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스트빌리지 뉴욕, 싹 다 살아졌음, 올해의 작가상
2019년 상반기 최고 전시는 서울시립미술관 <이스트빌리지 뉴욕: 취약하고 극단적인>(2018.12.13~2019.02.24)이었다. 이유는 올리비아 랭의 『외로운 도시』(어크로스, 2017)를 인용하는 게 가장 적합하다. 여기 나오는 데이비드 워나로비치의 인용구가 굉장히 인상적이다.
"사랑. 사랑은 당신을, 사람의 몸을 사회와, 부족과, 연인과, 안전과 한데 합치기에는 부족하다. 당신은 가장 대립적인 방식으로 당신 혼자다."
전시에 출품됐던 워나로비치의 인터뷰 영상이라고 해야 하나 다큐멘터리 영상이라고 해야 하나 아무튼 그 영상이 굉장히 펀치가 강했다. 저 인용구를 쓸 당시 워나로비치는 자신의 연인이 에이즈에 걸렸다는 사실을 전해듣고, 그를 위해 아무것도 해줄 수 없다는 사실에 무엇에 비할 바 없는 고독함을 토로하는데 그 뒤에 그가 취한 행동은 그럼에도 연결되기, 연대하기였다. 사람은 연결되어 있는 순간에조차 고독을 느끼는 생명체인데, 그럼에도 연대하기를 결코 포기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가능성을 지니는 것 같다. 사람이 좀처럼 변하지 않는다는 게 절망적인 만큼 그러나 사람이 변할 수 있다는 사실이 찬란한 것처럼.
2019년 하반기 가장 좋았던 전시는 두산갤러리 <이윤이 개인전: 싹 다 살아졌음>(2019.10.09.~11.09)이었다. 개인 경험과 사회의 경험을 엮어서 허구적으로 펼쳐놓는 작품이 영상 작품의 주전개였고, 오브제 작품의 경우에는 신화와 개인 경험을 섞어놓는 게 더 두드러졌는데 영상 작업에 비교하면 약간은 규모가 작게 다가왔다.
"그렇게 억만 가지의 시차와 모르고 살던 시절을 건너 너를 군중 속으로 호출한다"(<10월부터 6월> 중)..
큐레이터는 이 모두를 병실의 기억으로 엮었고 그건 그 나름대로 타당했지만 작가가 지닌 스펙트럼은 분명 그보다 넓을 걸 예측할 수 있었다. 앞으로가 기대되는 작가였다. 영상 작품은 개인-타인(친구)-사회 사이를 오가는 은유와 상징이 매력적이었다. 그 사이를 오가며 개인은 특정해지기보다는 오히려 익명을 가지며 동시에 굉장히 개인적이 되기도 한다.
"말은 어디까지 갈 수 있는가
비밀의 주체는 비밀이다
물을 수도 묻을 수도 없다
죄는 끝이 없다
그날 이후, 우리는 멀리서 각자의 말을 모색한다
다시는 전과 후가 같을 수 없다
우리는 돌아갈 수 없다
너는 돌아와선 안 된다"
<10월에서 6월> 작업 중
친구의 심정을 모른 채 그 시기 그 친구의 말을 듣고 한참이 지나 그 친구와 더 이상 연락이 되지 않는데 이제 그 심정이 이해되어버리는 때가 왔고 그 사이의 간격에 대해 말한다. 여기서 결국 친구는 돌아와서 안 될 존재이며 돌아오더라도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는 주체여야 한다.
오브제 하나는 기억의 신화화로,(<현자의 장미원>) 다른 오브제 연작은 개인과 몸과 사회의 관계에 대한 작업이라고 읽었다. (<검은 간토기> <등치고 간 내기>) 몸은 내 자신에게 있어 개인적이지만 병원에 오른 순간 철저히 타자화된다. 그리고 그 기억은 또 다른 방식으로 개인적이며 사회적이다. 이 두 가지가, 그러니까 몸과 기억과 신화가 한 작품으로 가는 길도 있겠지.
"한 번 좌표에서 튕겨 나간 너는 정지한 말처럼 눈을 굴리며
전진하라 전진하라
후진하라 후진하라
머물러라 머물러 있으라
나는 네가 그때 무슨 소리를 무엇을 봤는지 모른다
아마 평생 모를 것이다
(왜 네가 어머니를 향해 망치를 들었는지)
(그가 왜 너를 죽이려 한다 생각했는지)"
<10월에서 6월> 작업 중
올해의 작가상에서 박혜수 작가와 김아영 작가의 작업은 놀라울 정도로 압도적이었다. 박혜수 작가는 '우리'의 정의와 경계에 대해 이야기한다. 우리 사회의 우리라는 범위가 너무 작지 않냐며 문제 제기를 하면서 말이다. 그리고 이때 호출되는 게 고독사 문제이다. 어떤 존재가 고독사와 직면하는가 물었을 때 우리는 보통 무연고자라고 대답하기 쉽지만 자식이 근처에 있어도, 가족과 연락이 되어도 고독사는 일어난다. 그러니까 이제 더 이상 가족과 친구만이 우리의 범위에 들 수 있는 기점을 넘어서고 있는 것이다.
김아영 작가의 <다공성 계곡 2: 트릭스터 플롯>은 크게 봤을 때는 생태에 대한 보편적인 개념을 흔들고자 한다. 작가가 집중하는 건 난민 문제이다. 이 역시 박혜수 작가의 관심사와 연결된다. 우리는 난민을 우리 사회에 편입하지 않기를 대부분 바란다. 하지만 더 이상 그럴 수 없는 때가 왔고 온다. 어디에도 정착할 수 없는 때가.
다만 박혜수 작가가 이런 문제에 앞서 새로운 가족 대안에 집중했다면 (이상적인 가족을 연기해주는 도우미업체에 대한 작업물을 제시하며 작가는 이러한 문제를 비꼰다.) 김아영 작가는 설화와 민담을 가져온다. <다공성 계곡2>의 주인공은 페트라 제네트릭스인데 그 존재는 성별이 없다. 페트라라는 단어가 암시하듯 말 그대로 바위다. 모바위에 떨어져 나온 바위. 목소리는 다성적이고 그렇기에 기억 역시 다존재적이다. 동시에 제네트릭스라는 단어에서 읽어낼 수 있듯이 그는 데이터 그 자체이기도 하다. 이런 바위가 모바위가 파괴되어 일종의 난민이 된 뒤 새로운 곳으로 이주해야만 하는 상황과 맞닥뜨리는데,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이 민족주의와 순혈주의다. 그곳에 속한 단일한 민족이 아니기 때문에 그 지역에서 위험 분자로 취급받게 되는 것이다.
이런 문제에 대해 다시 대지모 신앙을 이야기하며 페트라 제네트릭스가 낯설지만 낯설지 않은 대지와 융합하면서 이야기를 끝맺음한 걸 보면 다시 시작은 생태로 돌아간다. (물론 민담, 설화에 대한 관심일 수 있지만 언제나 민담, 전설, 설화는 자연을 기반으로 하므로) 작가가 내놓은 이런 대안이 꽤 따스하기도 하네..
"우리는 영겁의 세월동안 셀 수 없는 이름으로 불리며 숭배의 대상이 되었고 바로 그러한 연유로 정신적 존재로 거듭난 우리에게 이제 한낱 일련의 기호가 부여되고 있구나."
"존재란 끊임없이 이동할 뿐이며, 여정으로 기억되고 존재할 뿐이다."
<다공성 계곡 2: 트릭스터 플롯> 작업 중
요즘은 이런 작업들에 확실히 마음이 끌리는 것 같다.
1월
<대한제국의 미술: 빛의 길을 꿈꾸다>,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
2월
<리히텐슈타인 왕가의 보물>, 국립고궁박물관
<이스트빌리지 뉴욕: 취약하고 극단적인>, 서울시립미술관
<최정화: 꽃, 숲>,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
<하룬 파로키: 우리는 무엇으로 사는가>,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
<대고려: 918, 2018 그 찬란한 도전>, 국립중앙박물관
3월
<대한 콜랙숀: 대한의 미래를 위한 컬렉션>(3.1운동 100주년 기념 간송미술관 특별전), 동대문 ddp
6월
<근대 서화: 봄, 새벽을 깨우다>, 국립중앙박물관
<한국화의 두 거장: 청전, 소정>, 현대갤러리
7월
<그리스 보물전>, 예술의전당 한가람미술관
8월
<우리 강산을 그리다: 화가의 시선, 조선시대 실경산수화>, 국립중앙박물관
<핀란드 웨이브 Finnish aalto>, 부산시립미술관
부산시립미술관 이우환 공간 상설전
10월
<로마 이전, 에트루리아>, 국립중앙박물관
<우리 손에서 되살아난 옛 그림>, 국립고궁박물관
<화협옹주의 얼굴 단장>, 국립고궁박물관
<족쇄와 코뚜레>, OCI미술관
<덕수궁-서울 야외 프로젝트: 기억된 미래>,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 일대&서울관
<에이징 월드: 내일도 나를 사랑해줄래요?>, 서울시립미술관
<그림과 지도 사이> <관아와 누정이 있는 그림> ('우리 강산을 그리다'전 연계 전시), 국립중앙박물관
<꽃으로 전하는 가르침: 공주 마곡사 괘불>, 국립중앙박물관
<베트남 국립역사박물관 소장품전>, 국립중앙박물관
<양혜규 개인전: 서기 2000년이 오면>, 국제갤러리
<이윤이 개인전: 싹 다 살아졌음>, 두산갤러리
12월
<올해의 작가상 2019>,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
<국립현대미술관 개관 50주년 기념전: 광장-미술과 사회 1900~2019> 3부,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