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모두 돼지 아니면 개
(당연히 스포일러)#8
폭력성, 잔인함, 비겁, 강자 앞의 침묵처럼 마주하기 싫은 인간의 본성이 가장 잘 드러나는 때는 언제일까. 나는 감히 학창 시절이라고 확신한다. 먹여 살려야 할 가족이 없는데도 누군가에게 고개 숙이고, 아무런 보상이 없는데도 누군가를 괴롭히고 짓밟는 사람이 3년 동안 한데 뒤엉켜 살아간다. 학생들 사이에 지배하는 자와 지배당하는 자, 그 사이에서 침묵하는 다수의 관계는 현실 속 빈부의 카르텔만큼이나 공고하여 쉽게 변하지 않는다. <돼지의 왕>은 이처럼 강자와 약자가 뚜렷이 구분된 어느 중학교의 모습과, 약자로 그 시간을 지나온 '경민'과 '종석'의 15년 후를 보여주는 영화이다.
영화는 학창 시절의 권력구조가 처음으로 갖춰지는 시기인 중학교 1학년을 집중해서 보여준다. 경민과 종석은 학생들 사이의 권력구조에서 밑바닥에 위치한 돼지들이다. 쉬는 시간에 큰 소리로 떠들 수 없고, 선생님이 낸 문제를 맞히면 재수 없다고 욕을 먹는 일이 돼지들에게 주어진 일상이다. 특히나 몸이 약한 경민은 같은 반의 불량배인 종빈과 정희의 좋은 먹잇감이다. 권력의 위층을 차지한 이 '개'들이 경민을 괴롭히는 동안 종석을 비롯한 다른 학생들은 경민을 도와주지 못한다. 힘없는 돼지가 설쳤다가는 개들의 타겟이 바뀌기 때문이다.
이처럼 모두가 침묵할 때, 늘 조용히 있던 철이가 불량배들을 두들겨 패고 경민을 구해준다. 철이는 누구보다 강한 힘을 보여준 후에 경민, 종석과 어울린다. 개들보다 강한 힘을 가졌음에도 자신들과 어울리는 철이를 그들은 자신들의 왕, '돼지의 왕'으로 떠받든다. 경민과 종석뿐만 아니라 그동안 개들이 두려워 조용히 살았던 다른 돼지들도 철이를 보고는 개들에게 대항하기 시작한다.
절대적 다수인 돼지들이 뭉치는 것을 개들이 두고 볼리 없었다. 개들은 돼지들에 비해 수가 적지만 조직적이다. 다른 반의 개들과, 다른 학년의 개들과 손을 잡고 철이를 유인한 뒤 린치한다. 이 과정에서 철이는 칼을 쓰게 되고 때마침 현장을 발견한 선생님에게 걸려 퇴학을 당하게 된다.
모든 곳이라고 믿고 싶진 않지만, 대부분의 중학교에는 이런 친구들이 존재한다. <돼지의 왕>에는 수많은 돼지들 위에 군림하는 세 마리의 개들이 등장한다. 가장 강한 개인 '석웅'과 그런 개의 힘을 믿고 설치는 두 마리의 개 '종빈'과 '정희'. 이들은 비록 셋밖에 안되지만 자신들보다 수가 많은 돼지들을 억누르는 방법을 잘 알고 있다. 가장 약해 보이는 돼지를 골라 지속적인 폭력과 협박을 일삼아서 나머지 돼지들에게 두려움을 심어주고 서로 힘을 합치지 못하게 만든다. 이들은 돼지들을 괴롭히는 동시에 길들인다. 개들을 개들로 만들어주는 것은 돼지들의 존재이다. 돼지들의 팔다리를 물어뜯어야만 개들은 살아갈 수 있다.
이 세명은 주인공들과 더불어 영화를 이끌어가는 주요 캐릭터이지만 그들에 대한 정보는 하나도 드러나지 않는다. 경민과 종석, 철이 등 돼지로 등장하는 주인공들이 어떤 생각을 갖고 사는지, 그들을 둘러싼 환경의 어떤 부분이 이들을 돼지로 만들었는지 상세히 보여주는 것과는 대조적이다. 영화에서는 이러한 개들이 어떻게 탄생했으며 왜 돼지들을 괴롭히는지 설명하지 않는다. 이들은 오직 다른 돼지들을 괴롭히는 장면에서만 영화에 등장한다. 개들이 자기들끼리 있을 때에는 착하게 행동한다든지, 이들도 불행한 가정환경을 갖고 있다는 설정은 전혀 심어놓지 않았다. 개로 묘사된 3명의 배경이나 인간적인 면을 철저히 가림으로써 이들이 다른 아이들을 괴롭히는 행동에는 무엇도 변명이 될 수 없다는 것을 말하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종석(맨 앞)이와 경민(분홍 옷+안경)은 그런 개들에 의해 불우한 학창 시절을 보내야 했던 돼지들 중 일부이다. 두사람 뿐만 아니라 사진에 등장하는 아이들은 모두 억눌린 채 살아가는 돼지들이다. 숫자로는 개들의 배가 넘는 이들은 왜 불과 세 마리의 개들에게 굴복당한 채 살아가는 것인가.
경민처럼 몸이 약하고 소심하여 개들에게 항상 물리는 돼지도 있지만, 대부분은 개들의 위협에서 자유롭고 심지어 개들보다 힘이 센 돼지도 존재할 수 있다. 그럼에도 이들이 연대하지 않는 이유는 이들이 개들을 두려워하는 동시에 동경하고, 돼지들을 가여워하는 동시에 창피하게 여기기 때문이다. "난 정말 바보였다. 왜 그 애들처럼 되고 싶다고 생각했을까. 그 애들은 언제나 안전하고, 공격적이고, 사랑받는 개들이다"라는 종석의 말처럼, 아이들이 약해서 돼지가 된 게 아니라 개들이 가진 잔인함과 권력의지를 열망하는 아이들의 마음이 자신들을 돼지로 만들었다. 지금 괴롭힘 당하는 돼지는 자신과 같은 위치에 있는 동지이지만, 언젠가 개가 되었을 때에는 자신이 괴롭혀야 할 먹잇감이기 때문에 도와주지 않은 것이다. 언제가 개가 될 수 있다는 희망, 돼지의 욕망이 개들을 날뛰게 만든다.
다수의 복종과 소수의 통치가 유지되던 균형은 '철이'의 등장으로 흔들리게 된다. 철이는 학생 생태계에서 돌연변이적인 존재이다. 개보다 강력한 돼지는 존재할 수 없다. 만일 개보다 강한 돼지가 나타난다면, 그 돼지는 순식간에 개들의 포섭 대상이 되기 때문이다. 사람을 부릴 수 있는 권리, 기분 내키는 대로 애들을 때리고 착취하는 권리를 포기할, 혹은 그런 폭력으로부터의 자유를 포기할 수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철이가 개가 되지 않고 돼지들과 함께한 이유는 그의 가정환경을 통해 알 수 있다. 학창 시절의 개와 돼지를 나누는 요인은 물리적 힘과 패거리이지만, 사회에서 계급을 나누는 요인은 돈과 인맥이다. 사회에서 밀려난 부모의 밑에서 자란 철이는 지금 개가 되어서 얻을 수 있는 권력은 잠시뿐이고, 언젠가 자신은 다시 돼지가 될 수밖에 없음을 깨닫고 있었다. 그렇기에 그는 돼지와 함께하기를 원했고, 돼지로서 주변을 뒤엎을 수 있는 방법이나 개들에게 충격을 줄 수 있는 방법을 고민했다.
철이가 선택한 방법은 모두가 보는 곳에서의 투신자살이었다. 철이는 개들과 돼지가 모두 운동장에 모이는 월요 조회 시간에 옥상에서 스스로 뛰어내릴 거라고 종석과 경민에게 미리 이야기한다. 돼지들에게는 비겁한 침묵의 결과를, 개들에게는 잔인한 행동의 결과를 마음속에 평생 새겨주는 게 철이의 목표였다. 원래의 계획대로 철이는 자살(?)하게 되지만 현실은 달라지지 않았다. 철이의 자살 이후에도 개들은 개들로, 돼지들은 돼지로 남았다.
유족의 동의나 용서도 없이 스스로 회개하고 뉘우쳤다고 말하는 살인범처럼, 개들은 커가면서 자신들의 의지와 반성에 따라 언제든 인간으로 돌아갈 수 있다. 반면 돼지로 학창 시절을 보낸 아이들이 인간의 삶을 찾기란 쉽지 않다. 종석과 경민 두 사람은 철이의 죽음 이후 평생을 트라우마 속에서 살았다. 철이의 자살로도 바뀌지 않는 세상에 절규하며 경민은 15년 전 철이가 떨어졌던 학교 옥상에서 뛰어내리고, 영화는 그를 바라본 종석의 독백으로 끝이 난다.
이곳은 차가운 아스팔트와 그보다 더 차가운 육신이 뒤엉켜있는 바로, 세상이다.
<돼지의 왕>을 본 관객들 중에는 영화 속 중학생들의 싸움이 너무 잔인하게 묘사됐고, 실제 학교 폭력 실태를 과장했다는 의견이 많았다. 물론 폭력의 지나친 표현은 관객들이 영화 속 상황을 현실로 받아들이는데 걸림돌이 될 수 있다.
관객들이 불편함을 느끼는 이유는 영화 속에서 자신은 어느쪽이였는지를 찾고 싶지 않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영화에 나오는 학생들은 오직 개와 돼지로만 나뉘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은 학창 시절 자신의 위치를 돼지와 개 사이의 어딘가로 여기며 살아간다. 누군가를 괴롭힌 적도 없지만 쭈그려 살지도 않았고, 개들과 친하게 지내면서도 돼지가 두드려 맞는 모습을 보면 용기 있게 말리기도 했던 사람이 자신이라고 생각한다. 정말 그럴까. 애초에 그런 위치가 존재하기나 할지 의문이다.
내가 제일 무서워하는 게 뭔지 아냐? 너네가 10년이나 20년이 지나 어른이 됐을 때 지금을 생각하면서 야~ 그때 참 좋았지 않냐 그때가 그립다 이딴 소리를 할게 너무 무서워. 석웅아 잘 들어 아마 너한테 그런 미래는 없을 거다. 네가 나중에 이때를 생각하기도 싫을만한 중학교 시절로 만들어 줄게 어?
철이가 싸움을 가장 잘하는 개인 석웅을 때려눕힌 후 석웅에게 던진 말이다. 철이의 바람과는 달리, 현실에는 석웅처럼 과거를 추억하는 사람들이 많다. 만일 필명이 아닌 내 이름으로 이곳에 글을 썼다면, 나는 절대 <돼지의 왕>에 대한 리뷰를 쓰지 못했을 것이다. '그 시절에 나는 애들을 때리지 않았고, 지나고 나니 맞았던 애들이 참 안됐다.' 따위의 성찰조차 위선이기 때문이다.
<돼지의 왕>은 학창 시절을 지나온 모두의 마음을 도려내기 위해 만든 작품 같다. 대부분의 우리는 개들처럼 다른 애들을 괴롭히지 않았고, 돼지처럼 폭력 앞에서 침묵하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물론 우리들은 그러지 않았다. 저 나쁜 놈들처럼 친구의 뺨을 때리지 않았고, 저 겁쟁이들처럼 맞는걸 보고 참지 않았고, 자신들을 위해 친구를 옥상에서 밀어버리지도 않았다.
다만 우리는 나보다 약한 친구를 말로 조롱하거나, 어쩌면 뒤통수를 한 번 때렸봤거나, 화가 나서 남의 책상을 뒤엎은 뒤 그냥 지나간 적이 있을 것이다. 약한 애가 심하게 맞는 장면을 보면 말렸겠지만, 그 애가 교과서를 뺏기거나 쉬는 시간에 빵을 사 오라는 심부름을 할 때는 그냥 지나친 적이 있을 것이다. 어떠한 형태로든 일방적인 폭력과 지시가 졸업 때까지 이어졌다면, 우리는 모두 돼지 아니면 개로 그 시절을 지나온 셈이다. 개가 아니어서 다행이고, 돼지여서 부끄러운 기억을 갖고 살아야 한다. 다른 사람들은 모르겠지만 나는 그렇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