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 책과 글은 허세의 도구였다. 커피 한 잔을 옆에 두고 키보드 자판을 두드리는 내 모습에 취해 있었다. 짧은 독후감을 인스타그램에 올리고 나서부터는 좋아요 알람이 올 때마다 유명인이라도 된 기분이었다. 비슷한 듯 다른 해석을 가진 사람들과 댓글을 주고받을 때는 지식을 탐구하며 사색을 나누는 18세기 귀족이 된 듯했다. 책을 읽고 교양 있게 이야기를 나누는 내가 멋져 보였다. 더 멋져 보이기 위해서 북클럽을 만들어야 했다.
때마침 도서관으로부터 20-30대를 위한 북클럽을 만들어보지 않겠냐는 제안을 받았다. 같은 동네(생활환경), 비슷한 나이대. 두 가지 공통점도 있으니 더 심도 있는 대화를 나눌 수 있을 거라는 기대감이 생겼다. 그렇게 ‘말하기 듣기 쓰기 (말.듣.쓰)’라는 북클럽을 만들었다. 거창하게 시작했지만 책에 대한 고찰을 나누기엔 내 배경지식은 그리 넓지 않으며, 평일 저녁은 철학적 사유를 늘어놓기보다는 적당한 거리에서 공감과 이해를 던지는 따뜻함이 필요한 시간대라는 것을 깨달았다. 허세와는 거리가 멀어졌지만 매달 셋째 주 목요일은 한 달 중 가장 기다려지는 날이 됐다.
친구들에게는 차마 드러내지 못했던 영역이 책 모임에서는 개방됐다. 죽음에 대한 고민은 친구들 사이에서는 분위기를 망치는 소재였지만, 독서클럽에서는 각자의 두려움과 무기력함을 토로하고 죽음과 거리를 두고 경계하는 사람과 항상 곁에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으로 나뉘어 서로 다른 삶의 방식을 엿볼 수 있는 시간을 주는 이야깃거리였다. 인생에 관한 책을 읽고 난 뒤 각자의 삶을 포장 없이 말하기도 했다. 나는 퇴근 후 공부와 운동을 하는 이유는 성취감이나 미래에 대한 준비 같은 건전함이 아니라 현실에 대한 불안과 뭐라도 해야 한다는 압박감이라는 고백을 했다. 그 누구도 진지하다거나 오글거린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인생' 시리즈의 두 번째 장을 장식하는 이번 달의 책은 『다정한 것이 살아남는다』(디플롯, 2021)였다. 엄청난 두께감을 자랑하는 벽돌 책이라 완독 하지 못하는 사람이 많으면 어쩌지, 하는 걱정이 무색하게 "딱딱한 다정주의", "마지막 한 문장을 위한 (꽤 순조로운) 빌드업"이라는 한줄평과 함께 평균 별점 3.6점(5점 만점)으로 시작했다.
표준국어대사전에 따르면 '다정하다'는 '정이 많다. 또는 정분이 두텁다'로 풀이된다. 각자에게 다정한 것이 무엇인지, '다정하다'를 어떻게 정의할 수 있을지부터 이야기를 꺼냈다. 다정함이란 겨울철 집에 들어오자마자 훅 끼치는 온기와 같은 감각이기도 했고, 약속하지 않아도 공동으로 쓰는 물건을 남들이 편히 쓸 수 있도록 가운데에 계속 두거나 내가 먹으려고 사온 간식을 나눠준다는 행위이기도 했다. 온갖 다정한 사람, 행위, 장소를 쏟아내고 난 뒤 "당신에게 인간은 다정한 것인가요?"라는 질문으로 책을 들어갔다. 얼굴과 이름도 모르는 사람을 위해 장기기증을 하고, 길가다 위험에 처해있는 사람을 돕기도 하는 인간은 다정하다는 순정파, 개인이 다수를 이길 수 없다 보니 살아남기 위해서 다정하지 않은 사람도 다정한 척을 하게 됐다는 위선파, 남에게 다정하게 굴면 돌고 돌아 나도 그 다정함을 경험할 날이 온다는 믿음으로 다정하게 군다는 순환파로 나뉘었다.
생명과학을 꽤 열심히 공부했었음에도 '적자생존'의 '적자'를 잘못 이해하고 있었다고 솔직하게 털어놓기도 했다. 나와 같이 빙하기나 지각변동 같은 환경의 변화에 유연하게 대처할 수 있는 종이나 운 좋게 새로운 환경에서 살아가기에 적합했던 종이 적자라고 생각한 사람들이 있었고, 진화학에 관심이 많아 적자의 의미를 정확하게 알고 있었던 사람도 있었다. 말은 안 했지만 적는 사람(writer)이 살아남는다고 해석한 사람은 없었을까 궁금했다.
사람 가축화 특징인 하얀 공막을 말하다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의 돌멩이 눈까지 이야기가 번져나가기도 했다. 돌멩이를 주인공과 딸의 서사로 볼 수 있었던 이유는 돌멩이에 비닐장갑이나 신발이 아닌 인형 눈알을 붙였기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던져보았다. 검은 베이글과 시각적으로 대조된다는 깊은 뜻은 잠시 접어두고, 삶을 버티게 하는 건 서로의 눈을 맞추고 나누는 소소한 수다나 장난, 즉 눈을 통해 느끼는 다정함이라는 해석으로 이어졌다.
마지막 발제장에서는 집단을 지키기 위해 타인을 비인격적 존재로 비인간화 경향의 사례를 생각하다 찾아온 씁쓸함에 속상해했다. 인종차별, 난민이슈, LGBT, 노인혐오 등 우리 사회에 가득한 혐오를 모두가 인지하고 있었다. 표현의 자유라는 이유로 혐오 콘텐츠를 제한할 수 없다면, 제대로 된 교육과 ‘맑은 물 부어주기’로 다정하게 만들 수 있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우리는 모두 초등학교 시절 아프리카 아이들이 굶어 죽고 질병에 노출되어있으니 후원해줘야 한다는 영상을 수없이 봤다. 흑인을 비인간화하게 된 건 여기서부터 출발했던 게 아닐까. 조나단이나 파트리샤 같은 유투버를 먼저 접했으면 웃긴 친구들로만 여길 수 있지 않았을까. 저자는 긍정적인 접촉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공감하는 데 도움이 된다고 했다. 그러나 상상이라는 건 경험을 기반으로 이루어진다. 타인을 사랑하도록 배운 자들만이 다정한 인간으로 자란다는 데 모두가 동의했다. 흙탕물에 물을 부으면 언젠간 흙은 가라앉고 투명하지는 않더라도 마실 수 있는 정도의 물은 된다. 다정한 콘텐츠가 쏟아진다면 혐오 콘텐츠가 묻힐 수 있다. 우리는 다 같이 다정함으로 나아질 세상을 기대했다.
모임이 끝날 무렵 모두 첫 페이지로 돌아와 인간은 다정한 것인지 되물었다. '다정하다고 생각하려고 한다.'나 '다정해야 한다'로 온전한 다정함은 아닐지라도, 인간은 다정을 향하고 있다는 마음은 같았다. 친절함과 다정함이 멍청함과 만만함으로 퇴색되는 사회에 대한 연민을 토로하며 우리는 이 문장으로 모임을 마무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