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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들과 함께한 서울 나들이

8월 넷째 주 - 서울 (2)

by 인용구

필동면옥에서 식사를 마친 우리는 걷기 시작했다. 사실 내가 세워둔 계획은 남산을 오르고 냉면을 먹는 데까지였다. 그렇다고 오랜만에 만난 친구들과 곧바로 헤어질 수는 없는 노릇, 밤에는 당연히 술 한잔 곁들이며 마무리하리라 짐작했지만, 그 사이의 시간은 온전히 즉흥의 영역이었다. 그래도 남자란 배회와 방황이 자연스러운 족속, "우리 그래서 지금 어디 가고 있는 거야?"라는 말만 나오지 않으면 우리는 어디든 갈 수 있었다.



올드퉨티, 공존에 대하여


필동면옥을 몇 번 찾으며 그래도 동네에 익숙한 K가 추천해 주는 길이 있었다. 을지로 3가와 4가 사이, 충무로에서 종묘 방향으로 종단하는 루트인데, 진양-신성상가아파트를 가로질러 걸으면 청계상가, 세운전자상가까지 마주칠 수 있었다. 종묘를 가려고 했던 건 아니고, 그냥 일단 걷는 거지 뭐. 육교라고 해야 할까, 옥상이라고 해야 할까. 지상보다 몇 층 높은 거리를 걷는 동안 보았던 풍경이 뭔가 많은 생각을 일으켰다. 백문이 불여일견, 사진 찍기가 취미인 P가 찍은 사진들을 공유한다.

P의 시선. 필름카메라 감성 미쳤다..

아직 남아있는 20세기의 흔적. 그렁거리는 양철 지붕 위에는 꼭 붉은 고무 다라이가 한두 개쯤 올려져 있고, 잘 보면 잽싸게 고양이가 나타났다가 다시 사라진다. 사라져 가는 것들, 시간을 견딘 공간. 시간이 멈춘 것 같은 상가 안을 조심스럽게 들어가 보면 촘촘하게 늘어선 두 평 남짓한 점포들은 여전히 정상 영업 중이다. 내부를 살짝 훔쳐보다가 상인과 눈을 마주친다. 죄지은 사람처럼 고개를 돌린다. 아직도 이곳은 누군가의 삶의 터전, 이런 것들을 내가 감히 사랑한다 말해도 좋을까.

이건 내가 찍었다. 여 씨 아저씨와 무재 씨가 있을 것 같은.

세운상가는 황정은의 <백의 그림자>, <디디의 우산> 같은 작품에도 등장한 공간이어서 조금 더 몰입이 되었다. 몇 차례 재개발 시도가 무마되었을 낮은 건물들, 너머로 보이는 대기업 건설사의 빌딩. 나는 자꾸만 어떤 의미를 부여하고, 헌 것들 사이에서 새로운 감정을 발견하는데. 내 것이 아닌 노스탤지어, 그것이 조금은 무례하다는 부끄러움도 스친다. 잠시 지나가는 객(客) 주제에, 너무 기웃대고 카메라 셔터를 눌러댄 것은 아닌지. 나는 이곳에 어울리는 사람이 아닌 것 같다. 그 말의 폭력성에 대해 잠시 생각해 보고는, 조금 더 생각한다. 그래서 나와 어울리는 곳은 도대체 어디에?

선반 위에 올라가도록

혼자였으면 알 수 없는 정념에 빠져 굉장히 시무룩해졌을 수도 있겠다. 꼴값ㅋㅋ 그러나 친구들과 함께였기에 센치해지는 순간들을 잘 넘길 수 있었다. '오, 우리 집에도 이렇게 생긴 카세트 플레이어 있었는데,' '야 이거 웃긴다. 너 여기 서 봐,' 이런 시시콜콜한 이야기와 농담을 주고받으며 퍽 즐겁게 걸었다.


서울의 심장부에 이런 공간이 존재한다는 것이 좀 문학적이라고 할까, 공간의 존재―공존. 높은 빌딩 숲에서 얼마 떨어져 있지 않은 곳에 남루한 판자촌이 공존하는 것이 서울의 매력. 그리움과 반가움, 한편으로는 어떤 진절머리남과 부끄러움도 공존하는 순간. 그때의 마음을 잘 다듬으면 어떤 시가 될 수 있지 않을까. 그나저나 이곳 땅값은 얼마나 하려나. 시인과 속물, 공존.


2025년 맞습니다.

비슷한 감정을 청계천 따라 DDP(동대문 디지털 플라자)로 가는 길에 다시 느낄 수 있었다. 내년이면 볼 수 없게 될 보신탕 골목. 평화시장을 가로지르면서는 청년 전태일을 생각하고. 빨간 꽃, 노란 꽃, 꽃밭 가득 피어도... 미싱은 잘도 도네 돌아가네... 민중가요 "사계"를 흥얼거리다가 또 얼굴이 붉어지고 -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나는 왜 이리도 이런 것들을 좋아하는가, 또 왜 이토록 스스로에게 모멸감을 부여하는가. 사회를 지탱하는 소시민의 터전, 재래시장과 노포들을 나는 사랑한다. 살아남았다는 것은 강하다는 증거. 오랜 시간 하나의 업종에서 같은 일을 반복한 분들을 존경한다. 장인의 손맛, 감성만 제대로면 위생은 뒷전이어도 그만이다. 영포티를 뛰어넘는 올드퉨티(old twenty)- 진짜 아저씨;; 그런데 이런 내 모습이 가끔은 기만적으로 느껴지기도 하는 것이다. 혹시 나는 언더도그마에 잠식된 것은 아닌가. 가난 포르노를 즐기는 부르주아, 낙후된 공간 속 외면받는 삶을 구경거리로 전락시키며 감성으로 소비하는 불경한 치는 아니던가.


그러니까 나는 DDP에서 에어컨 바람을 맞으며 문화전시를 향유하고(물론 무료전시만 골라서 봤지만), 저녁을 먹으러 한남동으로 이동하는 스스로의 모습에서 조금 아이러니를 느꼈던 것 같아. 아아, 하나만 골라라 용구야. 아저씨 감성 못 버리겠어? 아직도 친구들과 빈대떡에 장수 막걸리, 소주에 육회탕탕이 먹고 싶어?! 광장시장 가서 바가지요금 한 번 맞으면 정신이 확 들 텐데...



3.5시간 기다려서 감자탕 먹기


동대문이 가까우니까 장충동에서 족발이나 먹을까? 신당동에서 떡볶이는 어때? 을지로에 기가 막히는 가맥집이 있다는데, 한 번 찾아가 볼까? 이것저것 던져보았지만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너 진짜 외국인 관광객 같아," 라는 대전 촌놈 무시 발언에 입 다물고, 그냥 우리 서울 분들이 안내하는 맛집이나 가보기로 했다. 그래서 가기로 한 곳은 "한남동 감자탕"이라는 집이었다.


한남동, 나에게는 별로 인식이 좋은 지역은 아니다. 대기업 총수들이 사는 대표적인 부촌 아니던가? 청담동, 한남동 이런 동네는 왠지 걷는 것도 조심스럽고 죄송스럽다. 미친 부르주아 혐오;; 나는 그런 곳에 어울리는 사람은 아닌 것 같다. (그래서. 나와. 어울리는. 곳은. 도대체 어디에?!?!) 특히 한남동은 전 대통령 윤 모씨가 살던 동네 아니던가. 연초 본인의 사저를 요새로 둔갑하고 '석열산성'에 숨어 극성 지지자들을 부추기던 모습을 기억하면 치가 떨렸다.


버스를 탔는데, 저녁시간이라 그랬는지 차가 많이 막혔다. 아니, 꼭 시간대 때문만은 아니었나 보다. 기사님이 울화 섞인 목소리로 혼자 욕을 너무 심하게 하시는데, 그 소리를 듣고 앞을 보니 조금은 이해가 됐다.


차선 하나를 점유한 끝없는 경찰 버스의 행렬

"저 빌어먹을 놈들, 허구한 날 시위질. 끝이 없어 끝이. 저 구급차는 왜 또 저기 서있고 *랄이야..."

그러니까, 이걸 이 구간 지날 때마다 매일 보신 건가요? 올해 내내? 고생이... 많으셨네요... 그래도 욕은 안 됩니다 기사님.


한남동 하면 음식이 좀 비싸지 않을까, 걱정을 했는데 정작 걱정을 해야 하는 것은 웨이팅이었다. 여섯 시가 조금 넘은 시간에 갔는데 벌써 대기가 96팀이었다. 아아, 감자탕을 먹기 위해 몇 시간까지 기다릴 수 있습니까? 저는 3시간 반 넘게 기다려봤습니다. 구라 아님.

한남동.png 10시가 넘어서 먹는 저녁(?)

대기를 하는 동안 어디 술집에서 2차를 미리 하자, 그래 그러자 해서 간 술집이 비쌌다. 소주 맥주를 6천 원씩 받았다. 안주 가격은 생각하고 싶지 않다. 그래도 뒤늦게 합류한 C가 엄청나게 재미있는 썰을 들고 와서 흥미진진하게 듣다 보니 세 시간을 버틸 수 있었다. 솔직히 얼마든지 저녁 메뉴 변경이 가능했으나, 이쯤 되면 좀 오기가 생기잖아. 앞 순번 사람들도 좀 포기하고 나가떨어질 줄 알았는데 정직하게 줄어드는 카운트다운을 보며 이건 내가 꼭 맛봐야겠다 싶었다.


그렇게 정말로 10시가 다 되어서야 입장한 한남동 감자탕. 벽 하나를 유명인들 싸인이 가득 채웠는데, 진짜로 내가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근데 엄청 맛집이어서, 라기보단 오히려 이 동네가 연예인들한테는 접근성이 좋은 편 아니었을까... 라고 생각하기도 했다. 감자탕보다 뼈찜에 대한 후기가 많기에 우리도 뼈찜을 하나 시켰다. 맛없으면 여기 오자고 한 사람을 굉장히 원망했을 것 같은데, 흠~ 맛있었다 인정. 맵고 단 양념이 부드러운 고기 안까지 정말 잘 배어 있었다. 술집에서 3시간 동안 버티느라 정말 배부르게 먹었는데, 맛있어서 중 자 하나를 더 추가해서 먹었다.


그런데 이것이 3시간을 기다릴 만큼의 맛이냐, 하면 그건 아니고. 그냥 이 정도 기다렸으면 맛있게 먹어주는 것이 예의, 웨이팅을 하면서 높아진 기대에 전혀 부응하지 못하는 맛은 아니었기에 너그럽게 봐줄 수 있는 수준이었다. 기다린 시간이 아까워 가족에게도 맛 보여드리고 싶어 큰 거 하나를 또 포장해 왔다. 웨이팅 없고 집 근처에 있으면 자주 갈 것 같긴 함.

외할머니 댁 근처에도 직영 분점이 하나 생긴 것 같던데 거기서 또 먹어볼까.


서울 좋네유, 사람도 많구. 저녁도 막차 시간 생각하며 헐레벌떡 먹었는데 서울은 심야 버스도 많고 해서 집 가는 데에는 무리가 없었다. 오랜만의 서울 나들이, 고등학교 동창 친구들과 모처럼 만나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K, P, C, R, L 모두 고마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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