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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족산 머드 축제 후기

추석 번외편) 대전 계족산 (2회 차)

by 인용구

다들 연휴 잘 보내고 계신가요? 월화수 쉬었는데 목요일도 쉴 수 있다니 놀랍다. 저도 명절을 맞이하여 할머니댁을 다녀왔습니다. 현수막도. 인증샷을. 소심하게 남겼구요.

할아버지... 보고 계십니까?

먹고 눕고 먹고 눕고 반복하며 사육당하다가, 화요일 대전으로 돌아왔습니다. 물론, 수요일에 올려야 할 글은 연휴 내내 전혀 손도 대지 않았습니다. (크악) 그래서 수요일에 사실 방에 틀어박혀 이번 연재의 마지막 여행 글을 올려야 했지만... 일련의 사건이 발생하며 결국 또 하루를 넘기고 말았습니다... 죄송합니다. 그렇지만 그 과정에서 조금 재밌는 썰이 생겼기에, 오늘은 가볍게 그 썰을 풀어보고자 합니다. 말하자면, "박사님은 놀고 싶어" 번외편..!! 생생한 현재 이야기. 박사님은 아직도 놀고 싶어...




화요일은 기념비적인 날이었습니다. 원래라면 문뜨 정모가 있어서 아쉽지 않게 젖을(?) 수 있는 날이지만요. 명절이기도 하고, 시험기간도 있고 해서 한동안 문뜨 정모가 없는 까닭에 "술 없는 화요일"을 맞이하게 되었어요. 이야, 밤 11시쯤에 곰곰이 생각해보니 오늘 한 방울의 알코올도 섭취하지 않은 거예요. 9월 전문연을 시작한 이후로 단 하루도 빠짐없이 규칙적인 음주를 하고 있었는데, (...그렇게 됐습니다.) 콤보가 드디어 깨지는가 싶더라고요. 아마 최장기 일간 음주 기록 아닐까, 싶긴 한데 기억하기로 지난번에 기록을 셀 때는 맥주를 세지 않고 카운트 했으니. (연속 28일 소주 섭취 ㄷㄷ) 그때보다는 조금은 나은 사람 아닐까 싶습니다.


그래서 화요일, 음주를 참았습니다. 미련하게 좋지도 않은 기록 연장해보겠다고 맥주 한 캔 까느니, 후련하게 놓아주었습니다. (사실 명절 직후 측정한 몸무게가 저에게 큰 충격을 주었습니다.) 기분이 좋더라고요. 술을 안 먹고 자서 그런가, 오랜만에 수면점수도 50점을 넘겼습니다.


내친김에 건강하게 수요일을 맞이하고자 계족산을 또 다녀오기로 했어요. 지난번에 계족산성도, 황톳길도 너무 좋은 기억으로 남아있어서 한 번 다시 방문해보고 싶었습니다. 아침까지 비가 오다가, 10시쯤 되니 그쳤길래 출발했습니다. 비 내린 직후의 황톳길은 좀 더 부드럽고 기분 좋지 않을까? 큰 기대를 품고 자전거에 올랐습니다.


지난번 계족산 방문 때 입산한 지점과 내려온 지점이 달라서 자전거를 챙기러 배차간격 긴 버스를 타야했는데, 이번에는 아예 처음부터 장동산림욕장으로 자전거를 타고 가기로 했습니다. 지도에서는 분명 7Km 정도 거리라고 했는데, 직접 가니까 정말 힘들었구요... (1시간 걸렸습니다.) 갈 때 길이 횡단보도도 많고, 가파른 오르막도 많아서 되게 별로다 싶어서 돌아오는 길은 다른 코스*를 택했는데- 그건 상대적으로 괜찮았습니다. 산 넘고(1회) 물 건너(1회)만 하면 되더라고요. (얘도 개빡셈)


*고백하면 그 코스도 제대로 가진 못했습니다... 물 건너(1회) <- 얘가 징검다리 건너는 거였는데, 비 온 직후라 다리가 끊겨있었어요. 우회하는 길이 지독했습니다.

7킬로라며!!

그래도 계족산에 도착한 저는 씩씩하게 산을 오르기 시작했습니다. 이번에는 물도 두 개 꽝꽝 얼려갔고요, 김밥도 한 줄 챙겼습니다. 이미 한 번 다녀왔던 코스라 좀 수월했습니다. 기억하던 모습 그대로였고요, 비 온 뒤라 그런지 공기도 좋고, 지난번 등산보다는 날도 훨씬 선선해져서 땀도 거의 흘리지 않고 걸었습니다. 얼린 물을 주무르며 걸어서 좀 시원했던 것 같기도. 뭔가 체온으로 얼음을 녹이는 것도 칼로리 소모에 도움이 되지 않을까? 같은 생각을 하며 걸었습니다. 과학적으로 근거 없는 이야기입니다.


오르는 동안 "9와 숫자들" 앨범을 처음부터 최신 것까지 순서대로 들었습니다. 비밀인데, 이 중에 한 곡을 나중에 제 결혼식 때 부르고 싶어요. 어떤 곡인지 맞추시는 분께 청혼하겠습니다. (?) 농담입니다. 계족산성에 도착하니 또 한 시간이 지나있었습니다. 공복 유산소 두 시간, 좋네요. 마무리 운동이 또 두 시간인 게 문제지만... 집은 가야 하니까요.

김밥 맛집 계족산성

경치가 좋은 곳에서 김밥을 먹으니 꿀맛입니다. 저 멀리 보이는 대청호도 참 시원하고요, 어느새 구름도 많이 걷혀서 날씨가 쾌청하니 좋았습니다. 다만 저녁 약속이 있어 오래 있지는 못했습니다.


아, 이건 꿀팁인데 - 아까 말했어야 하는데 말을 못 했네. 산을 올라갈 때는 굳이 맨발로 황톳길을 걸어 올라갈 필요가 없습니다. 그냥 신발을 신고 등산하는 것을 추천합니다. 왜냐하면 이게 황톳길 둘레길이 있고, 또 산성으로 오르기 위해서 700m 정도 계단과 가파른 산행이 있는데 그건 맨발로 하기 어렵거든요. 특히 요즘 같은 가을은 이제, 밤송이가 땅에 떨어져 있기도 하잖아요? 제법 많았습니다. 굳이 더 부연하지 않겠습니다.


그래서 이제 내려오는 길. 황톳길 코스로 내려오자마자 저는 신발과 양말을 벗었습니다. 김밥을 넣어온 봉투에 신발을 넣으려 했는데, 제 발 사이즈가 290인 탓에 하나밖에 들어가지 않았습니다. 쳇, 그냥 지난번처럼 한 손에 들고 걷기 시작했습니다.


비 온 뒤의 황톳길은 어땠냐구요? 맨발이 땅에 닿자마자 느낀 것은 일단, 너무 차가웠습니다. 그리고 엄청 미끄럽더군요. 황톳길인지 빙판길인지 구분이 안 될 정도였습니다. 어쩐지 맨발 걷기 하는 사람이 잘 보이지 않는 이유가 있었습니다. 하시는 분들도 다 지팡이를 하나씩 들고 다니시더라구요. 하지만 저는 동천스케이트장 스피드 스케이팅 유소년부 출신. 넘어질 것 같을 때마다 팔을 휘적이며 균형을 잡는 데 성공했습니다. 고도의 집중력을 요구하는 스킬입니다. 역시 황톳길, '걷는 행위'를 의식하게 한다는 지난번의 감회가 다시 떠오르는 순간이었습니다. 훨씬 더 천천히, 조심조심 걸으며 저는 무사히 산길을 내려오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제목에서 예상하셨듯이, 스포일러를 하자면 결국 저는 계족산의 황토를 온몸으로 느끼게 됩니다.


발단은 내려오는 길에 보았던 한 쌍의 커플이었습니다. 여자는 맨발로 미끄러운 황톳길을 걷고 있는데, 남자는 비교적 단단한 일반 길을 또 맨발로 걸으며 여자의 손을 잡아주더군요. 일반 길은 말 그대로 그냥 산길입니다. 돌도 많고, 밤송이도 군데군데 떨어져 있어요. (보면 피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한 사람이 넘어지지 않도록, 다른 사람이 거친 길을 걸으며 지탱해주는 것이었죠. 멋진 청년. 진정한 신사. 희생정신을 발휘하는 남자에게 여자는 "괜찮아? 발 안 아파?"라고 묻고, 남자는 "괜찮아. 조심해," 하는 아름다운 모습에, 저는 참을 수 없는 질투를. 느끼고 말았습니다... 부 럽 다!


이거 솔로는 서러워서 살겠나. 그들을 빠르게 앞질러 가고 싶었지만 서둘렀다가 흙탕물에 엉덩방아라도 찧으면 그건 또 무슨 망신일까 싶어 참았습니다. 대신 벤치에 앉아 그들이 멀어지기를 기다렸습니다. 그 상황에 대한 메모를 남기면서요. ㅋㅋ '이거 글감이 되겠는데,'라고 생각한 것도 그 시점이었습니다.


커플이 시야에서 사라진 후로도 내려오는 길은 순탄치 않았습니다. 가만히 있어도 앞으로 미끄러지는 게, 꼭 빨리 가버리라고 산이 떠미는 것 같아 섭섭했구요. 그렇다고 정말 스케이트 타듯 미끄러지면 중간중간 돌부리가 발바닥에 걸려 끔찍한 고통을 야기했습니다. 경사가 심한 곳은 진짜 좀... 심했습니다. 사실상 미끄럼틀. 하필이면 그런 곳은 꼭 황톳길이 아닌 길은 자갈이 깔려 있었어요. 진짜 겨울에 땅이 얼면 자갈이 더 큰 마찰력을 제공할 테니 그렇겠구나, 생각은 했습니다만 야속했어요.

지옥의 양자택일. 자갈길이냐 머드슬라이드냐..

하지만 저는 이미 곰배령을 다녀온 인간. 비 온 뒤 진흙이 미끄러운 건 그것이 진흙이기 때문입니다. 자갈이 발을 아프게 하는 건 그것이 자갈이기 때문이구요. 자연이 자연스러운 것에 화를 낼 필요는 없지요. 그 교훈을 생각해서일까 짜증이 나진 않았습니다. 발이 아프지만 꾹 참고 걸음을 이어갔습니다. 조심조심 걸으면서도 성큼성큼 걸었습니다. 발바닥 강화훈련이라고 생각하기로 했어요. 후일담인데, 발을 씻고 살펴보니 조금 기스가 나긴 했더라구요. 그래도 피가 심하게 나진 않아서 이게 황토의 효능인가? 생각했습니다. 농담이고 좀 아프긴 했는데, 생명의 신비 - 이것도 며칠 지나면 없었던 일처럼 낫습니다. 대충 신발은 얼마나 위대한 발명인가, 새삼 실감하는 순간이었네요.


다시 돌아와서. 제가 꽈당한 순간을 이야기해야겠습니다. 그러니까 음, 발단은 커플이었다고 했지만, 그냥 그 괘씸하고도 훈훈한 광경을 공유하고 싶었던 것이고. 사실 그냥 제 부주의 탓입니다. 사람의 마음 중에 가장 무서운 것이 첫째로는 양심, 둘째는 방심입니다. 거의 출발지점에 다 왔을 즈음 저는 발 씻는 곳을 발견하게 됩니다. 올라오면서 보았던 곳들 중 유일하게 계곡물에 직접 발을 씻을 수 있는 지점이어서 '참 시원하겠다,' 생각하며 기억해두었던 곳이었어요. 그것으로 내려가는 길이, 당연하게도 미끄러웠습니다. 물 젖은 발로 사람들이 돌아다닌 탓에 더 미끄러웠을 텐데 그것을 간과하고 말았습니다.


그대로 계단에서 넘어졌습니다. 하지만 저는 낙법을 구사할 수 있는 카이스트 유도부 출신. 은 아니지만 전자기 유도를 이해하고 있는 공학박사입니다. 그대로 계단턱으로 "폼롤러" 해버렸는데요. 고통보다도 주변에서 놀라고 걱정해주시는 등산객 분들 때문덕분에 금방 일어났습니다. 와, 오늘 쪽은 매진입니다. 완판이에요. 발 씻는 곳에 앉아서 다리며 팔이며 고양이 세수하 듯 온몸의 황토를 씻어냈습니다. 계족산 머드축제. ㅅ발.

으아아아 미안해

갠지스 강의 소년처럼, 남들이 발 씻는 흙탕물에서 거의 샤워를 하면서. 고백하면 사실 저는 좀 즐거웠습니다. 히죽히죽 웃음이 계속 나왔습니다. 글 쓰는 사람들이 진짜 미친놈들이라니까? 에피소드 하나 생겼다. 폼롤러, 계족산 머드축제. 이런 표현들을 생각하니까 너무 웃긴 거예요. 빨리 집으로 돌아가서 글이나 쓰고 싶다, 생각했습니다. 여러분들 위해서 제가 슬랩스틱까지 합니다. 감사하십시오.


산 초입에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흙으로 엉망진창이 된 제 뒷모습이 그들에게 어떤 경각심을 불러일으키길 바랐습니다. 검사에게 등의 상처는 수치이지만, 저는 박사니까요. 모두 제 몰골을 보고 교훈을 얻길 바랐습니다. 안전하게 다녀오세요 여러분.

모두.. 고생이 많습니다..

무튼 그렇게. 집에서 출발해서 집으로 도착하기까지 딱 다섯 시간 걸리더이다. 나쁘지 않죠? 주말마다 해도 좋을 것 같습니다. 집 앞 편의점에서 마실 음료를 사는데, 제 꼬라지를 본 편의점 사장님이 "벌초 다녀오셨어요?'" 하고 물어보시더군요. 그게 또 너무 웃겨서 감사(?)를 드렸습니다.

집에 돌아와서 확인한 뒷모습. "벌초 다녀오셨어요?"가 ㄹㅇ 개웃김ㅋㅋ

집에 오자마자 글을 쓰려고 했는데, 저녁 약속도 하고 늦은 시간까지 또 술을 먹은 탓에 결국 오늘에야 글을 올리고 맙니다. 금주 콤보는 쌓기가 어렵네요. 모쪼록 여러분도 남은 연휴 잘 마무리하시길 바랍니다. 금요일 출근하시는 분들 있으실까요? 제가 함께하겠습니다. 이상!


- 와 글 진짜 대충 쓴다. 퇴고도 안 하고 올릴 겁니다. 수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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