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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여행기 #2 리버풀 경기 직관

The Journey is the reward.

by 변민욱

'오늘이다!' 생각하며 눈을 떴다. 이 여행의 목적이자, 스무 살이 되며 막연히 꾸었던 꿈을 이루는 스물 아홉의 순간. 오늘 아침에는 그래도 리버풀을 둘러볼까 생각하며 밖을 내다 봤는데 엄청나게 짙은 안개가 껴있었다. 바깥에 나가보니 바로 다음 블록의 집도 안 보이는 상황이었다. 제주도 한라산 꼭대기에서나 봤을 만한 안개였다. 간단히 주변 편의점에서 먹을 것을 사고 숙소로 돌아와서 바로 검색했다.


'헤이! 이 정도 날씨에는 야광조끼 입고 다녀야해'


이런 날에 입으려, 영하 12도의 한국에서 왁스가 번질까 비닐에 꽁꽁 싸서 가져온 바버를 입고 있으니, 편의점에서 계산을 하며 아주머니께서 말씀해주셨다. 그도 그럴 것이 영국에서 여행하다보면, 런던에서도 야광조끼를 입고 산책과 조깅, 반려견과 산책하는 모습들을 자주볼 수 있었다. 이 글을 쓰는 지금까지도 내가 본 가장 패셔너블(?)한 동네는 성수다. 오히려 영국은 굉장히 실용적으로 입는다.


'EPL 안개 경기 취소', 'EPL 안개 경기 연기'를 계속해서 검색했고 Chat-GPT에 사례가 있는지도 물어봤다. 다행스럽게도 안개 때문에 취소되거나 연기가 된 적은 극히 드물다고 했다. 그러나 하필 그 날이 오늘일 수도 있지 않은가. 정말 그 정도의 안개였고 '그래도 오후가 되면 안개가 걷힐거야' 생각하면서 잠을 보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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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뵙는 분께, 혹시 오늘 안개 때문에 경기가 취소 될까요? 라고 물었다. 축구가 문화이고 삶의 일부인 주민들.

'경기장 분위기를 먼저 느껴봐야지' 생각하며 3시간 전에 숙소에서 안필드로 길을 나섰다. 주인 아저씨 분이 친절하게 버스를 알려 주셨지만 나는 분위기를 느껴보고 관광도 할 겸 걸어가기로 했다. 참 다행이었던 것 중 하나는 경기 끝나고 수 만 명이 한 꺼 번에 나오는 인파 때문에 버스/우버는 꿈도 꿀 수 없었다. '안필드 카메라 반입'을 검색해보니, 카메라 반입은 안 된다고 해서 짐을 간단히 꾸리고 숙소를 나섰다.


누가 봐도 '오늘 안필드에 직관가요'의 패션으로 숙소를 나섰다. 한 시간 정도 거리였는데, 구석구석 리버풀 팬들의 벽화들이 보일 때마다 심장이 요동쳤다. 마침내 표지판에 'Anfield'가 보이자 We conquered all the europe~'을 흥얼거리면서 가고 있는데, 골목 곳곳에서 느와르 영화처럼 사람들이 하나 둘 나오며 어느새 행렬이 되었다. 인상 깊었던 점은 할아버지-아버지-아들 3대가 같이 가는 모습이었다. 최신 유니폼을 입은 아이와 그의 시대의 유니폼을 입은 아버지와 할아버지가 경기장을 걸어가는 모습을 보니 이런 것이 문화구나 생각이 들었다. 세계적인 메트로폴리탄인 런던이 멀지 않은데도 이들이 로컬을 떠나지 않는 이유 중에 하나가 바로 이러한 문화와 쌓아두었던 추억도 작용하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이번 여행의 레이어로 머리에 쌓아가던 와중, 어느새 안개 속에서 안필드의 모습이 조금씩 드러났다. '와...'할 새도 없이, 응원 스카프를 파는 길거리 상인 분들의 목소리와 사람들이 경기 전부터 응원가를 부르는 소리가 엉키며 도착을 알렸다. '이번 시즌 우승할 예정이니 기념으로 이건 사야지,'하면서 몇 개나 샀다. 아마 여행 중에 가장 손쉽게 지갑이 열린 순간이었을 것이다. '여기서부터 저기까지'라는 유혹을 참고 스카프를 세 개나 샀다.


안필드 내부의 공식 몰은 상당히 위험한 장소였다.구형 유니폼과 굿즈가 간당간당한 여행 예산과 지르고자 하는 마음 사이를 넘실거렸다. 경제적 자유를 다짐하며 눈에만 담아두었다. 이제야 말하는 것이지만 핸드폰 소매치기를 당할까봐 아이폰 구매가 가능한 금액은 항상 남겨두고 여행을 했다. 공식 몰에는 유니폼을 사고 마킹하려는 사람들로 붐볐다. 신기했던 점은 일본에서 오신 팬 분들도 많았는데, 대화해보니 최근에 엔도 선수가 리버풀로 이적하면서 일본 내에서도 리버풀에 대한 관심도가 많이 올라갔다고 한다.


보안용 철문이 돌아가면서, 찰칵하고 안필드가 보일 때 눈물이 핑 돌았다. 짙은 안개는 오히려 영험한 분위기까지 만들어주었다. 그리고 이어서 내가 경기장에서 10번째 정도 밖에 떨어지지 않은 열에 티켓팅을 했음을 느꼈다. 경기장에 들어와서 구경을 하다보니, 사진을 찍는 관광객분들을 부러운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자 안전요원 분께서 친절하게 "저 쪽이 사진이 잘 나오는데 사진 한 번 찍어~" 하면서 사직을 남겨주셨다. 이와 더불어, 경기장에서 가장 가까운 자리는 휠체어&동반 가족 분들의 자리였다. 위에서 말한 문화를 만들어 가는 자본이 크고 경제적인 요소가 아니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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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오오오오오 리버풀 선수단! 일찍 들어가면 아래까지 내려가서 이렇게 눈 앞에서 선수들을 볼 수 있다.

앉아서 조금 쉬다보니 리버풀 선수들이 몸을 풀러 경기장으로 입장했다. 매일 TV로만 보던 선수들을 눈앞에서 보다니. 왜 직관 후기에서 '선수들 몸푸는 것만 봐도 재밌다'고 표현했는지 알게 되었다. 이윽고 경기가 시작되기 전 선수들이 들어가고 다시 상대 선수들과 입장했다. 선발 라인업을 장내 아나운서가 마치 랩을 하듯 리드미컬하게 호명할 때마다, 팬들도 추임새와 박수로 답가를 보냈다. '와 이제 진짜 시작된다'라는 생각을 하던 찰나 '그 노래가 시작되었다'


When you walk through a storm
hold your head up high And don't be afraid of the dark
- You will never walk alone 중-


리버풀을 상징하는 응원가인 <You will never walk alone>이 장내에 울려퍼지고 수만 명의 사람들이 스카프를 펼치고 떼창을 했다. TV로 볼 때는 왜 원정팀이 불리한지 몰랐는데, 프로 선수들은 그러지 않을 수도 있지만 압도되는 분위기였다. 그리고 그 순간 깨달았다. 선수가 아님에도 축구를 즐기는 방법을 말이다. 나는 항상 선수, 그것도 스타 플레이어가 되는 꿈만 꾸고 되고자 노력했었다. 그러나 이 큰 경기장에서 외부인이 되어보니 스스로에 대해서 조금 다르게 생각해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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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기 전에 삶을 회상할 수 있다면 반드시 들어갈 순간이었다. 삶은 결국 이런 추억들을 인생이라는 유리병 속에서 모아가는 여정이라고 생각한다. 선수는 팬들을 위해서, 팬들은 선수와 팀을 위해서. 각자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해 함께였다. '이런 팬들과 팀을 가진 서로는 행복하겠다'라는 생각을 하면서, '배경이 되는 기쁨'이라는 단어도 모락모락 떠오르면서 나도 힘차게 YWNA를 불렀다.


인생을 회상하기 위해 북마크를 추가하고 싶은 순간이 올해 있었나?


90분은 생각보다 빠르게 끝났다. 상대 선수의 다이빙이나 시간 지연에 대해서는 생전 처음 들어보는 영어 욕도 들어보고. 세 골이나 넣었는데, 전반에는 내 쪽이 우리 진영이었지만 후반에는 상대 진영이었어서 잘 보이지 않았다. 그래도 같이 응원하고 욕하며 90분을 끝내고 한 참을 경기장에 남아 있다가 숙소로 뛰어서 돌아왔다.


꿈이 이뤄지는 순간보다 이뤄가는 여정이 더 드라마틱하다. 오히려 경기가 마칠 즈음에는 스스로 '어? 직관에서 느껴지는 감동이 이 정도 밖에 안 되나?' 약간 다급해졌다. '감동을 찾아야해!!' 그러나 오히려 첫 날 우버를 타고 왔던 한국인 분들, 여행 자금을 모으기 위해서 거쳐왔더 커리어, 나아갈 길들이 머리 속에서 티키타카를 하듯 떠올랐다. 그렇게 'The journey is the reward'라는 말을 버킷리스트 중 하나를 지우며 조금은 이해를 할 수 있었다.


KakaoTalk_20250312_182718656_08.jpg 경기 끝나고 이 정도 인파가 쏟아져 나온다. 우버/버스 등은 오히려 타기 어려울 수 있다. 조금 빠져나와서 타시는 것을 추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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