터널을 지나며

꿈꾸었던 일&꿈이었으면 좋았을 일

by 꿈꾸는 momo

어둠 속, 벨 소리가 고요함을 뚫는다. 바닥의 남자가 몸을 일으켜 전화를 받는다. 불길한 예감. 전화를 받자마자 남자는 외투만 대충 걸친 채 뛰쳐나간다. 여자는 침대에서 쉽게 일어나지 못한다. 바닥으로 꺼진 몸은 무겁고 축축하다. 자궁의 복벽이 아물기도 전이었다. 간신히 일어나 병실의 불을 켠다. 새벽 4시가 조금 넘었다. 시곗바늘이 멈췄다. 여자는 다리에 힘을 준다. 수술 부위의 통증에 미간이 찌푸려진다. 창문 밖을 내다본다. 밤새 눈이 쌓여 세상이 하얗다. 수면 양말이 두꺼워 어떤 신발도 신을 수 없다. 환자복을 입은 채로 창문을 연다. 남자가 간 길을 뒤따른다. 차가움도, 무서움도, 부끄러움도 느끼지 못한다. 여자는 날고 있다. 둥실둥실 떠간다. 어느새 울고 있는 남자가 보인다. 조명이 어두운 대기실이다. 눈물 자국인지 모를 얼룩들로 가득한 대기실 의자에 엎드려 남자가 울고 있다. 소리 없이 울고 있다.


산모님 아침 식사 왔습니다. 정신을 차린다. 3시간이 흘렀구나. 남편에게서는 아무 연락도 없다. 밥공기보다 세 배는 큰 대접에 미역국이 가득 담겨있다. 아이의 장이 터졌다 했다. 응급으로 수술에 들어간다 했다. 내가 아는 정보의 전부. 열 달을 품고 있던 생명이 빠져나간 자리에는 낯선 감정들로 가득 찬다. 기다리던 남편의 전화다. 수술은 끝났고, 회복실로 갔어. 곧 갈게. 아이는 죽지 않은 모양이다. 살아있다. 배가 고팠다. 미친년. 배가 고플 수 있다니. 그새 음식은 다 식어있었다. 숟가락을 들어 미역국을 떴다. 흐물거리는 것을 삼켰다. 온몸과 마음이 흐물거려 미친년처럼 울다가 웃었다.

결혼 9년 만에 아이가 생겼다. 내 몸에 또 다른 심장이 뛰고 있다니. 아이를 기다리며 그림을 그리고, 라디오를 듣고, 글을 읽었다. 행복했다. 만삭의 어느 날, 양수가 새는 바람에 급히 수술했다. 반신 마취로 덜덜 떨며 누워 있는 내게 갓난아이의 보드라운 얼굴이 닿았다. 아이의 태명을 부르니 울음을 그쳤다. 내 목소리를 기억하는구나. 그래, 엄마야. 엄마. 아이는 울음을 그쳤는데 난 그제야 눈물이 나기 시작한다. 이튿날 아침, 나는 링거대를 의지해 겨우 한 발 한 발 떼기 시작했다. 아이가 보고 싶었다. 큰 유리창 너머로 아이를 들여다본다. 간호사가 따로 부른다. 응급실로 가야겠어요. 아이가 혈변을 봤어요. 무슨 말인지 모른 채 서 있는 나를 두고 남편은 구급차를 뒤따라갔다. 그렇게 신생아 중환자실에서 이틀을 견디던 아이가 수술실로 들어간 거다.

늙은 외과 의사는 희망적인 말을 하지 않았다. 하얗게 괴사된 대장의 전부와 소장의 일부를 다 제거했다고 했다. 인체모형에서 보았던 'ㄷ'자의 대장을 다 잘라냈다니, 그럼 아이는 도대체 어떻게 되는 거지? 며칠 새 수척해진 남편의 얼굴이 어둡다. 말을 할 때마다 목소리가 운다. 거동이 힘든 아내를 두고 이 모든 일을 지켜보았을 남편이 가엾다. 하루하루가 정말 느리게 지난다. 15분간의 면회 시간이 곧, 하루였다. 다음 15분을 기다리는 게 몇 년처럼 느껴졌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별로 없었다. 남편은 매일 한 번 있는 면회 시간에 아이를 찾아갔고, 나는 주지도 못할 모유를 짜내 냉동실에 차곡차곡 넣어두었다. 아이는 끈질기게 하루하루 회복해 갔다. 기적 같은 일이었다. 산부인과에서 퇴원하던 날, 처음으로 아이를 면회하러 갔다. 걸을 때마다 느껴지는 통증을 복대에 감춘 채, 두꺼운 외투와 모자로 나를 감춘 채. 몸에 온갖 줄을 매단 아이를 바라보며 나는 울지 않았다. 처참한 수술 자국 밑으로 장루 주머니를 찬 아이. 아이의 작은 손에 내 손가락을 올렸다. 아이가 반사적으로 움켜잡았다. 아이를 보며 노래를 불렀다. 배 속에 있을 때 많이 불러줬던 노래다. 낯선 세상에 던져진 아이에게 내 목소리가 위안이 될 것 같아서. 웃는 듯한 아이의 표정. 아이가 하품했다. 예뻤다. 또 올게. 중환자실을 나오자마자 참았던 눈물이 솟구쳤다. 조리원이 아닌 집으로 돌아왔다. 온기도 없는 아이 방에는 모빌만 덩그러니 흔들리고 있었다.


아이가 모유를 먹기 시작했다. 첫날은 5cc, 다음 날에는 10cc. 젖몸살을 앓아가면서도 유축을 포기하지 않았던 건 정말 잘한 일이었다. 아이의 먹는 양이 늘어날수록 희망도 커졌다. 곧 퇴원해도 좋다 했다. 그날이 크리스마스였다. 꿈같이 아이가 살았는데, 꿈같이 내 품에 온다는데, 당장 나는 어떻게 아이를 돌봐야 하는지 아무것도 몰라 마음이 쿵쾅거렸다. 장루 주머니를 찬 아이를 집으로 데리고 온 날, 우리 셋은 밤잠을 설쳤다. 배냇저고리를 입은 아이는 팔, 다리를 펄럭거리며 딸꾹질했다. 그런 아이를 그냥 두고 볼 수 없어 결국, 아이를 안은 채로 밤을 새웠다. 그래도 좋았다. 아이의 냄새를 맡고, 아이를 안고, 아이와 눈을 마주치며 웃었다. 아이는 잘 자랐고, 한 번의 수술을 더 했다. 복벽 밖으로 튀어나온 인공항문을 원래대로 복원시키는 수술이었다. 또 다른 터널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아이는 하루에, 많게는 30번씩 묽은 변을 보았다. 나는 눈만 뜨면, 아니 밤중에도 기저귀를 갈아야 했다. 잦은 변에 발진이 생겼고, 악화되지 않기 위해 애써야 했다. 일회용 기저귀가 아닌 천 기저귀를 썼다. 물티슈 대신 거즈를 따뜻한 물에 적셔 닦아냈다. 온갖 발진 크림을 다 썼다. 대장이 없는 아이의 변은 냄새는 없었지만 치우기가 곤란했다. 아이의 엉덩이에서 찍 변을 내뿜는 소리만 들리면 자다가도 벌떡 벌떡 일어나 졌다. 내 귀가 예민한 건지, 엄마라서 그럴 수 있었던 건지 모르겠다. 대충 물티슈로 닦이고 기저귀를 채우자 싶다가도 아이의 붉은 엉덩이가 심해질 때면 내 탓 같았다. 덜 깬 눈을 비비고 일어나 따뜻한 물을 떠서 거즈를 적시고 있으면 묵직한 몸이 흔들거렸다. 물론 아이도 요란한 기저귀 갈이에 잠이 깨 칭얼댔다. 칭얼대는 아이를 다시 재우고, 나도 다시 곁에 누웠다. 몸은 바닥으로 꺼져가는 것 같은데 정신은 산란했다. 진실로 피곤한데 잠이 들지 않을 때면 수도 없이 스스로를 재촉하고 있었다. 아이가 다시 변을 보기 전에, 다시 깨기 전에 자두지 않으면 하루가 어려울 것이다. 매일 밤이 힘들었다. 아침에 일어나 보면 밤중에 간 기저귀가 예닐곱 개쯤 쌓여 있었다. 시간이 정해져 있었다면 좀 더 견딜만했을까. 그 끝을 알 수 없어 더 괴로웠다. 세상에 혼자 덩그러니 남아있는 듯한 느낌을, 잠을 깨던 어둠 속에서 자주 느꼈다.

‘병원에 있었을 때를 생각하고 감사해.’ ‘아이가 잘 크고 있으니 얼마나 다행이야. 애 엉덩이 좀 짓물러도 되니까 대충 해.’ 하는 조언들은 하나도 위로가 되지 않았다. 아이의 밤 기저귀는 두 돌 이후로 중단되었고, 하루 배변 횟수도 점점 줄었다. 하지만 작은 소리에도 잠이 깨는 습관은 불면증으로 이어졌다.

지금 아이는 여덟 살이다. 배에 길게 난 수술 자국을 보며 어른들로부터 주워들었던 말들을 영웅담처럼 꺼내놓는 아이는 누구보다 건강하게 자라고 있다. 남아있는 소장의 일부가 대장의 기능을 감당하면서 배변 횟수도 하루 서너 번으로 줄었다. 새로운 음식만 먹으면 바지를 적시던 설사병도 사라지고 웬만한 음식은 다 소화시킨다. 그저 건강하게만 자라다오 했던 나의 바람은 아이의 느린 수적 감각과 운동 감각으로 관심이 옮겨갔다. 절실했던 순간의 마음가짐은 그 시간이 지나고 나면 안개처럼 희미해지나 보다.

당신이 겪은 일에 비하면 내 고통은 아무것도 아니에요. 가끔 내 상황을 알고 이렇게 말하는 사람이 있다. 하지만 난 거세게 고개를 젓는다. 사람은 누구나 각자가 감각하는 고통에만 집중할 뿐이고 살아낼 힘이 있어서라기보다는 그저 살아지는 시간들 속에서 단단해질 뿐이다. 나 역시 겪어보지 않은 고통들에 대해서는 그 깊이를 가늠할 수조차 없다. 고통의 무게는 감히 잴 수도, 비교할 수도 없는 것이다. 꿈이었으면 좋았을 일과 꿈꾸던 일들이 섞여 있는 삶을, 누구도 알지 못한 채 살아가고 있는 것이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