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 지나고 나면 아무것도 아닐 그 마음의 사치
질문은 가끔 그 질문이 가진 어휘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내포할 때가 있다.
어제 받은 질문이 그런 종류였는데, 질문 자체는 감정과 자기 주도권 사이를 조율할 때 각자 어느 정도로 각각에게 힘을 할당하는지에 관한 것이었다.
하지만 그 질문의 배경이 '아니 에르노의 단순한 열정'에 기반한 것이었고, 질문을 한 사람의 단편적이지만 확실한 배경을 알고 있었기에 쉽게 대답할 수 없었다.
나는 대답으로 둘 중 하나를 선택할 수 있었다.
표면에 드러난 질문에만 답하거나, 그 안에 숨겨진 진짜 의도에 답하는 것이었다.
전자는 사회적 답변에 가깝고, 후자는 개인적 답변에 가까웠다. 그 자리에는 세 명밖에 없었으므로, 나는 매우 개인적인 답변을 선택했다.
이 책을 읽은 사람들 중 몇몇은 이렇게 말할 수도 있다. "아니, 불륜한 게 무슨 자랑이라고 이걸 이렇게 구구절절 늘어놓느냐?" 틀린 말은 아니다.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작가가 머리말에 적었듯, 작가 스스로는 그 글을 쓸 때 도덕적, 윤리적 판단을 유보했을지라도 독자에게까지 그것을 강요할 수는 없는 일이다.
그러나 어제 그 질문을 받은 나는 이제 더 이상 이 작품의 단순한 독자일 수 없다. 예술을 위해 자신을 어디까지 몰아붙일 수 있느냐는 질문에 예술가들은 끊임없이 답해왔지만, 독자들은 여전히 그것을 묻고 있다.
마치 예술가는 예술을 위해 자신을 극한까지 몰아붙여야 하는 사람인 것처럼 말이다.
압생트를 마시고, 불륜을 저지르고, 손목을 긋고, 폐병에 걸리는 것까지 전부, 죽지 않은 시인들을 위한 사회를 노래해서는 안 되는 것처럼.
좋다.
그 바람 덕분에 예술가는 작품의 한계를 한정 짓지 않아도 된다. 부서지고 부수며 파괴하고 범하는 모든 것이 작품 안에서 가능해진다.
그러나 그들이 특별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주길 바란다. 상처받을 것을 알면서 기꺼이 칼에 목을 가져다 대는 행위는 작품을 위한 것이 아니라 사랑을 위한 것임을, 할퀴어질 것을 알면서 함부로 사자의 갈기를 흩트리는 행동 또한 작품을 위한 것이 아니라 증오를 위한 것임을.
예술가의 고통을 신화처럼 소비하지 말아 주길 바란다. 그 고통의 근원에는 작품이 아닌 사랑과 증오, 슬픔, 혼란과 같은 지극히 인간적인 감정들이 자리하고 있다.
또한, 작품을 위해 자신을 몰아붙인다면 그 순간부터 그 일은 전혀 예술적이지 않다.
헬리코박터균을 연구하기 위해 균 덩어리를 마시는 행위는 미친 과학자나 하는 짓이다. 매드 사이언티스트라는 말은 있지만, 매드 페인터나 매드 노블리스트라는 말은 없다.
작가들은 억지로 미친 짓을 하지 않는다. 이미 미쳐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