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나는 이 글을 서울의 힙한 사람들이 모두 모여 있는 듯한 성수에 위치한 ‘회사’에서 쓰고 있다. 회사라고 쓰고 보니 조금 어색한 기분이 든다. ‘회사’도 맞고 이곳에서 ‘일’을 하지만 여렸을 때부터 생각하던 전형적인 그 모습은 아니었다. 나의 젊은 날에 지대한 영향을 주고 있다. 특히 올해는 거의 전부라고 볼 수도 있을 만큼.
2022년 2월에 내가 살고 있던 공간은 보증금 300만 원 언저리의 원룸(이라고 쓰고 고시원이라고 이해하면 편하다)뿐이었다. 그곳에서 나는 웹프론트엔드 개발자가 되겠다며, ‘자바스크립트 딥다이브’라는 도마뱀이 표지로 나온 책과 매일 씨름 중이었다. 나름 학교에서 자료구조, 컴퓨터의 구조 등 컴퓨터 공학 수업도 듣고 있었다. (공대 수업을 들이며, B0가 그렇게 받기 힘든 학점이라는 것을 나는 그때 알았다. 상대평가는 상대적으로 감사한 제도였다.) 도서관에서 나는 코드를 외우기에 바빴고 그렇게 바쁨을 지우개 삼아서 현실의 어둠을 지우려 했다.
그때 느꼈다. 사람의 마음은 뇌와 달리 무한하지 않다. 마치 하이브리드처럼 일정 속력 밑으로는 재생에너지처럼 지속가능하고 선순환이 이어진다. 그러나 임계점을 지나면 화석연료가 되어 스스로를 태우기 시작하고 서서히 고갈되며 안 좋은 물질들을 배출하기 시작한다. 돌아가도 좋으니, 급하더라도 스스로를 '풀 악셀' 밟지 말자. 그러나 사고 난다.
물론, 스무 살 때에 비하면 현저히 나은 삶을 살아가고 있었다. 고시원이기는 했지만 반지하는 아니었고 사장님이라고 부르는 집주인에 따르면 ‘고시원치고는’ 별도로 화장실도 있고 큰 평수였다. 나름 지난해에 인턴도 하고 주식도 상승장 덕분에 어부지리로 성공해 돈 걱정은 크게 없었다. 그러나 매일 코딩을 하면서 까만 화면 안에 커서가 아닌 갇혀 있는 느낌이 들었다. 로그인 버튼 하나에도 수십 줄의 코드가 들어갔다. 숨이 턱 막혔다. 커서처럼 삶이 깜빡깜빡거릴 때 갑자기 이곳의 채용공고를 보게 되었다.
그 채용 공고를 받았을 때 나는 심각하게 슬럼프를 겪고 있었다.
2020년, 1년간 소셜섹터라고 불리는 곳에서 인턴과 프로젝트를 하며, ‘보람’찬 삶을 살았다. 일을 하며 정말 많이 울고 웃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내가 서울에서 독립할 수 있을까?’라는 생각이 계속 들었다. 그렇게 소셕섹터는 학교로 돌아올 2월, 한강에서 바라본 달처럼 따뜻하고 수수하게 아름다웠지만 빳빳하게 불어오는 차가운 바람 때문에 오래 바라보지 못했다. 좁은 내 방은 우울의 반사광을 5평쯤 더해주었다. ‘이곳을 벗어날 수 없을 것 같다’라는 생각이 나의 긍정을 좀먹고 있었다.
그렇게 2021년, 소셜섹터에서 전향(내 주위의 친구들은 의외였다고 한다)하고 코딩을 시작했다. 처음에는 화면에 글자를 입력하면 무언가 만들어지는 것이 재밌었다. 그러나 하면 할수록 이것을 내가 잘할 수는 없다는 것이 여실히 느껴졌다.
소싯적 문학에 발을 담그며, ‘재능’이 있는지 여부를 깨닫는 방법을 나름 알게 되었다. 국내에서 가장 잘한다는 사람들의 작품, 서비스, 운동 등 그 무언가를 보았을 때 정말 드물게 다음과 같은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어? 저거 내가 조금만 해보면 될 것 같은데?’ 그렇게 무관했던 나의 경험이나 스토리가 큐브가 맞춰지듯 차자작 소리를 내며 맞춰지는 순간이 있다. 뒤이어 밤을 새워 도안을 현실화하는 당신은 높은 확률로 재능이 있는 편이다.
그렇기에 재능을 ‘원피스’처럼 찾기 어렵다고만 생각하지 말았으면 한다. 재능을 찾는 데 필요한 도구는 망원경이 아닌 돋보기이며, 단련하는데 필요한 것이 망원경이다. 그러나 나는 이를 반대로 생각해왔다. 재능은 남루해 보이더라도 당신이 하고 있는 일 중에 분명 존재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보통 나는 에너지를 많이 들이지 않는데 주위에서 의외의 반응을 보이는 그것을 세밀하게 들여다보면 찾을 수 있다. 재능을 길들이고 날을 벼리는 동안에는 고통과 미숙함을 돋보기로 보지 말고 성찰하며 망원경으로 멀리 내다봐야 한다.
다시 돌아가서, 코딩은 나의 재능론(?)에 따르면 완벽하게 부적합했다. 노력은 엄청나게 하지만 결과물은 세상 초라했다. 멘토인 시니어 분의 코드를 보면 감탄스럽기만 했다. 어느새 창의성과 나의 것은 사라지고 누군가의 것을 외우기만 하고 있었다. ‘이럴 거면, 다시 고시를 보지’라는 생각이 스쳤을 때 1년의 시간이 아까웠으나 어쩔 수 없이 깃허브와 프로그래밍의 바깥으로 등 떠밀리듯 나갈 수밖에 없었다.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슬럼프를 겪었다. 책을 펼치기도 싫었고, 유튜브 보는 것마저 싫었다. 명상이 좋다고 하여 시도해봤다. “생각은 내가 아닙니다. 부정적인 생각이 들더라도 자연스럽게 흘려보내세요” 생각이 내가 아니라니! 그때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일이 생각을 하지 않는 일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건강해진 요즘도 그렇지만 나는 무언가를 항상 생각하고 있다. (쉬어도 쉬어야 한다는 생각을 하며 쉬고 있을 것이다)
나는 사회적 통념상 쉴 수 없는 5학년 1학기 대학생이었다. 빨리 쉬고, 빨리 마음을 다잡고 이력서를 써야 했다. 그런데 도무지 어디로 가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했다. 방학 때 일을 안 해본 적이 없기에 이력에 쓸 경험은 많고 많았지만 대부분 운영요원, 통역에 그쳤고 정량적인 ‘스펙’은 처참했다. 특히나 학점은 무리하게 수강했던 컴퓨터공학 수업이 큰 역할을 해주었다.
그때 우연하게도 인스타그램에서 이곳의 채용공고를 봤다. 극적인 느낌을 지우기 위해서, 사실 여러 곳을 쓰고 있었다. 근데 아직 졸업을 하지 못해서 어딘가를 적극적으로 지원하기는 애매한 포지션이다. 그러나 학교에 돌아가기는 싫었다. 어느 정도 마음을 추스르고 생각을 정리하기 위해서 바다로 떠났을 때, 파도 위로 그리운 얼굴과 순간들이 떠밀려왔다. ‘그래, 내가 소셜섹터에서 일하면서도 지속가능한 삶을 살 수 있을지 스스로가 프로토타입이 되어보자’는 무모한 결심을 하며, 돌아오는 지하철에서 바로 이곳의 지원서를 써내려 갔다.
컴백은 예기치 않게 이뤄졌다.
이곳에 지원서를 썼을 때 2주 넘게 답장이 오지 않았다.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아직 졸업도 하지 않았고 나는 소셜섹터에는 몸담았으나 이곳의 세부 직무와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다. “소셜섹터라면 불합격이라도 메일을 보내줘야 하는 거 아니야”라며 푸념을 하며 학교 운동장 구석에서 친구와 빠맥(빠른 맥주)을 하던 차에 면접을 보자는 메일이 왔다. 술에서 깨어 일필휘지로 답장을 써 내려갔고 정신없이 면접을 봤다.
처음인데 꼭 돌아온 것만 같은 느낌으로, 마치 제주도 공항에 오듯 이곳에 왔다. 긴장은 되지만 낯설지는 않은, 후드티와 파타고니아 맨투맨이 가득한 이곳에 ‘풀 정장’과 구두를 신고서, ‘보람’이라는 익숙한 별명으로 낯선 이곳에 불시착(?)했다. 아직도 미완의 이야기이지만 그 후에 나는 ‘뜻밖의 여장’이라고 불렀던 온갖 고난과 행복과 이야기를 전혀 알지 못한 채 나는 노트북을 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