 즐거웠다.


대포항은 외옹치와 반대로 둥글게 바다를 품은 만(灣)의 형태다. 완벽한 원형인 것을 보니 여기 언젠가 운석이 박힌 게 아닌 이상 인공적으로 이렇게 만든 듯하다. 시장 한 바퀴를 둘러보는데 딱히 특이한 횟감이 있다거나, 뭐 엄청 가성비가 좋다거나 하진 않았다. 그래도 조금 일찍 온 탓일까 사람이 덜 붐비기도 했고, 그런 까닭으로 호객 행위도 좀 많이 당했다.


수산시장의 호객 행위를 싫어하는 사람들도 있는데 나는 그렇지는 않다. 강매를 당해버린다거나 하면 좀 많이 곤란하겠지만, 그냥 잘 맞춰주겠다며 서비스를 얹어주는 모습을 구경하는 건 꽤 재밌다. 조금 들어주다가도 마음 굳게 거절하고 발길 옮기는 법도 알고, '아까 저 집에서는 이 가격에 더 좋은 물건 주던데요. 수산물 몇 개 더 얹어주시면 안 돼요?' 하며 흥정하는 법도 안다. (알아가는 중이다.) 어차피 다 먹고살자고 하는 일. 상인 분들과 말상대도 해드리고, 이것저것 물어보며 넉살도 부리는 연습이 나는 좀 즐거운 것 같다. 아직 경험이 많지 않아서 멋 모르고 비싼 값에 싸구려 횟감을 사먹은 적도 몇 번 있겠지만, 그래도 내가 머릿속에 생각했던 금액대 내에서 적당히 만족스러운 구매를 했던 것 같다. 그럼 된 거지...


이번에도 상차림비를 포함해서 8만 원 대에 다양한 생선들을 먹게 해 준다길래 그 집에서 그냥 먹었다. 생선이 크진 않았는데 뭐, 전어도 있고 오징어도 있고. 그래도 인당 3만 원 정도는 생각했는데 이 정도면 거저지,라고 생각했다. 어차피 술 먹는 사람 입장에선 결국 '매운탕'을 먹기 위한 과정에 불과하다. 밑반찬이 잘 나오진 않았는데, 별로 기대는 안 했다. 그래도 나온 회의 양이 꽤 됐고, 나갈 즈음에는 우리가 먹었던 집이 그래도 테이블도 다 차길래 적당히 잘 왔나 싶었다.

넉넉했던 회와, 신난 아재 청년 원준이

밥 먹으면서는 우리 인생 선배님들에게 회사 생활 썰을 많이 들었다. 잔디도 그렇고, 모인 친구들 모두 학부를 졸업하고 바로 사회생활을 시작한 녀석들인데, 듣자 하니 아직도 각자의 부서에서 막내 포지션이었다. 그것도 동료 선배들과 나이차가 꽤 나는, 귀염둥이 막둥이 포지션. 군대를 다녀왔다 쳐도 회사생활 2,3년씩은 했을 텐데. 도대체 우리 근년배들은 다 어디 있는 거지? 코로나의 여파가 남아있던 시절, 취업난을 뚫고 자리를 잡은 녀석들이 대단한 것일 수도. 이야기가 좋은 안주였는지 회가 줄어드는 속도가 나쁘지 않았다. 넷 다 술을 잘 먹는 편이라 안주 킬러가 하나도 없었던 것도 컸다.


계산할 때 보니 술값이 횟값보다 더 많이 나왔더라. 회... 가성비 안주였네? 내가 전날 과음한 탓에 초반에 맥주로 입가심하느라 그랬을 수도 있다. 그래도 강원도라고 "동해 소주"를 일반 소주 가격에 팔더라. 일반적인 희석식 소주가 아니라 증류식 소주를 도수 맞춰 내놓은 물건이다. 알코올취가 거의 나지 않고, 증류식 소주에서 나는 바나나향 같은 단맛을 저렴한 가격에서 부드럽게 즐길 수 있어 좋아하는 소주다. 택배 주문도 되어서 대전에서도 이미 몇 차례 재구매했던 녀석인데, 현지에서 보니 반가웠다.

요놈입니다. 아주 물건입니다.

분명 그래도 날이 밝을 때 식당을 들어왔던 것 같은데, 식사를 마치고 나오니 하늘이 온통 까맸다. 이미 얼큰하게 취했지만, 또 회도 원 없이 먹었지만 배가 부를 정도는 아니었으니. 택시를 잡아 속초관광시장으로 향했다.




사실 그 후의 일이 뭔가 글로 남길 정도의 기억으로 남아있진 않다. 또 속초에 왔으니 "만석닭강정"포장해주고, 어느덧 2회 차 검증을 마친 "장터순대국"에 데려가 아바이 순대와 오징어순대를 하나씩 샀다. 속초 로컬 막걸리도 편의점에서 사서 집으로 돌아왔다. (지난번에 먹었던 봉평 막걸리가 진짜 괜찮았는데, 이번엔 찾을 수 없었다.)


이불을 대충 가장자리로 치워두고, 가운데 음식을 깔아놓고 둘러앉아서 맛있게 또 음식을 먹었다. 술을 더 먹었다기보다는 그냥 안주를 맛있게 먹은 것 같다. 회가 담백하긴 한데, 또 이럴 때는 기름진 게 땡기지 응응. 닭강정은 사실 내가 평소 많이 먹는 음식은 아니어서 엄청 특별한지는 모르겠는데, 그냥 우리가 딱 상상하고 기대하는 '닭강정' 맛이었다. (근데 그걸 못하는 집이 많기도 해.) 사실 닭강정은 식은 뒤 먹는게 더 맛있다던데, 잘 모르겠음. 튀김은 따뜻할 때가 제맛 아닌가. 그래도 식어야 '강정'의 정체성은 잘 살아나는 게 맞는 거 같고, 따뜻한 닭강정보다는 그냥 치킨이나 가라아게가 낫다. 아 생각하니 닭강정만의 매력이 있긴 하네요. 그래도 식혀서 먹으라는 게 '실온' 닭강정을 먹으라는 거지 냉장보관 해서 먹는 게 더 맛있는 건 아닌 듯하다. 다음날 먹는데 뱉고 싶었다.


순대는 역시 맛있었다. 오징어순대는 올해 처음 먹어보는 거였는데, 그냥 맛보기로 적당했다. 계란물 입혀서 부치면 뭐든 맛있지 뭐. 좀 비싸긴 했다.

닭강정의 스탠다드, 만석닭강정

밤에 피자를 한 판 또 시켜 먹었던가, 그건 다음날이었던가. 무튼 배부르게 먹고 잠깐 산책 나가, 에메랄드색 바다도 구경하고, 발도 미리 담가보고. 그러다보니 밤이 깊었나. 방학이 끝나가는 슬픔도 내려놓고 흠뻑 기뻤나. 잠에 들었던 건 언제였던가. 그렇게 마지막 여행의 첫 잠이 지나갔다.

모든 끝이 시작되는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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