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신이나 효자의 살해 행위는 경감해 준 판례가 있다"며 형량을 감해야 한다고 주장하지만 결국 고영근 사형,
노윤복 무기징역형을 언도받게 됩니다. 이 사건은 당시 우리나라에도 널리 알려져
이들 애국지사를 사면토록 해야 한다는 의견이 분출되고, 배후조종한... 고종 역시 하야시 곤스케
주한 일본공사를 불러 선처를 요청합니다. 이에 민비 살해사건의 주도자인 고무라 외상은
하야시 공사에게"한국에 대한 호의 표시로 천황의
명으로 이들의 등급을 한 등급씩 감형해 줄 터이니 고종 황제폐하에게 잘 설명하라"고 지시합니다. 즉, 일본 천황의 시혜로 감형된다고 생색을 낸 겁니다.
조선 국모를 살해한 작자들이 적반하장. =.= 이후 1904년 고영근은 사형에서 무기징역으로,
노윤복은 무기징역에서 12년 형으로 각각 감형되었고 고종은 특사로 방문한 이토 히로부미에게 고영근의
한국 송환을 특별히 당부하기에 이릅니다. 이후 고영근은 11년만에 석방되어 고국으로
돌아 와 고종에게 임무 완수 보고를 드린 후 고종이 승하하자 고종과 민비의 능 옆에 집을 짓고
능을 지키는 능참봉으로 평생을 살다 갑니다. T.T 이처럼 우범선이 피살될 당시 우장춘은
우리 나이로 겨우 5세. 어머니 사카이 나카는 둘째 아들을 임신 중인 상황이었습니다. 갑작스런 남편 사망에 본인 역시 부모도 없이
언니 하나만 있어 의지할 데가 없던 우장춘의 어머니는 돈을 벌기 위해 오랫동안
우장춘을 도쿄 사찰인 희운사(喜運寺)에 맡기게 됩니다. 당시 우범선과 사카이 여사의 중매를 섰던 이가 바로
희운사 주지 스님이었거든요… 이 같은 소식에 당시 일본 망명 중이던 박영효가
"아버지 우범선이 일본에 도움을 준인물이니 마땅히
후손을 돌봐줘야 한다"고 일본 정부를 설득해 조선총독부 사이토 미노루 총독이 중학교 학비와
양육비가 지원하게 도움을 주어 드디어 우장춘은 어머니가 있는 구레시로 돌아가
구레 중학교에 입학하지만 아버지도 없이 일본 땅에서 조선인으로 차별받는
불우한 삶을 살게 됩니다. 하지만 어머니 사카이 나카 여사는 비록 글을 쓰고
읽지 못했지만 강단 있는 여성이었습니다. 결혼 중매 당시에도 이미 살해 위협을 받는 망명객임을
알면서도 그 인물됨에 반해 결혼했고, 남편의 암살 가능성을 줄이고자 언니네 집 근처로
이사를 가는 등 남편을 보호하지만 결국 살해되자, 다음날 집에 찾아온 신문기자들에게 "그토록 조심하라고
했는데 그의 운명이 거기까지였나 보다. 안타깝다."라고 인터뷰에 응할 정도로 냉철하게
현실을 직시했습니다. 그랬기에 재혼하지도 않고 홀로 우장춘을 키우며
학교에서 따돌림받고 좌절하던 우장춘에게 “길가에 핀 민들레는 아무리 짓밟혀도 꽃을 피우는데
사내가 쉽게 눈물을 보이고 좌절하면 되느냐”고 다독이며 강하게 키우셨다고 하네요. 이에 우장춘 선생은 “조선의 혁명가였던 아버지처럼
세상에 도움이 되는 사람이 되어라”는 어머니의 독려에 각성하여 열심히 공부에 매진합니다. 당초 수학에 흥미를 느껴 공학부 진학을 꿈꾸지만
장학금을 지원하는 조선총독부가 '조선은 농업 국가이니 농과대학에 가서 연구하라'며
등을 떠밀어어쩔 수 없이 1916년 4월 1일 도쿄제국대학
부설 전문학교 농학부 실과에 입학합니다. 그리고 입학 초기에 자신의 정체성을 인식하게 되는
결정적 사건을 접하게 됩니다. 어느날 조선총독부 관리가 도쿄에 거주중인
조선 출신 학생들을 모아 놓고 천황폐하의 은덕에 대해 일장연설을 하자
와세다 대학생 김철수가 단상에 뛰어 올라가 그의 멱살을 잡고 항의하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그 자리에서 김철수는 우장춘을 알아보고선
"너의 부친이 매국한 것에 속죄하려면 조선 독립을 위해 네가 배운 것으로 봉사하고 절대 너의 조선인 성을
갈아서는 안된다"고 다그쳤다고 합니다.
이에 아버지의 진실에 대해 비로소 알게 된 우장춘은
큰 충격을 받았다고 하지요. 이에 조선인으로서의 숙명을 더 자각하면서
1919년 8월에 졸업한 우장춘 선생은 1920년 일본 농림성 농사시험장에 취업해
1937년까지 근무하며 나팔꽃 유전 연구에 몰두합니다. 이 당시 부업으로 중학생 대상 과외를 했는데 무조건 암기하도록 가르치지 않고직접 생각해 풀 수 있도록
근본부터 착실히 가르쳐 주자 그 부모가
매우 흡족해 했다고 합니다. 그러던 어느날 그 학생의 이모인 와타나베 고하루
(渡邊小春)가 방문했다가 두 사람 사이에 애정이 싹트게 되었다네요. ^^ 너무 착실한 도쿄제국대 출신 과외선생에게
흡족해 하던 학생의 어머니는여동생과 결혼을 주선하고
우장춘의 어머니도 동의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녀의 부모는 우장춘이 조선인 혼혈이란
이유로 결혼을 극심히 반대하고 나섭니다… 그러자 와타나베 고하루는 단호히 친정과 의절하고
1924년 우장춘과 결혼한 뒤시어머니를 지극 정성
모시고 남편의 뒷바라지를 착실히 했다고 하지요. 이처럼 우장춘은 현명하신 어머니와 아내 덕분에
연구에 매진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차마 자녀들에게는 자신과 같은 고난을
물려줄 수가 없다고 여긴 우장춘은 아내의 조언을 받아들여, 친정과 의절한 고하루 여사가
지인인 스나가 고헤이의 양녀가 되고 본인은 데릴사위가 되는 형식으로 새로이
스나가 나가하루(須永長春)란 일본 이름을 받고 자녀들에겐 스나가 성씨를 쓰게 하지만
본인은 새 성씨를 쓰지 않고 일본 논문에는
우장춘(禹長春),영어 논문에는 'Nagaharu U'로
표기하며 조선인이란 정체성을 지킵니다. 하지만 신혼생활의 즐거움도 잠시, 농사시험장
동료들이 차별을 하자그는 다시 이를 악물고
낮에는 농사시험장에서 근무하며 야간 박사 과정을
밟아1930년 나팔꽃의 유전에 관한 주제로
박사 논문을 완성합니다. 다음날 출근해 도쿄대학에 제출하기로 하고
연구소에 논문을 두고 온 그날 밤, 농사시험장에 불이 나 모든 자료와 논문이 불에 타
사라지게 됩니다. T.T 그러나 이에 굴하지 않고 이번엔 유체 종자에 대한
연구를 시작해1935년 가을 논문을 제출하고
드디어 1936년 드디어 도쿄제국대학 농학박사 학위를
따게 됩니다. 흔히 우장춘 박사가 한국 최초의 농학박사라고
알려져 있는데 그보다 앞서 임호식 박사님이
일본 홋카이도 제국대학에서 곰팡이 연구로
박사 학위를 취득해2번째 농학박사 취득자이긴 했습니다.
5년전 화재 사건만 아니었으면
첫번째 농학박사이셨을텐데요… 어쨌거나 이때 우장춘이 박사학위로 낸 논문이
"배추 속(屬) 식물에 관한 게놈 분석"인데 이 논문은 세계 육종학계를 놀라게 했으며
'종의 합성 이론'으로 불리며 엄청난 명성을 안겨 줍니다. 와우… 80년 전에 게놈 분석이라니…O.O 이게 당시에 왜 큰 충격을 주었냐면 그 때까지
'종의 분화는 자연선택의 결과'라고 여긴 다윈의 진화론 자체를 수정해야 하는
대단한 발견이었기 때문입니다. 이 이론은 1935년 실험을 통해 입증한 것으로,
같은 종끼리만 교배가 가능하다는 정설을 깨고 종은 달라도 같은 속의 식물을 교배하면 새로운 식물을
만들 수 있음을 입증한 겁니다. 즉, 50만년~100만년 전에 친척 사이인
배추와 양배추 간 자연교접을 통해유채라는
전혀 새로운 종이 지구에 탄생한 것을 규명한 것인데, 이런 식물간 교배 모델을 ‘우장춘 트라이앵글’이라
부른다고 하네요.
이 연구는 해외 식물학 교과서에서 여전히
주요하게 다뤄지고십자화과 식물(배추,유채,양배추)
연구시 필수 인용 논문이어서 전 세계적으로 유명하지요. 다만 안타까운 건 외국학자 대부분은
우장춘 박사를 일본인이라고 알고 있다는 겁니다. 뭐 지금도... 온라인 포털 검색시 우리나라보다
일본에 우장춘 박사 관련 자료가 더 많고본격적인
우장춘 박사 전기도 일본인이 집필했습니다. 우리나라 자료라곤 보통 어린이용 위인전 밖에
없는데 그것도 예전 일본에서 나온 어린이용 세계 위인전 자료를 번안한 수준… 저 역시 우장춘 박사 관련 자료를 찾다가 일본 자료를
더 많이 인용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당시에는 세계를 떠들썩하게 만든 논문을
발표해 도쿄제국대학 농학박사 학위를 받았음에도 성도 바꾸지 않고, 일본 국적 취득도 거부하자
일본 학계에선 그를 교수로 채용하지 않아 결국 1937년 민간 종묘회사에 취직할 수 밖에
없었다고 하네요... T.T 이후 그가 근무하던 교토의 '타키이' 종묘 회사는
우 박사가 개발한 '완전 겹꽃 페튜니아' 종자로 10배 이상의 이익이 생겨 떼돈을 벌었고,
그의 명성은 국제적으로 더더욱 높아졌습니다.
(페튜니아 겹꽃) 이후 1945년 해방이 된 대한민국에선 세계적인
육종학자로 손꼽히던 우장춘 박사를 모셔오기 위한 ‘우장춘 박사 환국 촉진위원회’가 결성되어
성금 모금운동이 펼쳐지자대통령까지 나서서
적극적으로 귀국을 요청하게 됩니다. 이를 주도한 인물은 동경제국대학 출신의 김종 박사
등 지식인들이었는데 우박사의 귀국을 애타게 요청한
것은 당시 인구 중 80%가 농사에 종사하면서도 우수 종자와 비료가 부족해 만성적인 식량 부족
상황을 해결하는 것이국가 차원의 최우선 과제였기
때문이었습니다. 일제 통치기간 조선총독부는 일본으로 반출할
쌀과 보리 생산량 증대에만 신경을 쓰고 채소 개량에는 무신경했기에 배추, 무 등 주요 채소의
씨앗을일본에서 계속 수입해야만 하는 상황이었다죠. 그러다가 해방이 되면서 일본으로부터 종자 수입이
막혀 버리자우수한 육종학자가 절대적으로 필요했고
세계적 농학박사로 유명한우장춘 박사가 자연스럽게
주목받게 된 것이죠. 이에 미리 한국농업과학연구소를 만들고
소장 자리를 비워놓고선 우 박사를 부르게 됩니다. (한국농업과학연구소는 1953년 중앙원예기술원으로
개편, 1958년 한국농업과학연구소 원예시험장으로 개편) 하지만 당시 국회에서 귀국 요청 논의시 '아버지가 반역자이므로 받아들일 수 없다'는반대 주장도 만만찮게
많았다네요. 그렇지만 '아버지가 잘못한 일을 아들에게
책임을 물을 수 없지 않느냐,지금 그가 없다면 우리
농촌을 살릴 수 없다."는 주장이 팽팽히 맞서면서
결국우박사 본인에게 귀국 여부를 묻는 편지를
보내게 됩니다. 즉, 국가 차원에서 공식 초청하는 게 아니라 개인이
자발적으로 올지 말지 판단하라고쓱 책임을 미룬
것이죠… =.= 당시 귀국 문의 편지를 받은 우 박사는 이미 2남 4녀를
둔 가장이었는지라현실과 애국심 사이에서 갈등을
느끼게 됩니다.
해방 전인 1941년 배다른 누나들을 찾으러
강원도 철원까지와 본 적이 있지만 해방된 조국은
남북으로 나뉘어 38선에선 끊임없이 크고 작은
전투가 이어지는 등불안한 상황인 데다가
정작 본인은 한국말도 전혀 모르고 아버지의 과오 때문에
친일파로 비난받을 우려도 있는 등수많은 변수가
그의 앞에 놓여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미 다카이 종묘회사에서는 패전 후 우박사를
내쳐 장법사라는 절에서 온 가족이 기거하는
형편이었습니다. 일본이 패망해 울분에 쌓였던 회사 간부들이
우장춘 박사가 그동안 1주일에 한번 씩 기숙사에서
조선인 직원들만모아놓고 별도로 강의해 온 사실을
트집잡은 것이었죠… 이에 그는 오랜 고민 끝에 결국 일본에 가족을 남겨 둔
채 나홀로 귀국을 결심합니다. 그러자 귀국추진위원회 회원들이 일본에 남을 가족의
살림에 보태라며 국민 성금 1백만원을 모아 전달했지만 이 돈을 가족에게 주지 않고 연구용 각종 채소 종자와
실험 기자재를 사는데 다 썼다고 하지요... T.T 그제서야 일본 정부는 세계적 육종학자의 한국
귀국이 달갑지 않아불안한 한반도 사정을 들먹이며
귀국을 만류하면서 출국 허가를 내 주지 않았다고 합니다. 게다가 1950년 당시엔 한일 국교 수립 전이라 일본
정부의 허락 없이는일본 재입국이 불가능했기에
우박사 본인도 다시는 일본에 못 돌아올 것을
예감하셨는지가족과 마지막 사진을 찍습니다.
(귀국 전 마지막 가족 사진… 맨 오른쪽 넷째 딸은
이후 교세라 그룹 회장 부인이 됩니다. O.O) 당시에도 일본 정부는 치사한 짓을 많이 했는데,
6.25 전쟁 당시 수백여 명의재일교포 청년들이
미군 지원병 형태로 우리나라로 건너와 전쟁에
참전했다가일본이 귀국을 불허해 가족과 생이별한
사례도 많습니다. T.T 가족과 헤어진 우 박사는 10여년 만에 히로시마에
있는 아버지 무덤을 찾아 귀국 소식을 말씀드린 후 모교 고등학교에서 후배들에게 강연을 하고는
송환선을 타고 1950년 3월 8일 부산항에 도착합니다. 그런데… 앞서 일본 정부가 출국을 불허했다고
했는데 어떻게 한국으로 올 수 있었을까요? 그건 우장춘 박사가 쓰시마에 있던 외국인
강제환송인 오무라 수용소에 가서 호적 등본을
내밀었는데그 증명서에서는 조선 출신 ‘우장춘’이라고
적혀 있었기에 수용소 관리자는 그가 세계적 육종학자이자 일본 정부가 출국을 막는 ‘스나가 나가하루’인 줄 모르고
그저 불법 입국한 조선인이라 여겨 환송선에 태웠기에 가능했던 겁니다. 즉, 우범선이 일본 도쿄에서 장남 우장춘을 낳았음에도
출생지를 한국 본적지로 기입해 놨던 것이 결정적인 순간에 빛을 발한 것입니다. ^^ 아버지 우범선은 민비 시해가 조선 발전을 위한 애국행위라고 생각했으나 간악한 일본에 휘둘려 조국을 버리고 부산항을 통해 일본으로 도망갔지만 언젠가는 고향으로 돌아갈 것이라 믿었던 것입니다.
결국 그는 일본에서 눈을 감았지만 아들은 조국을
구하고자 아버지의 망명 54년 뒤 부산항으로
되돌아왔으니참으로 드라마틱한 운명이셨네요.
(우장춘 박사 귀국 환영식) 그날 부산항에는 많은 환영 인파가 몰려들었고 10일 뒤
부산 동래원예고등학교에서 열린 환영회에서 우장춘 박사는 "저는 지금까지 어머니의 나라인
일본을 위해, 일본 사람에게 뒤떨어지지 않으려고 노력해 왔습니다. 그러나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나라인 한국을 위해 최선을 다할 것입니다. 저는 이 나라에 뼈를 묻을 것입니다."라는
감동적인 연설을 합니다. 이에 이승만 대통령은 크게 기뻐하며
한국농업과학연구소장으로 임명합니다. 그런데... 우장춘 박사는 한글을 보고 이해는 했지만
한국 말을 거의 못했다고 합니다. 그도 그럴 것이 아버지는 5살 때 돌아가셨고 어머니와
외가 도움으로 일본에서만 살았기에 따로 한국 말을 배우고 쓸 일이 없었던 것이었죠,
게다가 우직한 과학자여서 육종사업과 후진 양성에만
전념해 전혀 정치적이거나 사교적이지 않았기에 따로 공무원들을 접대하는 등 로비활동도 일체 안해
그의 사정을 잘 알지 못한일부 정치인들이 '배신자의
아들이 우리 말도 모른다'며 비난했다는군요. =.=
이에 더해 우장춘 박사가 귀국한 직후, 이승만 대통령이
환영 전보를 보냈는데, 우박사가 인사하러 서울에 가지 않았다고 합니다.
당시로선 대통령의 전보를 받으면 으레히 감사
인사차 경무대로 달려가야 하는 시대… 이에 이승만 대통령이 비서에게 “혹시 전보가 전달
안된 것 아니냐, 인사 안 올 리가 업다. 가서 확인해보라”
고 채근해 비서관이 부산 동래 연구소에 찾아왔는데
우 박사님은 종자를 뿌리고 있던 중이었다고 합니다. 이에 “전보를 받았으면 왜 대통령께 인사하러 가지
않느냐?”고 묻자 여전히 종자를 뿌리면서 “나는 우리 나라와 민족에게 이바지하러 왔는데
지금 일본에서 가져온 이 종자들을 심지 않으면
한해 늦어진다.대통령께 인사는 한두달 늦어도
괜찮지 않느냐?”고 반문했다가 우호적이던 정치권
인사들에게도단단히 미운 털이 박혔다고 합니다.
아니 대체 뭐가 더 중한 겁니까? =.= 타이틀이야 근사해서 ‘한국농업과학연구소장’이지
뭐 제대로 된 시설도 없는 황무지에서 모든 것을 새로이 시작해야 했던 우장춘 박사는
이후 종종 농림부에 추가 예산을 요청했지만 여러 차례 거절당하자 참다 참다 결국엔 대통령을
찾아가 하소연을 했다고 합니다. 심지어 소장이 거처할 숙소에 전기와 수돗물도
안 들어올 정도였으니 뭐가 있었겠습니까? (그래서 일반 가정 집에 세 들어 사셨다고… OTL) 그제서야 사정을 안 대통령이 장관을 불러 질책해
겨우 자금 지원을 받는 등 고난이 계속됩니다. 하지만 이후에도 공개석상에서 “일본말만 지껄이는
사람이 무슨 애국을 하겠느냐?”며 대놓고비난하고
면박을 주는 정치가나 공무원도 숱하게 많았다고 합니다. 세계적인 석학이 모든 명예를 버리고 조국에 왔는데
그저 일본말만 할 줄 안다는 적개심으로이 같은 냉대를
당했으니… 이후 1953년 8월 어머니 사카이 나카 여사가 사망할
당시, 위중하다는 소식을 들은 우장춘 박사가 대통령에게 일본 방문을 탄원하지만...
일본에서 돌아오지 않을지 우려한 정부가출국 금지하는
바람에 어머니의 임종을 지키러 일본에 가지 못합니다. 그렇게 애타고 귀국을 요청하고선 어머니의 임종도
못보게 하다니요... 당시 출국 금지 조치 소식을 듣고 우장춘 박사는
“이것이 모든 것을 버리고 한국을 위해 봉사해 온 나에 대한 대우란 말인가?”라며 절규했다고
일본 측 기록은 전합니다. (그 절규가 사실인지 여부는 잘 모르겠지만
능히 그러고도 남을 상황…) 평소 우장춘 박사는 후배 연구원들에게 “어머니가
늘 너는 한국 핏줄임을 잊지 말아라, 장차 아버지의
나라로돌아가 봉사하는 삶을 살아라고 하셨다”라고
말씀하셨던 터라 연구원들도 다같이 슬퍼하며 연구소 강당에 분향소를 차리고 우박사님 어머니의
죽음을 애도할 수 밖에 없었다고 합니다. T.T 이를 안타깝게 여긴 주변인들이 조의금을 모아
전달했지만 우 박사는 그 돈 역시 일본에서 생계 문제로 곤란을 겪던 가족들에게 보내지 않습니다.
그 대신 한국농업과학연구소가 있었던 부산시
동래구 지역이늘 물 부족으로 고생하고 있던 상황을
타개하고자 새 우물을 파는데 그 돈을 사용하고 1954년 2월 준공한 우물에 자유천(慈乳泉)이라고
손수 이름 짓습니다. ‘자애스러운 어머니의 젖’이란 뜻이지요… 그후 매일 아침마다 우물 주변을 청소하며
하루를 시작하셨다고 합니다… T.T
(자유천 기념 비석) 이런 어려운 상황에서도 우장춘 박사는 연구원들을
독려해 일본 종자에 대항할한국 채소 종자 개발에 몰두해 1954년부터 맛 좋고 병에 강한 배추와 무를 만들어 내어 우리가 지금 맛보는 싱싱한 김치를 담글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뜻밖의 난관에 부딪힙니다.
농민들이 국산 종자를 불신해 심으려 하지 않은 것입니다. 그래서 여전히 일본 종자가 최고라는 생각에 몰래
밀수해서 심는 일이 허다하게 발생합니다. 이에 우장춘 박사는 한국 농업 연구 우수성을 알리기
위한 퍼포먼스로1955년 전국 곳곳을 돌며
‘씨없는 수박 시식회’를 개최해 농민들에게
‘씨없는 수박’을 선보이게 됩니다. 사실 씨없는 수박은 배추, 무 개량사업보다는
상대적으로 쉬운 재배법이지만 눈으로 그 성과를 보여주기엔 안성맞춤이었던 것이죠. 겉으로 보기엔 일반 수박과 똑같아 보이는 수박을
반으로 쪼개어 씨가 없는 민둥 수박 속을 보여주자 농민들은 그저 우와 감탄을 하게 되고 단박에 신뢰를
얻게 됩니다.
이에 그 자리에서 우장춘 박사님은이 씨없는 수박을
만들어 낸 것처럼 우리 기술로 개량한 배추와 무가
일본 채소보다더 좋다는 것을 역설해 국산 종자 사용을
확산시켜 나갑니다. 또한 이 시식회는 당시 TV가 없던 시절에 극장에서
본 영화 상영에 앞서 방영하던 <대한늬우스>를 통해서도 널리 국민들에게 홍보되므로써,
본의아니게 우장춘 박사는 세계 최초로 씨없는 수박을
만든위대한 과학자로 추앙받기에 이릅니다. 그 이후는 순풍에 돛 단 듯 순조롭게 진행되어
국산 배추와 무가 확산됨과 동시에 고추도 개량해 처음부터 끝까지 알싸하게 매운
한국 고추로 개량했고 강원도 감자의 품종도 개량해 고랭지에서도 잘 자라면서
바이러스에 강하고 맛있는 감자로 바꿉니다. 또한 제주도에 가서는 감귤 나무 재배를 적극 권장해
제주도민들이 감귤을 팔아자식을 대학에 보낼 수 있는
경제적 기반을 만들어 주십니다. 이로써 갑자기 유명해진 한국농업과학연구소는
전국 학교의 수학여행 견학 코스가 되어 전국에서 많은 학생들이 연구 현장을 보러 왔는데 우박사님은 늘 고무신 차림에 헐렁한 런닝셔츠
차림으로 맞이하셔서아이들에게 '고무신 박사'로
불리셨다네요. 당초 별명은 하도 무뚝뚝하고 사람을 빤히 쳐다봐서
‘불독’이었다지만…^^; 하지만 과학적 업적으로 보자면 우 박사님의 대한민국에서의 마지막 10년은 새로운 육종학 연구는 포기하고 한국 농업 발전을 위한
육종 실험에만 매달린 셈이니과학자로서는 참으로
감내하기 어려운 희생을 하신 겁니다… 이 같은 그의 헌신에 감복한 이승만 대통령이
이후 농림부장관 직을 제안하지만 연구할 시간도 모자란다며 완곡하게 거절하고
종자 개량에만 매진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귀국후 9년간 자신의 몸을 돌보지 않고
열심히 일만 하던 우장춘 박사는1959년 5월
원예시험장 창립 10주년 기념식을 마친 뒤
쓰러져 병원 응급실로 실려가 '십이지장 궤양'으로 세차례 수술을 받지만
결국 8월 10일 운명하시게 됩니다. 당시 병세가 위중하다는 소식에 정부는 운명하기
3일전인 1959년 8월 7일대한민국 건국 후
두번째 문화포장 수여를 결정하고이근식 당시
농림부장관이 병원으로 찾아와 전달했다고 하네요. 병상에 누워있던 우박사님은 “조국이 드디어 나를
인정했구나”라고 고마워 하면서도“그런데 좀 일찍
주지”라고 솔직한 아쉬움을 토로하셨다지요. 그리고 숨을 거두기 직전에도 보릿고개로 아사하는
빈촌을 걱정해 개량에 한창이던벼 이삭을 링거병 옆에
달아두고선 "이 벼! 끝을 보지 못하고 내가 죽여야
하다니"라고한탄하셨다고 합니다…
으흑… 눈물이 납니다. T.T
결국 우장춘 박사님의 못다 이룬 벼 개량 연구는
1971년 통일벼가 개발되고1975년에 쌀 자급자족이 가능해지면서 1차 완성되었고이와 동시에 준비하던
2모작 벼는 2010년대에 들어서야 본격화 됩니다. 마지막으로 먹먹한 이야기 하나 소개할게요. =.= 하숙하면서 연구에 매진하던 어느 날 집에 돌아온
우박사는깨끗이 청소된 방과 저녁이 차려진 소반을
보고 깜짝 놀랐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이상한 일은 다음날에도 또 그 다음날에도
똑같이 반복이 됩니다. 이에 우박사님이 자초지종을 알고 보니
한 중년 부인이 우박사님이 세들어 있던 집 주인을 설득해 문을 따고 들어와 청소와 식사를 마련하신 것이었지요.
1950년대에도 사생 팬이 존재했군요… =.= 이에 우박사님이 우렁각시를 자처한 그 부인을
어렵사리 만나 “왜 이러느냐”고 물어보니, 남편과 사별해 혼자 살던 그 여인은 우박사님의
애국 충정에 감동했다며 “존경하는 박사님을 평생 모시고 살고 싶다”며
우박사님과 재혼하길 희망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일본에 가족을 두고 온 우박사님은
정중히 거절했다고 하지요. 그랬음에도 그 여인은 계속 우박사님 주위를 맴돌며
뒷바라지를 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부분에 대해 국내와 일본측 자료는
엇갈리고 있습니다. 우리나라 자료에선 그저 그 여성 분이 계속 쫓아다닌
걸로 나오고일본 자료에서는 현지처라고 못을
박더군요… =.= 진실은 무엇인지 모르나 이처럼 중년의 여인이
수시로 집에 드나들다보니어느새 주변의 입 싼 인간들이
“우박사가 새 살림을 차렸다더라”라는 소문이 퍼져 일본에 있던 부인, 고하루 여사에게까지 알려지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