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의 부재:엄마, 아빠, 언니, 나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초가집에 살던 때의 기억이다.
찢어지게 가난한 집이었다.
잘생겼고 열심히 일하는 청년이었다.
나이는 조금 들었지만
시골에서 상경해
성실하게 일하며 지내는 모습이 멋있었다.
결정적으로 시골에 집이 있다고 한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집이 있다고 해서 좋았다.
그동안 집이 없어 서럽게 살았던 날들이었다.
집이 생긴다는 사실이 좋았다.
눈치 보지 않고 나만의 가족을 이루고 살 수 있는 공간이 있다는 것이
기대되고 행복할 수 있을 것 같다.
첫째 아이를 임신하고 그 사람과 12월에 결혼을 했다.
서울에서 살수 없게 되어
시골로 내려가야했다.
막상 내려와 본 집은 초가지붕에 흙담으로 무저질 것 같았다.
실망스러웠다.
서울의 집들과는 너무도 다른 모습이다.
왠지 모를 속았다는 배신감이 조금은 밀려왔다.
서울에서 내려오기도 너무도 힘들었다.
버스를 몇 번을 갈아타고 덜컹거리는 시골길을 한참을 들어와야 도착할 수 있었다.
엄마가 반대를 한다.
왜 이런 곳에 가려고 하냐고 너무나 속상하다고 가지 말라고 하신다.
아이가 있다.
아이가 있어서 나는 이곳에 살아야 한다.
6남매 중 셋째인 그는 자상했다.
그때만 해도 그 사람은 늦은 결혼이었다.
그이가 32살이었고 나는 24살 나와 그이는 8살 차이였다.
사랑이 가득했고 어른스러웠다.
서울에서 받았던 서러움들을
이 사람은 사랑으로 지켜줄 것이라 생각했다.
열정과 패기가 가득한 그 사람이 좋았다.
하지만 나는 너무도 힘들 나날들이었다.
시아버지와 시어머니를 모셔야 했다.
고된 농사일은 끝이 없었다.
생전 처음 해보는 일들이 너무도 고되고 힘들었다.
그 사람이 있어서 나를 아끼고 사랑해 주는 건
틀림없는 사실이니 그것 하나 믿고 버티였다.
선택한 여지도 없었다.
출산일이 가까울 쯤에 돈 한 푼 없는 집에서 시아버지가 한약을 하나 지어다 주셨다.
너무도 황송했다.
아이를 잘 낳으라고 없는 살림에 챙겨주신 것만 너무도 애틋했다.
바로 그 한약을 달여서 먹었다.
아무런 설명 없이 주신 약이라서
바로 먹어야 하는 줄 알았다.
나중에 알게 되었는데
한약은 진통이 시작되면 먹는 약이었다고 한다
너무 일찍 먹는 바람에 진통만 계속되고
아이가 나오지 못했다.
배가 아파오는데 아이가 나오질 않는다
극심한 고통으로 탈진하며 누워있었다.
다들 일하러 나가고 혼자 누워있는 방 안에서
이대로 죽는 것이 아닌가 싶은 생각을 했다.
엄마가 생각났다.
전화도 없는 집에 엄마를 오라고 전화하러 갈 수도 없었다.
오랜 진통 끝에 힘겹게 첫째가 태어났다.
딸이었다.
시아버지와 시어머니가 실망을 한다.
딸을 어디다 써먹냐 농사를 지어야 하는데 하며
가슴을 후볐다
죽을힘을 다해 태어난 내 아이가 환영받지 못했다
서러웠다
거의 죽음직전까지 간 나에게...
엄마가 왔다
엄마가 한없이 운다
나를 데리고 서울로 가셨다.
거기서 살지 마라
왜 거기서 살려고 하냐
여기서 그냥 나와 살자
엄마는 그렇게 말했지만
나는 안다
우리 엄마는 자신밖에 모르는 사람이란 것을
나를 그 차가운 큰집에 혼자 두고 매일 나가지 않았던가?
나는 엄마의 돌봄이 닿지 못했다.
몸을 조금 추스르고 아이를 다시 엎고
시골로 내려왔다.
그런데 그 사람에게 사고가 나고 말았다.
논에서 일을 하다 눈에 뭔가 들어갔다고 한다.
시골 버스를 타고 그 흙길을 한없이 달려 시내의 병원에 도착했다.
안구를 도래내야한다고 말한다.
안된다 그럴 수는 없다
서울의 큰 병원으로 다시 버스를 타고 한없이 도착했다.
한없이 울고 있는 아이를 엎고 그 사람의 병실을 왔다 갔다 했다.
어떻게 하나 어떻게 하나
그 사람의 안타까움과 내 아이의 안타까움과 삶의 안타까움이 함께 밀려왔다.
가난하고 가난하고 돈이 없어 서러움을 주변 마을에 돈을 꾸어서 간신히 병원비를 마련하고
죽겠다고 소리 지르는 그를 두고 갈 수 없었다.
나는 그와 함께 다시 시골생활을 시작하였다.
고된 하루하루였다. 그이의 눈의 상처는 마음의 상처도 깊게 만들었고 점점 그는 전에 그와는 달랐다.
둘째가 태어났다 또 딸이었다.
셋째의 임신 이번에는 분명히 아들이다. 태동이 남다르다.
이 아이는 아들임이 분명하다
딸이 태어났다. 실망감을 감출 수 없었다.
주변에서도 또 딸이네 하며
막내 시누이가 먹을 것도 없는 집에 딸만 잔뜩 나면 어떻게 할 거야 하며 막말을 쏟아낸다.
너무도 서러웠다.
그 무렵 나라에서는 “한 아이만 잘 키우자”는 산아정책을 내세우고 있었다.
아이를 더 낳지 않겠다는 약속으로 불임수술을 하면 지원금을 준다는 말이 돌았다.
선택이라기보다는 살아가기 위한 계산에 가까운 결정이었다.
먹일 입 하나 줄이는 것이 아이 하나를 더 사랑할 수 있는 길이라고
그때는 그렇게 믿어야 했다.
결국 보건소로 향했다.
차가운 침대 위에서 몸보다 마음이 먼저 굳어갔다.
수술이 끝났다고 했을 때 후회인지, 안도인지 모를 감정이 가슴 깊숙이 내려앉았다.
어떻게 살아왔는지 모르겠나.
그 많은 시간들 얼마나 많은 일들이 있었겠느냐만은
나의 첫 집은 힘겨운 노동과 서러움이 가득했다.
그리고 내게는 내가 지켜야 할 세 아이들이 있었다.
1945년, 광복의 해에 태어났다.
나라가 해방되었다지만 시골 마을의 삶은 여전히 배고픔과 가난 속에 있었다.
해방은 신문 속 이야기였고, 우리 집의 하루는 늘 먹을거리부터 걱정해야 했다.
어머니는 새벽부터 밤까지 손에서 일이 떨어질 날이 없었다.
삯바느질을 하고, 밭에 나가 농사를 지으며 우리 형제들을 키워냈다.
육 남매 중 다섯째로 태어난 나는 늘 누나들의 손에 이끌려 자랐다.
누나들은 어른이기 전에 이미 어른이었다.
우리 집은 너무 가난해서 학교라는 곳이 늘 멀게만 느껴졌다.
책가방도, 신발도, 계절에 맞는 옷도 제대로 갖춘 적이 없었다.
아버지는 글방에서 아이들에게 글을 가르치셨지만
그 일로 우리 집 살림이 나아지지는 않았다.
우리를 먹여 살린 것은 오롯이 어머니의 손과 등이었다.
배가 고파 잠드는 날이 잦았고
중학교, 고등학교는 감히 꿈꿀 수 없는 일이었다.
아무리 죽어라 농사를 지어도 집은 늘 가난했고
그 집 안에서의 내 인생도 함께 갇혀 있는 것만 같았다.
‘여기서 계속 살면, 내 인생은 이 집처럼 어둡게 끝나겠구나.’
그 생각 하나로 무작정 서울로 올라갔다.
몸 하나로 할 수 있는 일은 뭐든 했다.
공장에 들어가 하루 종일 기계 소리 속에서 일하며
처음으로 손에 돈이라는 것을 쥐어보기도 했다.
그 무렵, 주변의 소개로 한 여자를 만났다.
말수가 적고, 다정하고, 늘 조심스러운 사람이었다.
이 사람과 함께라면 비록 큰 집은 아니어도
따뜻한 집 하나는 만들 수 있을 것 같았다.
돈을 벌기 시작했고 함께 살아갈 수 있을 것 같다는 희망도 생겼다.
그렇게 결혼을 결심했다.
이제는 가난한 집이 아니라 ‘우리 집’을 만들 수 있을 거라 믿었다.
하지만 세상은 그렇게 쉽게 허락하지 않았다.
공장은 문을 닫았고 함께 지내던 직원이 내가 아끼던 시계를 훔쳐 달아났다.
그 시계는 돈보다도 내가 서울에서 버텨온 시간의 증거 같아서 더 아팠다.
그 사람과 같이 서울에서 살아갈 수 없게 되었다.
막막했다.
추운 겨울날
결혼식을 하며
결국 다시 시골로 내려올 수밖에 없었다.
다시는 돌아오고 싶지 않았던 그 어두운 집으로, 귀향했다.
뜨거운 태양 아래서 밭을 갈고, 논에서 하루를 보내고 돌아오면 몸은 늘 노곤하고 마음은 무거웠다.
그래도 나를 믿고 함께 내려와 준 아내가 있었기에 버텨보려 했다.
이 집에서라도 다시 시작해 보자고 스스로를 다독였다.
그러던 어느 날, 벼를 베던 중 무언가가 눈에 딱 하고 들어왔다.
눈을 비볐지만 통증은 사라지지 않았다.
덜컹거리는 버스를 타고 병원으로 향했고 의사는 냉정하게 말했다.
눈을 도려내야 한다고.
절망이었다.
그렇게는 살 수 없다고 생각했다.
서울의 다른 병원을 찾아갔지만 눈을 도려내지는 않아도 되지만 보이지는 않을 거라는 말을 들었다.
젊은 나이에 한쪽 눈을 잃는다는 것, 그 사실은 집보다도 더 깊은 어둠처럼 느껴졌다.
몇 달을 그렇게 어둠 속에서 살았다.
의욕도, 희망도 없었다.
가난한 살림에 병원비를 마련하려 이곳저곳 손을 벌리던 어머니의 모습이 가슴을 더 무너뜨렸다.
‘이 집에서, 이 몸으로 무엇을 하며 살아갈 수 있을까.’
살고 싶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아이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빨간 포대기에 아이를 업고 힘겹게 달래고 있는 아내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 순간 생각했다.
내가 무너지면 이 집은 어떻게 되는가?
이 사람들과 아이는 어디로 가야 하는가?
정신을 차려야 했다.
다시 밭으로, 다시 논으로 나섰다.
눈은 불편했지만 몸은 아직 움직일 수 있었다.
돈을 벌어야 했다.
이 집을 다시 세워야 했다.
누군가 돼지를 키우면 돈이 된다고 했다.
돼지 열 마리를 샀다.
이 녀석들만 잘 키우면 집도 고치고
아이들도 제대로 키울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하늘은 또 한 번 시험하듯 폭우를 퍼부었다.
우리 집 앞마당에서 돼지들이 물에 떠내려갔다.
그 모습을 보며 또 한 번 절망이 밀려왔다.
하염없이 울고 있는 내 앞에
낯선 서울 사람들이 말을 걸어왔다.
이 근처에 기업이 들어올 예정이라 땅값이 오를 거라고 했다.
함께 일해보지 않겠느냐는 제안이었다.
무슨 일인지는 잘 몰랐지만 이상하게도 이번엔 희미한 불빛이 보이는 것 같았다.
새로운 길을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새로운 낯선 사람들과 일을 시작하게 되었다.
나의 집을 새롭게 만들어 갈 수 있을 것 같았다.
나는 잘 모르겠다. 우리 집이 큰 집인지 작은 집인지.
할머니, 할아버지, 엄마, 아빠, 나, 동생 둘, 사촌언니, 사촌동생까지
아홉 식구가 한 집에 산다.
작은 아빠는 사우디아라비아에 돈을 벌러 가셨다고 한다.
작은 엄마는 어디에 계셨는지 모른다.
집은 작다. 방은 더 작다.
큰방 하나에 밤이 되면 모두가 들어가 잔다.
이불은 겹겹이 깔고 몸은 서로 부딪히고
누군가는 뒤척이고 누군가는 코를 곤다.
아빠는 매일 말한다. 공부를 잘해야 한다고. 변호사나 판검사가 되어야 한다고. 그래야 산다고.
그래야 좋은 집에서 살 수 있다고 한다.
학교까지는 한 시간이 넘게 걸린다.
가방은 늘 무겁고 어깨는 자주 아프다.
집에 돌아오면 작은 사랑방으로 간다.
할아버지 앞에 꼿꼿이 앉아 천자문을 배운다.
다리가 저려서 아프다.
할아버지는 하루 종일 글만 읽으신다.
일은 하지 않으신다.
엄마랑 할머니, 아빠는 매일 밖에 나가 일하시는데 할아버지만 제일 편해 보인다.
밭에 나가실 때면 나에게 동생들을 맡긴다.
“네가 큰딸이잖니.”
막내는 매일 운다. 울음이 멈추지 않는다.
둘째는 덜 울지만 자꾸 보채고 따라다닌다.
나는 아직 아이인데 왜 내가 아이들을 다 봐야 하는지 잘 모르겠다.
사촌언니와 사촌막내도 같이 있다.
언니가 있어서 좋기도 하다.
엄마 얼굴은 더 피곤해 보인다.
젖이 나오지 않아서 엄마는 막내랑 사촌막내에게 설탕물을 먹이신다.
그걸 보고 있으면 괜히 마음이 답답해진다.
할머니는 사촌막내를 안고 어루만지며 달래신다.
왜 항상 우리 엄마만 이렇게 힘든 걸까?
내가 할 수 있는 건 공부뿐이다.
동생들이 울어도 책을 펴고 졸려도 글자를 본다.
공부를 잘하면 엄마가 덜 힘들어질까?
이 집이 조금은 덜 좁아질까.
나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이 집은 사람이 너무 많고 엄마의 한숨도 너무 많다.
언니는 학교에 간다.
아침이 되면 가방을 메고 집을 나선다.
그때부터 집에는 나와 동생들, 그리고 할아버지만 남는다.
할아버지는 늘 방에 누워 계신다.
움직이지 못하고 말도 많지 않다.
가끔 대소변을 누신다.
그러면 엄마는 나한테 치워야 한다고 말해 두고 일을 나가셨다.
냄새가 난다.
숨을 쉬기 어려울 만큼 역한 냄새가 난다.
그래도 엄마가 하라고 했으니까 나는 말없이 움직인다.
대변을 버리고 대야에 물을 떠 온다.
할아버지를 씻기고 걸레를 빨아 바닥을 닦는다.
손이 떨린다.
물이 차갑고 마음이 더 차갑다.
너무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내가 하지 않으면 할 사람이 없다.
엄마도, 아빠도, 할머니도 모두 밖에 나가 일을 하고 있다.
그래서 나는 할아버지와 동생들을 돌본다.
울고 보채는 동생들, 움직이지 못하는 할아버지.
어린 내가 감당하기엔 너무 많은 하루다.
그래도 나는 이것이 그냥 해야 하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시간이 아주 천천히 흐른다.
시계가 없는 집에서 나는 언니가 올 때를 기다린다.
언니가 오면 조금 숨이 쉬어진다.
동생들을 언니가 봐주기도 하고 같이 놀면 웃을 수도 있다.
그래서 나는 계속 기다린다.
언니가 학교에서 돌아오는 그 소리, 대문이 열리는 소리, 발자국 소리 하나에
마음이 먼저 반응한다.
언니가 빨리 왔으면 좋겠다.
그게 그 시절 나의 가장 큰 바람이었다.
나는 내가 태어난 집에 대해 선명하게 기억하지 못한다.
너무 어렸고, 시간이 흐르며 기억은 더 희미해졌다.
다행히 몇 장의 사진이 남아 어 그 사진을 볼 때면
‘아, 우리 집이 이랬구나’ 하고 어렴풋이 짐작할 뿐이다.
우리 집은 초라한 초가집이었다.
지금의 눈으로 보면 분명 가난한 집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나는 그 집을 가난하다고 느낀 적이 없다.
왜 그랬는지는 잘 모르겠다.
늘 언니들이 있었고 부모님이 있었고 함께 놀던 친척 가족들이 있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집은 작았지만 사람은 늘 많았다.
나는 늘 누군가와 함께 살고 있었다.
할아버지는 내가 아주 어릴 때 돌아가셔서 기억 속에는 남아 있지 않다.
아버지와 언니들의 이야기 속에서만 존재하는 분, 그리고 사진 속에서만 뵐 수 있었다.
할아버지는
어느 날 나를 업고 아궁이로 내려가시다 넘어지셨다고 했다.
그 후 한참을 누워 고생하시다 돌아가시게 되었다는 얘기를 들었던 기억이 있다.
원인 제공이 나인가 싶어서 죄책감을 갖었던 것 같아.
어린 나에게 말이다.
누워계신 할아버지를 작은언니가 돌봤다고 했다.
그 이야기를 들었을 때 아직 어린 언니가 그 무거운 돌봄을 감당했을 생각을 하니 마음이 아렸다.
그 작은 손으로 어른의 삶을 떠안았을 시간이 너무도 안타까웠다.
나는 그에 비해 아무것도 모르는 철부지에 욕심이 가득가득한 욕심꾸러기였다고 한다.
연년생인 친척언니와 함께 살았는데 먹는 것도, 입는 것도 지지 않으려고 몹시 욕심을 냈다고 한다.
모든 것이 부족했던 시절이었기에 먼저 차지하는 것이 임자였다.
그래서 나는 욕심 많은 막내딸이었다.
친척언니네 작은아버지가 사우디아라비아에서 돌아오며 펭귄 인형 장난감을 사 오셨다.
그 인형이 너무 신기해서 한참을 방 안에서만 그것을 붙들고 놀았던 기억이 있다.
친척언니와 함께 자랐고 나는 그 언니가 나와 동갑이라고 믿었다.
그래서 반말을 했고 중학교에 가기 전까지도 우리는 같은 또래라고 생각했다.
나중에 언니가 나보다 한 살 많다는 걸 알았을 때 그 사실이 이상하게도 큰 충격이었다.
그 이후로 살가움은 사라졌고 ‘언니’라는 말도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대신 나는 슬그머니 피했다. 관계가 서먹하게 되었다.
집에는 송아지도 있었고 돼지도 몇 마리 있었다.
비가 많이 오던 날 모두 사라졌지만 그때 돼지 몇 마리가 있었던 건 기억나긴 한다.
그 예쁜 송아지 눈이랑 말이다.
비가 많이 오던 날
사랑채가 무너졌었고 그래서 급하게 회관으로 이사를 하게 되었다.
옷가지들 물건들이 순식간에 사라졌고 어떻게 전에 있던 집의 물건들을 챙겨 왔는지는 모르겠다.
기억하는 건 그 후에 잠깐 동안 회관의 생활과 그리고 새로운 집에서의 기억이다.
우리 집은 가난했지만 가난을 잘 느끼지 못했다.
학교에 가지 않았던 시기고 우리 동네, 우리 가족, 주변 사람들만 알면 되는 세상이었다.
그래서 크게 부족함을 모르고 살았다.
언니들은 그 시절 배가 고팠다고 말한다.
그런데 나는 배고픔을 크게 기억하진 않는다.
아마도 늘 언니들이 양보해 주거나
배고픈 배를 누군가 날 챙겨주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덧붙임: 이 글은 엄마, 아빠, 언니에게 조금씩 들었던 내용을 통해 내 생각으로 작성해 본 글이다.
부모님과 언니가 생각했던 느꼈던 현실과는 다를 수 있다.
하지만 그때 내가 듣고 느낌 그 감정은 이러한 느낌이었다. 나의 입장에서의 사실인 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