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시 머물렀던 곳
기후변화의 영향으로 이상기후가 잦아지면서, 2025년에는 특히 강원도를 비롯한 전국 곳곳에서 대형 산불과 기록적인 집중호우가 연이어 발생했다.
그로 인해 많은 이재민이 발생했고, 주민들은 마을 인근 학교와 마을회관 등 임시 대피소로 몸을 피하는 상황이 이어졌다.
내가 살고 있는 가까운 지역에서도 피해가 발생했으며, 집중호우가 전국으로 확산되면서 총 22개 시·군·구가 특별재난지역으로 지정되었다. 광주, 경기, 세종, 충북, 충남, 전남, 경북, 경남 등 여러 지역이 호우 피해 특별재난지역에 포함되었다.
2025년 7월 16일, 집중호우로 인해 인근 지역 주민들이 대피소에서 생활하는 모습이 뉴스로 보도되었다.
집 밖에는 여전히 비가 내리고 있었고, 비상근무와 재해 주민들을 위한 구호 지원으로 바쁘고 지친 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내가 살고 있던 터전이 사라진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아마도 그것은, 온 우주가 한순간에 사라지는 느낌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지치고 힘든 하루를 버티고 돌아와 몸을 눕히고,
사랑하는 가족과 밥을 먹으며 하루를 나누고,
유일하게 내 목소리를 내고 숨을 쉬며 쉴 수 있었던 곳.
그곳에는
함께 앉아 이야기를 나누던 소파가 있었고,
마주 앉아 밥을 먹던 식탁이 있었으며,
지친 몸을 맡기던 침대가 있었다.
통통통 돌아가던 세탁기,
큰맘 먹고 장만했던 건조기,
윙윙윙 쉼 없이 돌아가던 냉장고,
선풍기에 의존하다가 겨우 마련한 신세계 같은 에어컨,
30인치에서 65인치로 커지며 삶의 풍경을 바꿔주던 텔레비전.
언젠가 꼭 써보겠다고 중고나라에서 하나둘 사 모았던 미싱기,
눅눅한 냄새가 배어 있던 오래된 편지들,
사기만 하고 끝내 다 읽지 못한 수많은 책들,
늘 입을 옷이 없다고 말하면서도 가득 차 있던 옷장.
그 모든 것은 단순한 물건이 아니라,
나의 이야기와 삶이 담겨 있던 기록들이었다.
그 모든 것이 사라진다는 것은
그 안에 담긴 내 생의 시간 자체를 잃는 것과
같은 의미가 아닐까?
비는 계속 내렸고, 텔레비전 화면 속에서는 이재민들의 인터뷰가 이어졌다.
떠내려간 집터 앞에서 주저앉아 우는 어머니와 아버지의 모습이 비쳤다.
그 장면을 바라보다가, 나는 오래된 기억 하나를 떠올렸다.
1986년 여름, 우리 가족에게도 그런 순간이 있었다.
와—
예쁘다.
과자도 엄청 많고,
사람들은 왜 이렇게 먹을 것을 많이 가져오는 걸까?
쌀도 가득, 과자도 가득, 옷도 가득.
마을 이장님은 어디선가 이런 것들을 계속 가져오신다.
그런데 똑같은 것들만 있다.
새로운 것은 없다.
과자가 몇 박스나 있었지만 전부 같은 종류라
먹다 보니 금세 질렸다.
엄마는 시멘트 바닥에 놓인 빨간 고무통 앞에서
흙이 잔뜩 묻은 물건들을 쉼 없이 씻어내고 계셨다.
엄마는 너무 분주했다.
나는 분주한 엄마 옆에 앉아
씻어낸 물건들을 조금씩 옮겼던 것 같다.
시멘트 바닥은 유난히 차갑게 느껴졌다.
엄마는 춥지 않은 걸까.
그 생각이 계속 마음에 걸렸다.
높은 마루 위에는 미닫이문이 있었고,
그 안에 방 하나가 있었다.
그곳에서 먹고, 자고, 다 했는데
어떻게 그 시간을 지냈을까?
기억나지 않는다.
유치원에 가야 했다.
처음으로 ‘학교’라는 곳에 가던 나이였다.
유치원에 어떻게 다녔는지 무엇을 배웠는지
그런 것들을 기억 나지 않는데
기억하는 순간이 딱 하나가 있다.
유치원 선생님이
어느날 조개껍데기를 가져오라고 하셨다.
나는 엄마에게
조개껍데기를 가져가야 한다고 말했다.
엄마는
“조개껍데기가 어디 있니?” 라고 하셨던 것 같다.
나는 한참을 울고,
때를 쓰고, 버둥거렸던 것 같다.
어디서인지 알 수 없는 조개껍데기를
엄마가 가져다주셨다.
잘 씻어서 말려서 가져가야 한다고 했지만
나는 그냥 가방에 넣었다.
그걸 들고 유치원에 갔다.
여름이였던 모양이다
교실 안에 썩는 냄새가
천천히, 그러나 분명하게 퍼졌다.
어디서 나는 냄새인지
나는 알지 못했다.
아이들은 고개를 갸웃거렸고,
모두가 의아해했다.
선생님이 가져온 조개껍데기를 꺼내 보라고 하셨다.
유치원 가방을 여는 순간,썩는 냄새가 한꺼번에 확 올라왔다.
그리고, 그 안에서 벌레가 보였다.
당황하여 내동댕이 쳤던것 같다.
그 끔찍했던 기억이
아직도 하나 남아 있다.
그 시절에는 여유라는 것이 없었다.
새로운 것을 사가고
준비해서 가져가고 하는 것들이
쉽지 않았다.
슈퍼도 1개 밖에 없었고
마트 같은 것은 버스를 타고 1시간이 넘게
다녀와야 하던 때 였다.
조개껍데기 사건 이후, 나는 무언가 필요하다는 말을
좀처럼 하지 못하게 되었던 것 같다.
그 일은 어린 나에게
생각보다 큰 충격으로 남았다.
그 시간 동안 부모님들은
새로운 집을 짓기 위해
자녀들을 돌보는 것 보다는
우선적으로 집을 짓는데에 더 집중해야 하는 시간이였다.
없는 살림에 정부의 지원을 보태고,
쉽게 나오지 않는 대출을 받아 땅을 사고,
이웃 마을의 목공 기술자들이 와 제대로 된 설계도 없이 뚝딱뚝딱 집을 지어 올렸다.
집이 지어진다는 것 자체가
그때의 나에게는 너무도 신기한 일이었고,
새로운 희망이 시작되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래서였을까.
대피소에 머물던 시간들은
새집에 대한 기대 덕분에
그다지 슬프지만은 않았던 것 같다.
부모님의 근심은 깊었겠지만,
어린 나는 마냥 즐겁고 좋았다.
어린 내가 가지고 있던 물건은
사실 아무것도 없었기에
잃을 것도 없었던 것 같다.
하지만 부모님들은 많은 것을 잃었다.
삶의 터전이 바뀌었고,
임시 거주 시설을 거쳐
새롭게 지어진 집으로 옮겨 가기까지
짧지 않은 시간을 견뎌야 했다.
그럼에도 우리는
모든 것을 잃고 나서야
새로운 곳으로 갈 수 있었다.
지금 돌아보면,
모든 것을 잃고 나서야
비로소 새로운 것이 시작될 수 있다는 사실을
그때의 나는 어렴풋이 배우고 있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