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쓰기와의 인연은 초등학교 5학년 때부터 시작된다. 어느 날, 입말을 살려가며 썼던 한 편의 글이 담임선생님의 눈에 띄었다. 선생님은 내게 써놓은 글이 있으면 한번 들고 오라고 하셨다. 끄적거려 두었던 원고들을 보여드렸다. 한참을 읽어보시던 선생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선생님은 자신이 발견한 인재를 확인받듯 옆 반 선생님을 불러 내 글을 공유했고, 그때부터 온갖 백일장에 나를 출전시켰다. 학교의 글짓기 대표가 되었다. 지금 생각하면 시골이라 가능했던 일이었을 법한데 난 제법 우쭐댔던 것 같다. 당연히 그래야만 할 것처럼 장래희망 칸에 고민 없이 ‘작가’라고 썼던 걸 보면 말이다.
나는 내 글의 어떤 부분이 좋은 표현인지, 어떤 부분을 고쳐야 더 좋은 글이 되는지 알지 못했다. 그걸 가르쳐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상의 순위가 곧 내 글의 피드백이었다. 글을 쓰는 것이 즐거운 것이 아니라 큰 상을 받아야 즐거웠다. 한두 번이야 인정받는 일로 기분이 좋았을까. 나는 슬슬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교내에선 늘 최고상을 독차지했지만 교외에서 하는 백일장에서는 큰 상을 받아본 일이 없었다. 그 벽을 뛰어넘을 수 있는 방법을 몰라 마음이 종종거렸다. 물론 친구들 앞에서 그런 말은 잘난 척에 불과했기에 속으로만 답답했다.
내 불안이 현실로 확인된 것은 고등학교 때였다. 기숙형 고등학교에 입학한 나는 나보다 훨씬 더 똑똑하고 재주 많은 친구들을 만났다. 상위권에서 주목받으며 자라던 나로서는 두 자릿수로 밀려난 내 등수를 보고 공포와 같은 좌절감을 느꼈다. 원래 내성적인 성격이기도 했지만, 특별할 것 없는 나는 교실에서 존재감 없는 학생일 뿐이었다.
담임 선생님과의 개인면담이 있던 주였다. 긴장된 마음으로 교무실 문을 열었고, 나는 처음으로 담임 선생님과 마주 앉았다. 선생님은 수첩을 펼쳐 기록된 정보를 보는 듯했으나, 내 이름 옆에는 아무 말도 적혀있지 않았다. 선생님은 약간 머쓱한 표정을 지으며 뜬금없이 장래희망이 무엇이냐고 물으셨다. 학교생활은 어때? 정도의 질문을 예상했던 터라 조금 당황했다. 장래희망은 꿈 많은 초등학생에게나 던져야 하는 질문이 아닌가. 뭐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꽤 오래된 것 같았다. 어쩌면 좋은 대학부터 들어가는 게 희망이었는지도. 나는 감췄던 보물 상자를 열어 보이듯, 잠시 뜸을 들이다 ‘작가’라고 대답했다. 네가? 대답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선생님은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그렇게 물었다. 그분은 국어 교사였다. 나는 커튼을 치듯, 귀 뒤로 넘긴 머리칼을 풀어 달아오르는 뺨을 가렸다. 그때부터 나는 장래희망에서 작가를 지웠다. 물론 글도 쓰지 않았다. 논술 수업을 받던 어느 날, 논리가 안 맞는 형편없는 글의 예시로 내 글이 친구들 앞에서 읽히고, 찢기던 날은 그 결심이 더 확고해졌다.
글을 다시 쓰게 된 건, 남편 때문이었다. 남편은 글쓰기 플랫폼인 '브런치'를 알려주며 나보고 글을 써보는 게 어떠냐 했다. 자기도 이런 글 좀 써봐. 내 능력치가 모자란다는 전제가 깔려 있는 것 같아 마음이 뾰족해졌다. 모처럼 첫째를 데리고 근교로 나가는 차 안이라 못 이기는 척, 남편이 내미는 휴대폰을 받았다. 난 반쯤은 허투루, 반쯤은 시기심으로 읽어 내려갔다. 가족의 죽음을 사유하며 써 내려간 글이었는데 종이책이 아니라서 불편했다. 엄마의 조용한 시간을 비집고 들어오는 아들의 말 때문에 집중도 되지 않았다. 애 챙기는 것도 힘든데 내가 무슨 글을 써. 그건 내게 사치야. 아이를 키우는 일이 내게 어떤 무게인지, 글 쓰는 것이 내게 얼마나 무용한 일인지를 설명하다가 결국 서로의 마음만 할퀴고 대화는 끝났다. 사실은 마음 깊숙한 곳에서 꿈틀거리는 무언가를 꺼내는 일이 두렵기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글을 쓸 용기가 생긴 건 무언가를 남겨야겠다는 생각이 아주 절실해질 즈음이었다. 첫째 아이를 키우며 3년간의 휴직을 끝내고 복직을 준비할 때였다. 뜻밖에 둘째가 찾아왔다. 그것도 쌍둥이로. 갑자기 세 아이의 엄마가 된 기쁨도 잠시, 출산 전 발견한 폐의 결절이 의심되어 조직검사를 받게 되었다. 별일 아닐 거라 생각했다. 오히려 육아에서 벗어난 해방감이 검사를 받는 피곤함보다 더 컸다. 일단은 암일 가능성이 보이니 무조건 수술을 해야 한다고 했다. 암? 수술? 모든 것이 낯설었다. 무서웠다.
그랬다. 작은 조직만 떼어내면 될 줄 알았던 그것은 악성종양으로 판명되었다. 왼쪽 폐는 반이 잘려나갔고, 내 등엔 흉관이 비수처럼 꽂혔다. 지인의 집에 맡긴 첫째와 친정에 맡긴 쌍둥이가 눈앞에서 아른거렸다. 아이들이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 버리는 모래알 같았다. 내가 홀연히 사라지면 우리 아이들은 어떻게 될까, 내 삶은 어떤 평가를 받을까. 그저 아들 셋 두고 젊은 나이에 가 버린 딱한 여자이지 않을까…. 갓난아기처럼 꼼짝없이 누워 3개월을 보내고 난 후, 아이들을 다시 만났다. 내가 모르는 사이 쌍둥이는 걸음마를 뗐고, 첫째는 더 의젓해져 있었다. 우리 모두가 함께한 그날 밤, 아이 셋은 언제 떨어져 있었냐는 듯 내 곁에서 뒹굴다가 잠이 들었다. 잠든 셋을 지켜보는데 계속 눈물이 났다. 다시 시작된 일상의 감격이었다.
기록하고 싶었다. 아이들에게라도 나를 남겨두고 싶었다. 내가 사라진다 하더라도 아이들에게 잇닿은 엄마의 존재를 보여주고 싶었다. 그렇게 글쓰기가 시작되었다.
처음엔 자기 연민에서부터 시작된 글쓰기. 한 줄 한 줄 아무 말들이 이어지고 문장이 되어갈 때도 긴 글은 힘들었다. 글은 꽤 까다로운 녀석이라 번쩍하고 떠오른 생각의 타래를 풀어내려고 펜을 들기만 하면 모든 것이 순식간에 사라지곤 했다. 머릿속에서는 활자가 박히듯 이야기가 술술 이어지다가도 책상 앞에 앉으면 신기루처럼 사라지는 것이었다. 이러다 고작 몇 개 쓰고 그만두겠다 싶었는데 신기하게도 글쓰기는 나를 기억 속으로 마구 끌고 갔다. 대부분 어두운 기억이었다. 아주 오랫동안 방치된, 음습한 기운이 감도는 지하실 문을 열어야 했다. 모험이었다. 비밀스러운 감정들이 튀어나올 때는 나조차 당황하며 아무도 읽지 못하는 글을 남기기도 했다.
아이 셋을 어린이집에 보내고 난 후, 아이들이 잠든 사이, 아이 손을 잡고 걷는 순간에도 문장을 썼다. 딱 한 문장이라도 좋았다. 엄마! 봄이 왔나 봐요. 이제 나무에 거미줄도 열리겠지요? 아이의 말을 놓칠세라 얼른 핸드폰을 꺼내기도 했다. 시선이 멈추는 곳에서 사진을 찍고, 생각을 하고, 자세히 관찰했다. 아이 손을 잡고 걷다 내 유년으로 돌아가기도 하고, 그때는 미처 살피지 못했던 주변과 사람들을 다시 마주하기도 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그 속에 웅크리고 있던 또 다른 나를 발견하는 것이었다. 그때의 나에게 ‘안녕’ 하고 말을 걸고 그 마음을 들어주는 것이었다. 깡다구 하나로 버티던 붉은 얼굴의 내게 이제 그만, 괜찮다고 말해주는 것이었다.
참 신기한 일이다. 글을 쓴 지 3년이 지났고, 쓸 수 없을 것 같은 글이 꽤 많이 모였다. 글을 쓸 수 없는 많은 이유들이 나를 붙잡았지만 글을 써야만 하는 한 가지 이유가 나를 여기까지 오게 만들었다. 좋은 글이 아니라도 좋았다. 독자가 없어도 괜찮았다. 글을 쓴다는 것 자체가 나를 살게 했다. 내 억압된 감정들과 마주하게 하고, 그것에 올라서게 하고, 어느 순간 내 마음을 자유롭게 했다. 그리고 새로운 꿈을 꾸게 했다. 그러면 되었다.
여전히 나는 살아있다. 힘들 때면 흉관을 꽂았던 자리가 어김없이 신호를 보내오지만 얼마 전 완치판정도 받았다. 글쓸 시간이 없을 때가 많지만, 삶으로 하루를 꾹꾹 눌러쓰고 있다. 누군가에게 내 걸음이 위로가 되길 바라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