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마라토너다
예나 지금이나 나는 마라톤선수다.
예나 지금이나 나는 마라톤선수다.
어릴적 초등학교 3학년때 동내를 돌아오는 얼추 5km 교내 달리기 대회가 있었다.지금 생각해보면 3km정도 된거갔다. 그러나 그때는 5km라고 했다.
아마도 당시에는 모든 초등학교에서 이런 교내 달리기대회를 하지 않았겠나 싶다.
요즘 지인들과 얘기하다보면 어릴적 교내 마라톤대회에 참가해서 상을 탓다느니 상위권에 있었다하는 등의 말을 참 많이 듣는다.
필자도 마찬가지이다.
3학년부터 참가하는 마라톤대회는 6학년까지 보통 1,000여명이 달렸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 당시에는 엄청 많았고 그 거리도 엄청길게 느껴졌었다.
추리닝도 없었던 시절이었고 가난해서 너널너덜한 입고간 그대로 달리기에 참가했다.
입상을 하면 공책과 필기도구를 준다고 했고 특히 급식을 반학기 무상으로 준다고 해서 정말 급식을 받고 싶엇다. 급식이래봐야 빵하고 삼각우유이지만 굶기 일쑤엿던 그 시절에는 정말 대단한 것이었다.
고학년에 밀려 저 뒤에서 출발했는데 필자가 소질이 있었는지 반환점을 돌때 16등이었고, 골인을 하니 9등이란다.
급 실망. 5등까지 주어졌던 기회는 고학년 육상부가 타갔고. 그나마 저학년에서는 필자가 가장 좋은 성적이었다.
몇일뒤 육상부선생님이 반으로 찾아오셨다.
어이 껌둥이(그땐 엄청돌아다녀서 얼굴이 탓나보다)교무실로와~~
근데 솔찍히 겁났다. 당시만해도 교무실에는 뭔가 잘못하면 끌려가서 매맞던 곳이라 생각이 되었기 때문이다.
심장이 콩콩뛰는걸 느끼며 얼굴이 울그락불그락 잔뜩 긴장해서 들어갔는데. 선생님들의 특유의 지시봉을 들고서는 너 내일부터 방과후 남아서 달리고 가~~ 이 말만하시고 가봐 하신다.
육상부에 들어오라는 것이었다.
다음날 방과후 운동장에서 육상부에 들어가 달리기를 시작했다.
그런데 육상부가 좋은게 방과후 운동을 해야하니 점심때 빵과 우유를 주는 것이었다. 이거 최고로 잘된 것이다.
그 당시만 해도 어떤학교든 수도가가 운동장 옆에 있었다.
이것은 점심때 도시락을 싸오지 못한 대부분의 학생들이 수도물로 배를 체울때이다.
그 정도로 다들 굶기를 밥먹듯 했는데 육상부에 들어가니 빵과 우유를 주니 얼마나 기쁘고 행복한가.
그러나 이것도 잠시 1년 정도 하고는 고학년들이 성적을 못내서인지 육상부가 해체되고 다른 종목이 생겼다.
나는 이로서 그 좋은 먹거리를 잃고 말았다. 육상부가 해체 된것이 아쉬운게 아니라 빵을 먹지 못한다는게 너무 슬펏다.
이렇게 필자는 돌고 돌아서 다시 고등학교때부터 육상부에서 다시 달릴수 있게 되었다.
이제는 숙소라는 곳에서 먹고자고 운동에만 집중할수 있게 되었다.
처음 숙소에 들어가니 졸업한 5년 선배도 있었고, 위에 선배님들이 10여분 있었는데 함께 훈련해서 얻어지는 것이 정말 많았다. 특히 선배들하고의 훈련은 내 실력을 향상하는데 좋았고. 올바르고 정직하신 스승님을 두니 실력이 좋아질수 밖에 없었다.
필자는 그렇게 마라토너로서의 길로 가고 있었다. 그것도 마라톤 명문고에서 운이 좋게도 말이다.
필자의 고등학교는 작고하신 서윤복선생님이 육상부 1회로서 전통이 있는 숭문고등학교였다.
지금은 육상부가 없어졌지만 한때는 전국을 휩쓰는 최고의 육상 명문고 였다는걸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다.
정말 피나는 노력이라 할까, 선배들도 잘 이끌어 주엇지만 스승님께서도 잘지도해 주셨고, 여러므로 주변의 환경이 운동을 하도록 만들었던것 같다.
다들 잠자는 새벽에 나와서 달렸고, 훈련때 앞에서 끌지 않는다고 선배들에게 질타를 받았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그 선배들이 나를 더 빠르게 또는 앞에서 이끌므로 해서 뒤쳐지지 않도록 배러했다고 생각이 든다.
그때는 그것도 모르고 같은 동년배들과 선배들을 욕하고 했으니까. 왜냐 앞에서 끌면 훈련이 곱절은 힘들기 때문이다.
지나간 얘기지만 나에게는 국가대표가 되는 초석이 되었다.
필자는 정말 그때는 운도따랏다.
1학년때 전국체전선발전에 기라성같은 선배들을 제치고 5.000m에서 3위로 골인을 해서 달리기를 시작한지 6개월 만에 서울시 대표로 선발되엇고. 전국체전이 끝나고 11월에 있을 경부대역전경기대회에 고등학생이 서울팀에서는 단 1명인 필자가 선발되었다.
물론 전국체전 전 9월에 선발전을 가진다.
선발전에는 고등학생부터 실업팀 대선배들까지 15명을 선발하게 되는데 필자는 당시 12위로 선발되었다.
운이라는게 바로 이런것일 것이다.
전국체전 선발전에서는 그날 기온이 엄청올라서 앞서가던 선수들이 모두 퍼져버렸고. 경부대역전경기 선발전때는 반대로 비가 억수로 내렸던 기억이 뚜렸하다.
필자는 운동에서 만큼은 욕심이 많았다.
그래서인지 고등학교때 너무 많은 운동량으로 무리를 했는지 대학에 와서 꼬박2년을 성적도 못내고 쉬어야 했다.
훈련을 한다고 했는데 성적을 내지 못했다.
욕심이 많아서 였다고 생각한다.
왜냐 기라성같은 3,4학년과 실업팀선수들이 버티고 있는 일반부 경기에 대학 선수들도 참가하는데 고작 1.2학년의 새내기가 고등학교 시절만 생각하고 호기롭게 도전하니 잘 될리가 없는게 당연했지만 그때는 슬럼프라고 생각했고 운동이 잘되지 않아서 미칠것만 같았다.
그러다보니 자연 친구들과 더 어울리게 되고 술을 많이 먹기 시작했고. 음식도 잘 먹지 못하고 또 이성에 대한 눈이 뜨져서 더더욱 운동에 관심이 없어졌고 성적도 곤두박질치게 되었다.
그런데 이렇게 노는게 도움이 되엇는지. 아니면 학년이 올라가니 경쟁력이 생긴것인지 3학년 2학기 부터 스피드가 살아나는 것을 느낄수 있었다.
정말이지 대학 3년을 이렇다할 입상성적없이 지나는 끔찍한 선수생활을 보내야 했는데 고작 성적이래야 경부대역전 경기에 구간우승등이엇는데 3학년 2학기부터 좋아지는게 느껴지고 다시 정신차리고 달리고 싶어졌다.
4학년에 들어서고 첫 전국대회에 운좋게 입상을 하였고 교생실습 1개월 동안 조깅만 했는데도 교생실습이 끝나고 바로 대회에 참가해서도 입상하는 등으로 차차 몸이 회복되어갔다.
그리고 연이어 전국체전 대학부에서 3.000msc에서 우승하였다.
지금 생각해보면 필자는 솔찍히 최고의 선수는 아니었다.
다만 늘 경계의 대상이엇던 것만은 확실했다.
우승은 많이 못했지만 늘 입상은 놓치지 않았다.
그러니 실업선배들이나 후배들에게 경계가 된것만은 자신할수 있다.
특히 역전경기대회에서는 늘 가장 긴코스나 힘든구간을 도맡아서 달리는 선수였다.
역전경기의 특성상 누구나 긴거리나 힘든구간은 달리기 싫어하는게 똑같은 마음엇다.
필자또한 힘든구간을 달리고 싶엇겠는가.
그랬는데 고3년이 되니 솔선해야 하는 막중함도 있엇고. 실업팀에서도 후배들을 위해 솔선하지 않으면 안되는게 역전경기의 과정이다.
대학 4학년 교생실습을 다녀온 후 첫 전국대회에서 86아시안게임 국가대표 선발전이 있엇는데 아깝게 2등에 머물러 참가하지 못하게 되엇다.
경기운영을 못해서 지고 말았다.
그러나 어쩔수 없지 않은가 실력이 그것밖에 안되는 것이니~~
그러나 수확은 있엇다.
필자가 다니던 대구에는 대구대학교와 계명대학교에서 육상부가 있엇는데 4학년 졸업생이 딱4명이엇다.
나름 그 4명이 각자의 종목에서 국가대표급 실력들을 갖추고 있어서 졸업과 동시에 실업팀을 가야하는데 당시 대구에는 실업팀이 없었다.
졸업후 필자는 한전을 예상하고 있었는데 한전은 필자가 고등학교시절 장학금까지 주면서 한전으로 영입하려 했었다. 그러나 필자가 대학을 원했기에 한전을 가지 않았지만 대학4학년때도 졸업 후 한전에 와줄것을 요청해 왓었다.
그런데 대구시에서 지역은행인 대구은행에 실업팀 창단을 요구했고. 지역의 스포츠 발전에 기여하기 위해 대구은행이 팀을 창단하기로 하고 졸업반 4명을 2학기부터 장학금 70만원을 매월 주기로 하고 창단절차를 밟았다.
그래서 졸업과 동시에 대구은행에 입사해서 실업팀 선수로 87년부터 활동했다.
실업팀 첫해에 필자는 주로 트랙경기는 3.000msc종목에 참가해 한번도 입상을 놋친적이 없엇다.
늘 3위 이내에 입상했고. 그해 광주전국체전에서 3.000msc에서 준우승. 3일뒤 마라톤에서 준우승을 차지해서 대구시에서 30년만에 마라톤에서 입상하는 쾌거를 거두엇다.
전국체전에서 준우승 후 국가대표로 발탁되었다.
당시에는 풀코스 대회가 몇 없었다.
동아와 전국체전 조선 이렇게 국내대회는 3개가 고작이었다.
국대선발후 동계훈련을 착실히 하고 88년올림픽을 하던 해의 동아마라톤이 올림픽대표선수 선발전을 했었는데 필자는 당시 11위를 했었다.
기록은 2°16'13" 였다. 3위까지 주어지는 선발전에 보기좋게 탈락하였다.
86아시안게임 트랙종목에서도 2위로 아쉽게 탈락했는데 88서울올림픽 마라톤 선발전에서도 탈락하고 말았다.
실력이 그만큼이나 어떻하겠는가.
한달후 전한국육상선수권대회 겸 전국종별육상경기대회에서 종목별 대표선수 선발전을 지르기로 해서 필자는 트랙종목인 3.000msc에서 반드시 우승하겠다고 마음먹고 훈련에 임했고. 감독님과의 치밀한 작전을 짯다.
보통 마라톤선수들은 3.000msc에는 잘 참가하지 않는다. 그만큼 거리는 짤아도 힘들기 때문이다.
마라톤선수들은 보통 5.000m나 10,000m에 주로 참가하는데 필자의 경우는 대학시절부터 장애물종목에 참가해 왓기에 어느정도 자신감도 있엇지만 참가자의 성향을 미리 알고 있었기에 작전을 치밀하게 했다.
보통의 경우 실력이 비슷할 경우는 마지막 100m이내와 피니쉬에 결정되는게 다반사이다.
필자의 경우는 마라톤선수로서 지구력에는 참가선수들보다 우위에 있었지만 전문 3.000msc선수에 비해서는 스피드가 떨어지는게 사실이엇다.
그리고 필자포함 라이벌관계에 있는 대표적인 선수가 5명 정도로서 치열한 경합을 벌이는 구도였다.
필자와 감독님과의 작전은 마지막싸움이 아니라 타 선수가 예상치 못했던 거리에서 먼저치고 나가는 작전을 짯는데 이것이 성공했다.
보통의 장애물경기는 워낙 힘들어서 먼져 치고나갈 경우 십중팔구는 피니쉬에서 잡히고 만다. 그래서 누구하나 쉽사리 먼저 치고나가기를 꺼리고 마지막 스피드싸움을 하는게 보통이지만 필자는 이 통염을 깨버리는 작전으로 전개했다.
3.000m거리 중에서 2.200m를 뒤에서 따라 가면서 호흡을 안정시켰고 800m를 남기고 치고 나갔다. 순간 스피드로 10m이상의 차이를 별려놓고 그대로 밀어붇이기로 처음부터 작전을 짯기에 죽기로 속도를 늦추지 않고 밀고 나갔다.
500m를 남기고 전광판에 비쳐진 뒷 선수들과의 차이가 얼추 20m정도 벌어졌다고 판단되엇지만 속도를 늦추면 막판 뒤집힐것 같아 한바퀴를 남기고 최고의 속도로 달렸다.
아니나 다를까 400m한바퀴를 남겨두고는 뒤에서 쫒아오던 4명의 라이벌들이 속도를 올리는 것이 감각적으로 알수 있엇고. 또 관중석에서의 함성과 주변선수들의 소리에 거리가 좁혀지고 있다는 것을 알수 있었지만 이미 먼저 스파트를 한 이상 그대로 밀고 나갈수 밖에 없었다.
젖먹던 힘까지 다 쏱아부엇다.
마지막 골인 지점 10m쯤에서 결국 추격하던 라이벌들이 포기를 했는지 관중석에서의 탄성이 멈추엇다. 기록은 8°51"71의 그해 최고기록으로 우승했다.
그래서 88서울올림픽대표선수에 당당히 이름을 올릴수 있게 되엇고. 86아시안게임에서 2위로 아깝게 탈락했던 기억을 지우고 당당하게 입성하게 되었다.
필자는 올림픽 후 1년을 더 선수생활하고 조기에 은퇴를 해 버렸다.
충분히 4~5년은 더 경쟁력이 있엇는데 어릴적부터 목표였던 국가대표가 되고. 더군다나 올림픽까지 참가하고 나니 더 이상의 목표가 사라져버려 운동에 대한 미련이 떨어져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