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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랑하고 부드러운 첫 감정

기억은 시간이 지나면 부풀고 재 편집

by 현월안





살다 보면 이름 붙일 수 없을 만큼 어설프고도 순한 감정이 있다. 첫사랑이라고 부르기엔 너무 가벼워 흩어질 듯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누구보다 묵직한 온기로 돌아와 손끝을 데우는 감정. 나에게도 그런 작은 빛 한 줄기가 있었다. 기억의 가장 얇은 층에 남아, 어느 겨울 외투 주머니 속 손이 차가워질 때면 문득 떠오르는, 미완의 계절 같은 사람.



고등학교 1학년이던 어느 해, 옆집에 고등학교 3학년 오빠가 있었다. 그는 아주 깡촌 시골이 집이었고 학교와 가까운 그의 고모댁에서 학교를 다녔다. 우리 집 옆집이 그의 고모댁이었다. 그간은 그가 옆집에 있는지도 서로 존재를 몰랐고 내가 고등학교 1학년 어느 날 갑자기 그 고3 오빠의 인식이 생겨났다. 우리 집과 옆집 사이엔 낮은 담과 수도 펌프 하나가 똑같이 놓여 있었다. 아침마다 세수를 하며 물소리 너머로 스치는 기척이, 내 감정의 시작이었다.



그리고 어느 날, 담 너머로 수줍게 건네진 종이 한 장. 그 얇은 편지 한 장이 내 마음속 잔잔한 파장을 일으켰다. 그 이후로 늘 같은 자리에 편지가 놓였다. 학교에서 있었던 사소한 일상, 책에서 읽은 문장, 어제보다 나아지고 싶은 마음처럼 사소한 내용이었다. 그렇지만 어린 마음을 설레게 하기에는 충분했다. 작은 고민과 소소한 희망을 적은 글이었지만, 그가 말 한 문장이 하루를 반짝이게 했다. 그는 공부를 열심히 했다. 나도 열심히 해서 순위를 놓치지 않았다. 그의 글 속에 굳은 의지가 있었고 사관학교 가는 것을 목표로 그때 이미 꿈을 숨기지 않았다. 내가 그에게 건네는 편지 속에는 주로 책을 읽고 인용된 문구가 전부였다. 문학의 구절을 편지에 담아서 건네면 그는 문학을 좋아하는 사람은 어디에서든 쓰임이 있다며 꿈을 잃지 말라고 응원을 했다. 그의 편지에 담겼던 격려는 어쩌면 지금까지도 내 마음의 한 편을 지키고 있는 오래된 응원인지도 모른다.



그는 꿈대로 사관학교에 진학했다. 떠나기 전, 시내 한 빵집에서 딱 한 번 만났다. 꼭 성인이 돼서 만나자는 말과 마지막 편지에는 사관학교의 꿈을 이루어서 그런지 그 어느 때 보다도 글 속에 힘이 실려 있었고, 그리고 달달하고 부드럽게 그간 1년간의 감정이 쓰여 있었다. 그리고 자기 집 전화번호를 적어놓았고 꼭 졸업하면 전화하라는 말을 적어 놓았다.



그리고 까마득하게 그의 존재를 잊고 살았다. 그러던 어느 해, 세월은 서로 모르게 다른 길 위에 올려놓았다. 막내 남동생의 첫 군 면회를 온 가족이 같이 갔다. 그때는 군대에 배치가 되면 첫 면회는 온 가족이 다 면회를 갔다. 맛있는 음식을 잔뜩 만들어가서 우리 가족은 연병장 한쪽 그늘에서 음식을 나누어 먹었다. 그런데 저쪽 끝에서 제복을 입은 한 사람이 다가오고, 아버지와 엄마와 자연스럽게 인사를 나누는 모습이 낯설 만큼 자연스러웠다. 가까이 오자 그 얼굴이 보였다. 바로 옆집의 그 오빠였다. 사관학교를 마치고 동생이 있는 부대에 임관되어 있었다. 그는 점심 식사를 마치고 운동삼아 산책을 나온 시간에 우리 가족을 알아본 것이다. 우리 가족은 그와 편지를 주고받았다는 사실을 전혀 모른다. 그와 어색하고도 아무렇지 않게 인사를 나누었다. 우연도 이런 우연이 있을까 싶을 정도로 신기하고 묘한 감정이었다.



그는 조용히 나를 불러, 자신이 근무하는 조용한 집무실에서 잠시 마주 앉았다. 십수 년의 시간을 통과해 다시 만난 얼굴은 더 이상 소년이 아니었다. 너무 멀게만 느껴지는 사람 같았고 또 이상하게도 그 순간의 공기는 어릴 적 그 담장의 아침 공기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말하지 않아도 서로가 알고 있는 옛 감정의 잔향이 공간 한쪽에 가만히 앉아 있었다. 그 어색함과 또 알고 있던 시간의 거리와 묘한 감정이 뒤섞였다. 여러 번 우리 집에 전화했다는 말과 우리 아버지가 좀처럼 전화를 바꿔주지 않더라는 말과, 그리고 그동안 그는 열심히 치열하게 살아온 흔적이 보였다. 그리고 이른 나이에 결혼을 하고 아이가 있다는 말을 조심히 꺼내 놓았다.



동생이 군대 생활을 편안하게 할 수 있었던 것은 말하지 않아도 그의 배려 덕분이었다. 그렇게 첫사랑의 인연은 마지막까지 조용하고 선하게 기억 안으로 흘러갔다. 황순원의 소나기에 나오는 한 장면처럼 잔잔하고 평화롭고 아름다웠던 그때의 시간들은 그저 삶의 한 페이지처럼 아주 작게 장식하고 있다.



살다 보면 어떤 시간은 기억이 아니라 촉감으로 남는다. 바람이 차가워질 때, 외투 주머니 속 손끝이 싸늘해질 때, 문득 떠오르는 장면. 첫사랑은 어쩌면 그런 온기다. 손 내밀어 주지 않아도, 이름을 불러주지 않아도, 그 자리에 있었다는 사실만으로 따뜻해지는 온기.



이제는 안다. 기억은 시간이 지나며 부풀어 오르고, 재 편집되고, 때로는 필요에 따라 조금씩 다르게 빛난다는 것을 안다. 그리고 그 이미지는 다른 이보다 그때의 나를 향하고 있다는 것을 안다. 첫사랑을 떠올릴 때 마음이 아릿하고 조금 따뜻해지는 것은, 그 사람이 특별해서라기보다 그때의 내가 가장 순수했고 미완이었기 때문이다. 첫사랑은 누군가를 사랑하는 감정이면서 또 사랑하는 나 자신을 처음 발견하는 경험이다. 타인을 향해 뛰던 감정이, 시간이 지나면 나를 다시 비추는 거울이 된다.



그래서 첫사랑의 기억은 미완으로 남는다. 사랑이 완결되지 못해서라기보다, 그 시절의 내가 아직 다 자라지 않았기 때문이다. 감정과 기억은 늘 어딘가에서 어긋나 있다. 그 불일치는 서로가 남긴 흔적이 서로 다른 마음 안에서 각각 자라났다는 증거다. 그 흔적을 첫사랑이라고 부르는 것일지 모른다.



어쩌면 그때의 그와 나 사이에 오간 편지들은 누군가에게 보여주기엔 너무도 평범한 이야기였을지 모른다. 그러나 평범한 일상이 특별한 감정을 품고 있던 시절의 인인이었다. 그때의 감정과 정서가 오래 머물러 내 안에서 단단해지기도 하고, 때때로 말랑말랑해지기도 하고, 내가 쓰는 글 속에 단단하게 녹아들었을 것이다. 또 내가 읽는 책에 겹쳐서 감정이 살아나고, 내가 사람을 대하는 방식의 온도를 조금 따뜻하게 만들어 주었을 것이다.



첫사랑은 잠깐 그 시절의 인연이다. 하지만 지나갔다는 사실이 그 가치를 흐리게 하지는 않는다. 어떤 인연은 오래 남지 않기 때문에 오래 남는다. 어떤 감정은 완성되지 못했기 때문에 영원해진다. 그리고 어떤 기억은, 잊어버렸다고 생각한 순간 다시 가볍게 떠올라 삶의 표정을 부드럽게 바꿔놓는다.


~~~----==~~~------ㅍ


지나간 시절, 담 너머로 건네지던 편지처럼. 아침 공기 속에서 서로의 존재를 처음 의식하던 그 순간처럼.
말랑말랑한 감정이 자라서 지금의 나를 만든 것처럼. 첫사랑의 인연은 완성되지 않은 문장이었기에 잔잔하게 고요하게 기억 어딘가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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