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피형 인간

by 주디




1.

최근 들어 회피형, 불안형, 혼란형 애착 유형에 대한 내용을 종종 볼 수 있다. 그중 가장 많이 보이는 유형이 '회피형'이다. 회피형과 연애하는 방법, 회피형과의 재회, 회피형의 이별 등. 그중 100% 회피형인 경우는 극히 드물 것이다. 선택적 회피형이거나 연애 상대가 연인을 회피형으로 만들거나 반은 회피형, 반은 안정형이거나. 그래서 최근엔 '라이트 회피형'이라는 단어도 보인다. 나는 회피형에 가깝다. 순수 회피형이라기보다 애착 유형 3가지 중 나와 유사한 것을 고르라면 회피형 인간이다. 이 말을 하면 주위 사람들은 놀란다.


"전혀 티가 안 나는데."

"회피형이라니. 의외네."

"에이. 네가 무슨 회피형이야."


모두 이런 반응이다. 회피형이 아닌 척 살아가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다. 사회생활에서도 나의 사생활에 끊임없이 관심을 갖는 사람만 없다면 잘 지내는 건 어렵지 않다. 회피형은 관계가 밀접해지는 것을 두려워한다. 사회화 하며 잘 어울리는 것과 내 울타리 안으로 들어오는 것은 다른 것이므로.





2.


성인 애착 유형 검사 & 회피형 인간의 대표적인 특징. 9가지 중 3~4개를 제외하고는 공감하는 부분이다. 이 중 몇 가지 설명하자면 1번 혼자 있는 시간이 편하다. 이런 특성으로 친구가 별로 없다. 대부분의 시간은 내가 나와 놀아주며 보낸다. 누군가 나를 불러내면 신나게 놀다 오겠지만 구태어 약속을 잡아 밖을 나가지 않는 편이다.


6번 새로운 일에 대한 도전과 경험은 나를 성장하게 하기에 선호하지만 5번 새로운 사람을 만나는 것은 언제나 어렵다. 낯을 가린다고 표현하지만 실상은 사람을 경계한다. 그 경계가 무너지고 마음을 열고 가까워지면 무수히 깊은 마음으로 애정을 갖고 최선을 다한다. 다만 그 단계까지 가려면 시간, 기회, 대화 등이 많고 통해야 한다. 그래서인지 연애를 시작하기 어렵다. 소위 말하는 금사빠와는 거리가 먼 타입이다. 그렇다고 남자를 기다리게 하는 것이 이기적이고 미안하다는 것을 모르지 않는다. 한번 마음을 열면 온 열정을 다해 쏟아낼 것을 알기에 무서워 도망치는 것일지도 모른다.


9번 남들에게 속마음을 잘 드러내지 않아 서운해하던 연인들이 있다.


"누나는 너무 비밀이 많아."

"누나에 대해 알고 싶어. 다 얘기해 줘. 왜 말을 안 해줘?"


연하의 남성분들과 연애했기에 누나라고 칭했다. 남자친구와 가까워지면서 타인보다 나에 대해 더 많은 이야기를 함에도 불구하고 나의 X들은 내가 비밀이 많다고 했다. 다른 면에 끌리는 것인지 나는 상대를 품어주는 역할을 했고 남성분들은 미주알고주알 사사로운 것들까지 공유하고 의지하고 싶어 했다. 그리고 모든 남성이 나보다 불안도가 높았다. 남자 친구가 불안해할 때 내가 차분하게 큰 기복 없이 대했기에 그들은 내 옆에서 안정감을 느끼기도 했다. 이해가 되면서도 아이러니한 부분이다.




3.


이것은 INTJ인 나의 MBTI 특성과도 비슷하다. 동생들은 나에게 로봇이라 부른다. 인티제는 따뜻한 로봇이라는 말이 있다. 그래서 항상 상대가 상처받지 않도록 말을 예쁘게 하려고 노력한다. 어려서부터 사회화를 위해 주위 사람을 보며 습득했다. 사회화를 거쳐 많이 성장했다고 자신했지만 사회에 던져진 내 모습은 처참했다. 신입 시절부터 동기를 보고 이럴 땐 이렇게 공감을, 이럴 땐 이런 반응으로 선배를 대해야 하는구나 보고 배웠다. 선배들과의 술자리에서 업무 중 가장 힘든 게 뭐냐고 물어보면


"대화요. 출근해서 환자, 주치의, 타 부서 직원들과 대화하는 게 가장 힘들어요. 어떻게 해야 중재자로서 역할을 잘하는 것인지 모르겠어요."


이 말을 들은 선배들은 전혀 고민이 아니라고 답했다. 이유는 내가 이미 잘 어울리고 표현도 당당하게 하며 환자들과 친분을 잘 쌓아서라고 했다. 그땐 선배들의 반응이 이해가 가질 않았는데 MBTI를 알고 INTJ가 페르소나의 달인이라는 것을 알게 되며 깨달음을 얻었다. 그때 말하지 못한 또 한 가지 어려움은 내 사생활을 끊임없이 궁금해한다는 것. INTJ 회피형 인간은 사회생활을 하며 사생활을 공유하는 게 몹시 어렵고 여전히 적응되지 않는 부분이다.



4.


환승연애 유식은 회피형일까? 나의 연애 방식이 유식과 비슷한 부분이 많지만 난 회피형이고 유식은 회피형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유식은 민경을 케어하며 돌보는 연애를 했다. 민경은 유식과의 이별 사유에서 결혼 이야기를 할 때 한 번도 대꾸해 준 적이 없다고 했다. 그 부분을 보며 나의 모습이 떠올랐다. 30대 초반까지는 연인이 가볍게 던지는 결혼 이야기에도 대꾸를 하는 게 어려워 웃으며 듣고만 있었다. 30대 중반부터는 상대의 말에 호응을 하지만 적극적으로 결혼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진 못 했다. 그래서 X들은 울거나 화를 냈다. 상대를 사랑하지 않아서가 아니다. 그들을 돌보고 나에게 사랑받는 느낌을 풍족하게 느끼도록 노력했다. 주위에서 결혼을 왜 아직 안 했냐고 물으면 '결혼하고 싶은 사람을 만나지 못해서.'라고 답한다. 그리고 동시에 '결혼 제도가 무서워서.'다. 세상에 좋은 사람은 없다지만 내가 결혼을 하고 배우자, 엄마, 며느리, 딸로서 좋은 사람이 될 수 있을까? 결혼을 하면 최선을 다하겠지만 언제나 자신이 없었다.


유식은 민경을 행복하게 해 주기 위해서 프리랜서로 잠을 줄여가며 일과 데이트를 병행했다. 민경은 줄어든 만남 횟수와 데이트 중 졸려서 자는 그의 모습에 이별을 택했다고 한다. 난 유식이 회피형이 아니라 결혼이라는 단어에 책임감을 부여한 진중한 남자라고 생각한다. 결혼 적령기에 다다라 모아둔 돈 없이 쌓아둔 커리어가 부족하다면 그 또한 여자들로부터 외면받을지 모르기에 유식의 행동이 나쁘게 보이지 않았다. 환승연애를 촬영하며 재회활 마음이 없다고 말하는 민경의 말과 잡도리를 하는 모습에 유식은 서서히 마음을 접은 듯싶다.


나 또한 결혼이라는 단어에 무게감을 실어 쉽사리 내뱉지 못 했다. 회피형을 비난하기 전에 내가 상대를 회피하게 만들지 않았는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이것은 나에게도 해당하는 이야기며 끊임없이 자아성찰을 하고 누군가를 아프게 하지 않기 위해 노력하는 중이다. 모든 회피형이 회피만 하진 않는다. 단, 순수 회피형은 상당히 이기적인 모습으로 방어기제가 드러난다. 상대를 피마르고 힘들게 하기에 사랑하지 않을 것을 권유한다.




5.


'만약에 우리'의 원작인 '먼 훗날 우리'의 한 장면이다. 난 이 장면을 보고 마음이 찡했다. 사랑하지만 그럼에도 헤어졌다. '사랑해서 보내준다.' 회피형을 가장 잘 나타내는 문장이다. 영화 속 주인공이 회피형 일지 아닐지는 모른다. 다만 주인공들은 힘든 상황에서 자신을 보호하는 방식으로 회피를 택하기도 했다. 두 영화 속 여자 주인공은 지쳐서 남자를 떠났다. 회피형은 회피를 하며 자신을 보호한다. 난 사랑해서 헤어진 적은 없지만 사랑함에도 떠나보낸 경험이 있다.





최근 연애에서 나의 연인은 무척이나 힘든 상황에 놓였다. 삶이 무너지듯 아파했고 외상을 경험했다. 미래가 보이지 않는다는 말에 '나는 너 자체로 충분해.'라는 말 밖에 해줄 수 있는 위로가 없었다. 그는 나를 잃는 것보다 더 힘든 게 많았고 연애는 자연스레 후순위가 됐다. 나는 삶에 여유가 있어 상대를 잃는 게 가장 힘들었다. 그때 그와 대화를 하며 '사랑하는 사람이 힘들 때 내가 힘이 되지 않는구나. 나는 상대를 행복하게 해 줄 수 있는 사람이 아니구나.' 하는 생각에 상대의 의견을 존중해 붙잡지 못하고 떠나보냈다. 제대로된 대화도 없이 그렇게 끝났다. 우리는 이별에만 몇 달을 소모했고, 각자의 일상으로 돌아왔다. 우리는 '만약에 우리' 주인공처럼 헤어져도 가끔 연락은 했으면 좋겠다는 말을 하곤 했다. 이건 큰 용기가 필요하다. 어쩌면 먼 훗날 나도 여자 주인공처럼 '내가 그때 너를 놓쳤어.(I miss U)'라고 말할지도 모른다. 그리고 남자 주인공처럼 '나도 보고 싶었어.(I miss U)'라는 듣게 될지도 모른다. 혹은 다른 사람과 또다시 기억에 남을 사랑을 할지도 모른다. 초라한 순간에 만나 서로의 바닥을 보며 울었다. 그 동안의 시간을 돌아보며 마지막 순간까지도 내 모습이 초라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 나의 사랑은 단언코 초라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