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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홍석 Aug 05. 2019

[가리지날] 씨없는 수박을 처음 만든 사람은?

알아두면 쓸데 있는 유쾌한 상식사전

[가리지날] ‘씨없는 수박’을 처음 만든 사람은?
 

최근 계속되는 일본의 경제도발 뉴스를 보다가...

70년전 국산 종자 개발로 일본에 맞섰던

한 위대한 선각자가 문득 떠올라 이 글을 씁니다.


 '씨 없는 수박'을 처음 만든 사람이 누구일까요?
 
모두들 자신있게 맑게 깨끗하게 "우장춘~"이라고

 답하실 터이지만…
이제 눈치 채셨지요?
이것도 가리지날입니다. OTL
 
실제로 1943년에 '씨없는 수박'을 세계 최초로

 발표한 사람은 일본 교토제국대학

기하라 히토시 (木原均) 박사입니다. O.O
우장춘 박사님은 씨없는 수박을 만드는 근거가 되는

 '종의 합성'이란 기초 이론을 1936년 제시했고,

이를 바탕으로 일본 학자가 개발했기에
연구의 기초를 제공한 분이긴 합니다만

팩트로 따지면 본인이 최초로 만든 건 아니죠…
 
그럼 왜 우장춘 박사가 '씨 없는 수박' 최초 발명자란

 오해가 생겼을까요?
 
그것은 1950년 3월, 조국을 위해 일본에서 돌아온

세계적 육종학자 우장춘 박사가
육종학이 왜 중요한지, 국산 채소 종자가 믿을 만한

것이란 것을 알려 줄 '결정적 한방'으로써
1955년 씨없는 수박을 재배해 선보였고

당시 정부에서 '한국 과학의 쾌거'라며

널리 알렸기 때문이죠… =.=
게다가 당시로선 일본이 먼저 개발한 거라고

 사실을 보도할 사회적 분위기도 안되었겠지요. (먼산)
 
그보다 먼저 우장춘 박사가 어떤 분인지

알아봅시다.

(우장춘 박사님. 별명은 불독… 요즘이었다면 호머 심슨?)
 
세계적 과학자, '한국 농업의 아버지' 우장춘 박사는
아버지는 한국인 우범선, 어머니는 일본인 '사카이 나카' 사이에서 1898년 일본 도쿄에서 태어나셨습니다.
 
문제는 우 박사의 아버지 우범선은 명성황후(민비)

 암살사건, 즉 '을미사변'에 가담했다가
일본으로 망명했기에, 고종이 암살하라고

 지시를 한 역적이었단 겁니다.…
우범선은 19세이던 1876년 무과 과거시험에

급제한 수재로서
‘근대화에 가장 먼저 성공한 일본을 본받아

개화해야 한다’는 철학을 가지고 있었다고 합니다.
이후 청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자 친일파가

득세하면서 1895년 일본이 주도한
별기군 훈련대가 창설되고 우범선은 제 2대대장을

맡게 됩니다.
그러나 러시아, 프랑스, 독일 삼국간섭에 의해

일본이 청일전쟁 대가로 얻어 낸 요동 반도를
다시 청에게 돌려주게 되자 러시아가 일본보다

더 강하다고 인지한 조선 왕실은
친러파 인사를 대거 기용하게 되지요.

이 여파로 일본이 주도한 별기군 훈련대 해산이

결정되자 일본에 기울던 우범선은 일본군 수비대

미야모토 다케타로 소위에게 달려가

해산 소식을 알려줍니다.
 
이 정보를 보고받은 미우라 고로 일본 공사는

이미 준비하고 있던 민비 살해 계획인 '여우사냥' 작전에
이들 훈련대를 끌어들이게 됩니다.

이에 훈련대가 해산되기 전에 거사를 해치우고자
경복궁 침입 계획을 당초 10월 10일에서 이틀

앞당기기로 하고 우범선에게 동참할 것을 제안하지요.
이에 청과 러시아에 빌붙어 조선의 발전을 저해하는

 민씨 일가가 물러나야만 조선이 제대로 될 것이라는

신념에 동조한 우범선은 해산 명령을 받아 분노에 찬

 훈련병들을 끌어들여 10월 8일 새벽, 일본 살해단들과

함께 현재의 서대문 경찰서 앞에서 집합한 후

 흥선 대원군까지 가마에 태워 경복궁으로 진격합니다.
당시 경복궁을 지키던 군사들은 이들 일본 낭인과

조선 훈련대가 사다리를 타고 넘어 올 때
아무도 대항하지 않고 도망쳤다지요? =.=
이처럼 허무하게 경복궁 정문이 열리자 일본

자객단들이 일제히 민비의 처소인 경복궁 북쪽 끝
건청궁을 향해 돌격해 들어갑니다.
이후 우범선과 훈련대원들이 흥선대원군을 모시고

뒤따라 도착했을 당시에는
이미 민비와 궁녀들이 칼에 베어진 상황...
우범선은 민비의 얼굴을 모르는 자객들에게 살해당한

이들 중 누가 민비인지 확인시켜 줍니다.
 
당초 일본은 흥선대원군의 사주를 받아 우범선 등 조선 군인들이 민비를 살해한 것으로 왜곡하려 했지만
당시 경복궁에 머물던 러시아 설계사 사비친 등이

 이 광경을 목격해 러시아 공사관에
사건의 진실을 알리면서 일본의 만행이 들통나게 되지요.
이후 절치부심하던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하는 아관파천에 성공한 뒤 우범선 등 일본 협조자에

대한 체포령을 내립니다.
이에 우범선은 1896년 1월, 아내와 두 딸은 한양에

남겨둔 채 일본 공사관의 협조 속에
부산을 거쳐 일본으로 망명한 뒤 도쿄에서 살던 중

주인집 하녀인 사카이 나카(酒井 仲)와 결혼하여
1898년 우장춘을 낳은 뒤 그 해 처의 언니 부부가

살고 있던 히로시마현 구레(呉) 시로 이사갑니다.
 

(가족 사진, 좌로부터 우범선, 우장춘, 사카이 나카)
 
그러나 결국 우범선은 1903년, 망명 7년만에 고영근 의사에게 피살됩니다.
고영근은 원래 민씨 가문의 실력자 민영익의

시중꾼으로서 궁중을 출입하면서 민비의 총애를 받아

종2품 경상좌도 병마절도사까지 출세한 이였기에
'국모를 살해하는데 앞장 선 우범선을 처단하라'는

고종의 밀명을 받아들여 일부러 파직당한 뒤

1899년 일본에 건너가지만 이미 히로시마 현

시골 도시로 거처를 옮긴 우범선이 어디에 사는 지

 알아내기가 쉽지 않았다고 하지요.
 
그래서 3년 만에 드디어 거처를 알아내자 우연인 듯

 우범선의 집에 나타납니다.
극도 경계하는 우범선에게 ‘나도 당신처럼 조선에서

 쫓겨난 망명객’이라고 소개하며
“이 근처에서 살 집을 구하는데 도와달라”며 접근해

같이 밥도 먹고 술도 마시는 등 반년이상 살갑게

지내면서 우범선의 경계를 느슨하게 합니다.
이후 고영근은 확실한 암살 성공을 위한 동료가

필요하다고 판단해 민영익 집안 마당쇠 출신인 노윤복을

 불러들이고 드디어 1903년 11월 24일 암살을

단행합니다.
(사극에 마당쇠가 자주 나오는데… 양반댁 노비 중

가장 높은 직책이 마당쇠입니다.
 즉, 노비 중에서 똑똑하고 경험이 풍부한 사람만이

총괄 책임자 마당쇠가 될 수 있었습니다.)
고영근은 “집 계약을 도와주셔서 고맙다”며 저녁

 대접을 하겠다고 우범선을 새로 구한 방으로 불러들인

뒤, 식사를 하다가 본인은 단도로 목을 찌르고
노윤복은 뒤에서 쇠망치로 머리를 내리 쳐

우범선을 살해하는 데 성공합니다.
 
거사 성공 직후 고영근과 노윤복은 인근 파출소를

 찾아가 자수하면서 "국모의 원수를 갚았다!"고

 외쳤다고 합니다.
이 암살 사건은 그 직후 일본 신문들에 대서특필되었고

이후 재판정에서 고영근은 "사형은 달게 받겠으나 '적괴참살복국모수 (賊魁斬殺復國母讐·
적괴를 참살하여 국모의 원수를 갚는다)

 8자를 반드시 판결문에 넣어달라고 요구하고,
노윤복은 종범으로 방조한 자이니 감형해 달라"고

당당히 요구합니다.
당시 일본인 변호사들마저 "이들은 의사(義士)이며,

 충신이나 효자의 살해 행위는 경감해 준 판례가 있다"며
형량을 감해야 한다고 주장하지만 결국 고영근 사형,

노윤복 무기징역형을 언도받게 됩니다.
 이 사건은 당시 우리나라에도 널리 알려져

이들 애국지사를 사면토록 해야 한다는 의견이 분출되고,
배후조종한... 고종 역시 하야시 곤스케

주한 일본공사를 불러 선처를 요청합니다.
이에 민비 살해사건의 주도자인 고무라 외상은

하야시 공사에게 "한국에 대한 호의 표시로 천황의

 명으로 이들의 등급을 한 등급씩 감형해 줄 터이니
고종 황제폐하에게 잘 설명하라"고 지시합니다.
즉, 일본 천황의 시혜로 감형된다고 생색을 낸 겁니다.

조선 국모를 살해한 작자들이 적반하장. =.=
이후 1904년 고영근은 사형에서 무기징역으로,

노윤복은 무기징역에서 12년 형으로 각각 감형되었고
고종은 특사로 방문한 이토 히로부미에게 고영근의

한국 송환을 특별히 당부하기에 이릅니다.
이후 고영근은 11년만에 석방되어 고국으로

돌아 와 고종에게 임무 완수 보고를 드린 후
고종이 승하하자 고종과 민비의 능 옆에 집을 짓고

능을 지키는 능참봉으로 평생을 살다 갑니다. T.T
 
이처럼 우범선이 피살될 당시 우장춘은

 우리 나이로 겨우 5세.
어머니 사카이 나카는 둘째 아들을 임신 중인 상황이었습니다.
갑작스런 남편 사망에 본인 역시 부모도 없이

언니 하나만 있어 의지할 데가 없던
우장춘의 어머니는 돈을 벌기 위해 오랫동안

우장춘을 도쿄 사찰인 희운사(喜運寺)에 맡기게 됩니다.
당시 우범선과 사카이 여사의 중매를 섰던 이가 바로

희운사 주지 스님이었거든요…
 
이 같은 소식에 당시 일본 망명 중이던 박영효가

 "아버지 우범선이 일본에 도움을 준 인물이니 마땅히

후손을 돌봐줘야 한다"고 일본 정부를 설득해
조선총독부 사이토 미노루 총독이 중학교 학비와

양육비가 지원하게 도움을 주어
드디어 우장춘은 어머니가 있는 구레시로 돌아가

 구레 중학교에 입학하지만
아버지도 없이 일본 땅에서 조선인으로 차별받는

불우한 삶을 살게 됩니다.
 
하지만 어머니 사카이 나카 여사는 비록 글을 쓰고

읽지 못했지만 강단 있는 여성이었습니다.
결혼 중매 당시에도 이미 살해 위협을 받는 망명객임을

 알면서도 그 인물됨에 반해 결혼했고,
남편의 암살 가능성을 줄이고자 언니네 집 근처로

이사를 가는 등 남편을 보호하지만 결국 살해되자,
다음날 집에 찾아온 신문기자들에게 "그토록 조심하라고

 했는데 그의 운명이 거기까지였나 보다.
안타깝다."라고 인터뷰에 응할 정도로 냉철하게

현실을 직시했습니다.
그랬기에 재혼하지도 않고 홀로 우장춘을 키우며

학교에서 따돌림받고 좌절하던 우장춘에게
“길가에 핀 민들레는 아무리 짓밟혀도 꽃을 피우는데

사내가 쉽게 눈물을 보이고 좌절하면 되느냐”고
다독이며 강하게 키우셨다고 하네요.
 
이에 우장춘 선생은 “조선의 혁명가였던 아버지처럼

세상에 도움이 되는 사람이 되어라”는
어머니의 독려에 각성하여 열심히 공부에 매진합니다.
당초 수학에 흥미를 느껴 공학부 진학을 꿈꾸지만

장학금을 지원하는 조선총독부가
'조선은 농업 국가이니 농과대학에 가서 연구하라'며

등을 떠밀어 어쩔 수 없이 1916년 4월 1일 도쿄제국대학

 부설 전문학교 농학부 실과에 입학합니다.
그리고 입학 초기에 자신의 정체성을 인식하게 되는

결정적 사건을 접하게 됩니다.
어느날 조선총독부 관리가 도쿄에 거주중인

조선 출신 학생들을 모아 놓고
천황폐하의 은덕에 대해 일장연설을 하자

와세다 대학생 김철수가 단상에 뛰어 올라가
그의 멱살을 잡고 항의하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그 자리에서 김철수는 우장춘을 알아보고선

 "너의 부친이 매국한 것에 속죄하려면 조선 독립을 위해
네가 배운 것으로 봉사하고 절대 너의 조선인 성을

갈아서는 안된다"고 다그쳤다고 합니다.

이에 아버지의 진실에 대해 비로소 알게 된 우장춘은

큰 충격을 받았다고 하지요.
 
이에 조선인으로서의 숙명을 더 자각하면서

1919년 8월에 졸업한 우장춘 선생은
1920년 일본 농림성 농사시험장에 취업해 

1937년까지 근무하며 나팔꽃 유전 연구에 몰두합니다.
이 당시 부업으로 중학생 대상 과외를 했는데 무조건 암기하도록 가르치지 않고 직접 생각해 풀 수 있도록

 근본부터 착실히 가르쳐 주자 그 부모가

매우 흡족해 했다고 합니다.
그러던 어느날 그 학생의 이모인 와타나베 고하루

(渡邊小春)가 방문했다가
두 사람 사이에 애정이 싹트게 되었다네요. ^^
너무 착실한 도쿄제국대 출신 과외선생에게

흡족해 하던 학생의 어머니는 여동생과 결혼을 주선하고

 우장춘의 어머니도 동의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녀의 부모는 우장춘이 조선인 혼혈이란

이유로 결혼을 극심히 반대하고 나섭니다…
그러자 와타나베 고하루는 단호히 친정과 의절하고

1924년 우장춘과 결혼한 뒤 시어머니를 지극 정성

 모시고 남편의 뒷바라지를 착실히 했다고 하지요.
이처럼 우장춘은 현명하신 어머니와 아내 덕분에

연구에 매진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차마 자녀들에게는 자신과 같은 고난을

물려줄 수가 없다고 여긴 우장춘은
아내의 조언을 받아들여, 친정과 의절한 고하루 여사가

 지인인 스나가 고헤이의 양녀가 되고
본인은 데릴사위가 되는 형식으로 새로이

스나가 나가하루(須永長春)란 일본 이름을 받고
자녀들에겐 스나가 성씨를 쓰게 하지만

본인은 새 성씨를 쓰지 않고 일본 논문에는

우장춘(禹長春), 영어 논문에는 'Nagaharu U'로

표기하며 조선인이란 정체성을 지킵니다.
 
하지만 신혼생활의 즐거움도 잠시, 농사시험장

 동료들이 차별을 하자 그는 다시 이를 악물고

낮에는 농사시험장에서 근무하며 야간 박사 과정을

밟아 1930년 나팔꽃의 유전에 관한 주제로

 박사 논문을 완성합니다.
다음날 출근해 도쿄대학에 제출하기로 하고

연구소에 논문을 두고 온 그날 밤,
농사시험장에 불이 나 모든 자료와 논문이 불에 타

사라지게 됩니다. T.T
그러나 이에 굴하지 않고 이번엔 유체 종자에 대한

연구를 시작해 1935년 가을 논문을 제출하고

드디어 1936년 드디어 도쿄제국대학 농학박사 학위를

따게 됩니다.
흔히 우장춘 박사가 한국 최초의 농학박사라고

 알려져 있는데 그보다 앞서 임호식 박사님이

일본 홋카이도 제국대학에서 곰팡이 연구로

박사 학위를 취득해 2번째 농학박사 취득자이긴 했습니다.

 5년전 화재 사건만 아니었으면

첫번째 농학박사이셨을텐데요…
 
어쨌거나 이때 우장춘이 박사학위로 낸 논문이

 "배추 속(屬) 식물에 관한 게놈 분석"인데
이 논문은 세계 육종학계를 놀라게 했으며

 '종의 합성 이론'으로 불리며 엄청난 명성을 안겨 줍니다.
와우… 80년 전에 게놈 분석이라니…O.O
이게 당시에 왜 큰 충격을 주었냐면 그 때까지

 '종의 분화는 자연선택의 결과'라고 여긴
다윈의 진화론 자체를 수정해야 하는

대단한 발견이었기 때문입니다.
이 이론은 1935년 실험을 통해 입증한 것으로,

같은 종끼리만 교배가 가능하다는 정설을 깨고
종은 달라도 같은 속의 식물을 교배하면 새로운 식물을

만들 수 있음을 입증한 겁니다.
즉, 50만년~100만년 전에 친척 사이인

배추와 양배추 간 자연교접을 통해 유채라는

전혀 새로운 종이 지구에 탄생한 것을 규명한 것인데,
이런 식물간 교배 모델을 ‘우장춘 트라이앵글’이라

부른다고 하네요.
 


이 연구는 해외 식물학 교과서에서 여전히

 주요하게 다뤄지고 십자화과 식물(배추,유채,양배추)

 연구시 필수 인용 논문이어서 전 세계적으로 유명하지요.
다만 안타까운 건 외국학자 대부분은

우장춘 박사를 일본인이라고 알고 있다는 겁니다.
뭐 지금도... 온라인 포털 검색시 우리나라보다

일본에 우장춘 박사 관련 자료가 더 많고 본격적인

우장춘 박사 전기도 일본인이 집필했습니다.
우리나라 자료라곤 보통 어린이용 위인전 밖에

없는데 그것도 예전 일본에서 나온
어린이용 세계 위인전 자료를 번안한 수준…
저 역시 우장춘 박사 관련 자료를 찾다가 일본 자료를

더 많이 인용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당시에는 세계를 떠들썩하게 만든 논문을

발표해 도쿄제국대학 농학박사 학위를 받았음에도
성도 바꾸지 않고, 일본 국적 취득도 거부하자

일본 학계에선 그를 교수로 채용하지 않아
결국 1937년 민간 종묘회사에 취직할 수 밖에

없었다고 하네요... T.T
이후 그가 근무하던 교토의 '타키이' 종묘 회사는

우 박사가 개발한 '완전 겹꽃 페튜니아' 종자로
10배 이상의 이익이 생겨 떼돈을 벌었고,

그의 명성은 국제적으로 더더욱 높아졌습니다.
 

(페튜니아 겹꽃)
 
이후 1945년 해방이 된 대한민국에선 세계적인

육종학자로 손꼽히던 우장춘 박사를 모셔오기 위한
‘우장춘 박사 환국 촉진위원회’가 결성되어

성금 모금운동이 펼쳐지자 대통령까지 나서서

적극적으로 귀국을 요청하게 됩니다.
 
이를 주도한 인물은 동경제국대학 출신의 김종 박사

등 지식인들이었는데 우박사의 귀국을 애타게 요청한

것은 당시 인구 중 80%가 농사에 종사하면서도
우수 종자와 비료가 부족해 만성적인 식량 부족

 상황을 해결하는 것이 국가 차원의 최우선 과제였기

 때문이었습니다.
일제 통치기간 조선총독부는 일본으로 반출할

 쌀과 보리 생산량 증대에만 신경을 쓰고
채소 개량에는 무신경했기에 배추, 무 등 주요 채소의

씨앗을 일본에서 계속 수입해야만 하는 상황이었다죠.
그러다가 해방이 되면서 일본으로부터 종자 수입이

막혀 버리자 우수한 육종학자가 절대적으로 필요했고

 세계적 농학박사로 유명한 우장춘 박사가 자연스럽게

 주목받게 된 것이죠.
 
이에 미리 한국농업과학연구소를 만들고

소장 자리를 비워놓고선 우 박사를 부르게 됩니다.
(한국농업과학연구소는 1953년 중앙원예기술원으로

 개편, 1958년 한국농업과학연구소 원예시험장으로 개편)
하지만 당시 국회에서 귀국 요청 논의시 '아버지가 반역자이므로 받아들일 수 없다'는 반대 주장도 만만찮게

 많았다네요. 그렇지만 '아버지가 잘못한 일을 아들에게

 책임을 물을 수 없지 않느냐, 지금 그가 없다면 우리

농촌을 살릴 수 없다."는 주장이 팽팽히 맞서면서

결국 우박사 본인에게 귀국 여부를 묻는 편지를

보내게 됩니다.
즉, 국가 차원에서 공식 초청하는 게 아니라 개인이

 자발적으로 올지 말지 판단하라고 쓱 책임을 미룬

것이죠… =.=
 
당시 귀국 문의 편지를 받은 우 박사는 이미 2남 4녀를

둔 가장이었는지라 현실과 애국심 사이에서 갈등을

느끼게 됩니다.  

해방 전인 1941년 배다른 누나들을 찾으러

 강원도 철원까지 와 본 적이 있지만 해방된 조국은

 남북으로 나뉘어 38선에선 끊임없이 크고 작은

전투가 이어지는 등 불안한 상황인 데다가

정작 본인은 한국말도 전혀 모르고 아버지의 과오 때문에

 친일파로 비난받을 우려도 있는 등 수많은 변수가

그의 앞에 놓여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미 다카이 종묘회사에서는 패전 후 우박사를

내쳐 장법사라는 절에서 온 가족이 기거하는

 형편이었습니다.
일본이 패망해 울분에 쌓였던 회사 간부들이

 우장춘 박사가 그동안 1주일에 한번 씩 기숙사에서

조선인 직원들만 모아놓고 별도로 강의해 온 사실을

 트집잡은 것이었죠…
 
이에 그는 오랜 고민 끝에 결국 일본에 가족을 남겨 둔

채 나홀로 귀국을 결심합니다.
그러자 귀국추진위원회 회원들이 일본에 남을 가족의

 살림에 보태라며 국민 성금 1백만원을 모아 전달했지만
이 돈을 가족에게 주지 않고 연구용 각종 채소 종자와

실험 기자재를 사는데 다 썼다고 하지요... T.T
 
그제서야 일본 정부는 세계적 육종학자의 한국

귀국이 달갑지 않아 불안한 한반도 사정을 들먹이며

귀국을 만류하면서 출국 허가를 내 주지 않았다고 합니다.
게다가 1950년 당시엔 한일 국교 수립 전이라 일본

정부의 허락 없이는 일본 재입국이 불가능했기에

우박사 본인도 다시는 일본에 못 돌아올 것을

예감하셨는지 가족과 마지막 사진을 찍습니다.

(귀국 전 마지막 가족 사진… 맨 오른쪽 넷째 딸은

 이후 교세라 그룹 회장 부인이 됩니다. O.O)
 
당시에도 일본 정부는 치사한 짓을 많이 했는데,

6.25 전쟁 당시 수백여 명의 재일교포 청년들이

미군 지원병 형태로 우리나라로 건너와 전쟁에

참전했다가 일본이 귀국을 불허해 가족과 생이별한

사례도 많습니다. T.T
 
가족과 헤어진 우 박사는 10여년 만에 히로시마에

있는 아버지 무덤을 찾아 귀국 소식을 말씀드린 후
모교 고등학교에서 후배들에게 강연을 하고는

송환선을 타고 1950년 3월 8일 부산항에 도착합니다.
 
그런데… 앞서 일본 정부가 출국을 불허했다고

했는데 어떻게 한국으로 올 수 있었을까요?
그건 우장춘 박사가 쓰시마에 있던 외국인

강제환송인 오무라 수용소에 가서 호적 등본을

내밀었는데 그 증명서에서는 조선 출신 ‘우장춘’이라고

적혀 있었기에 수용소 관리자는 그가 세계적 육종학자이자
일본 정부가 출국을 막는 ‘스나가 나가하루’인 줄 모르고

 그저 불법 입국한 조선인이라 여겨 환송선에 태웠기에
가능했던 겁니다.
즉, 우범선이 일본 도쿄에서 장남 우장춘을 낳았음에도

출생지를 한국 본적지로 기입해 놨던 것이
결정적인 순간에 빛을 발한 것입니다. ^^
아버지 우범선은 민비 시해가 조선 발전을 위한 애국행위라고 생각했으나 간악한 일본에 휘둘려
조국을 버리고 부산항을 통해 일본으로 도망갔지만 언젠가는 고향으로 돌아갈 것이라 믿었던 것입니다.


결국 그는 일본에서 눈을 감았지만 아들은 조국을

구하고자 아버지의 망명 54년 뒤 부산항으로

되돌아왔으니 참으로 드라마틱한 운명이셨네요.

(우장춘 박사 귀국 환영식)
 
그날 부산항에는 많은 환영 인파가 몰려들었고 10일 뒤

부산 동래원예고등학교에서 열린 환영회에서
우장춘 박사는 "저는 지금까지 어머니의 나라인

일본을 위해, 일본 사람에게 뒤떨어지지 않으려고
노력해 왔습니다. 그러나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나라인 한국을 위해 최선을 다할 것입니다.
저는 이 나라에 뼈를 묻을 것입니다."라는

감동적인 연설을 합니다.
 
이에 이승만 대통령은 크게 기뻐하며

 한국농업과학연구소장으로 임명합니다.
그런데... 우장춘 박사는 한글을 보고 이해는 했지만

한국 말을 거의 못했다고 합니다.
그도 그럴 것이 아버지는 5살 때 돌아가셨고 어머니와

외가 도움으로 일본에서만 살았기에
따로 한국 말을 배우고 쓸 일이 없었던 것이었죠,


게다가 우직한 과학자여서 육종사업과 후진 양성에만

 전념해 전혀 정치적이거나 사교적이지 않았기에
따로 공무원들을 접대하는 등 로비활동도 일체 안해

그의 사정을 잘 알지 못한 일부 정치인들이 '배신자의

아들이 우리 말도 모른다'며 비난했다는군요. =.=


이에 더해 우장춘 박사가 귀국한 직후, 이승만 대통령이

환영 전보를 보냈는데, 우박사가 인사하러 서울에
가지 않았다고 합니다.  

당시로선 대통령의 전보를 받으면 으레히 감사

인사차 경무대로 달려가야 하는 시대…
이에 이승만 대통령이 비서에게 “혹시 전보가 전달

안된 것 아니냐, 인사 안 올 리가 업다. 가서 확인해보라”

채근해 비서관이 부산 동래 연구소에 찾아왔는데

우 박사님은 종자를 뿌리고 있던 중이었다고 합니다.
이에 “전보를 받았으면 왜 대통령께 인사하러 가지

 않느냐?”고 묻자 여전히 종자를 뿌리면서
“나는 우리 나라와 민족에게 이바지하러 왔는데

지금 일본에서 가져온 이 종자들을 심지 않으면

한해 늦어진다. 대통령께 인사는 한두달 늦어도

괜찮지 않느냐?”고 반문했다가 우호적이던 정치권

 인사들에게도 단단히 미운 털이 박혔다고 합니다.  

아니 대체 뭐가 더 중한 겁니까? =.=
 
타이틀이야 근사해서 ‘한국농업과학연구소장’이지

뭐 제대로 된 시설도 없는 황무지에서
모든 것을 새로이 시작해야 했던 우장춘 박사는

이후 종종 농림부에 추가 예산을 요청했지만
여러 차례 거절당하자 참다 참다 결국엔 대통령을

찾아가 하소연을 했다고 합니다.
심지어 소장이 거처할 숙소에 전기와 수돗물도

안 들어올 정도였으니 뭐가 있었겠습니까?
(그래서 일반 가정 집에 세 들어 사셨다고… OTL)
그제서야 사정을 안 대통령이 장관을 불러 질책해

겨우 자금 지원을 받는 등 고난이 계속됩니다.
하지만 이후에도 공개석상에서 “일본말만 지껄이는

사람이 무슨 애국을 하겠느냐?”며 대놓고 비난하고

 면박을 주는 정치가나 공무원도 숱하게 많았다고 합니다.
세계적인 석학이 모든 명예를 버리고 조국에 왔는데

그저 일본말만 할 줄 안다는 적개심으로 이 같은 냉대를

 당했으니…
 
이후 1953년 8월 어머니 사카이 나카 여사가 사망할

당시, 위중하다는 소식을 들은 우장춘 박사가
대통령에게 일본 방문을 탄원하지만...

일본에서 돌아오지 않을지 우려한 정부가 출국 금지하는

 바람에 어머니의 임종을 지키러 일본에 가지 못합니다.
그렇게 애타고 귀국을 요청하고선 어머니의 임종도

못보게 하다니요...
당시 출국 금지 조치 소식을 듣고 우장춘 박사는

 “이것이 모든 것을 버리고 한국을 위해 봉사해 온
나에 대한 대우란 말인가?”라며 절규했다고

 일본 측 기록은 전합니다.
(그 절규가 사실인지 여부는 잘 모르겠지만

 능히 그러고도 남을 상황…)
평소 우장춘 박사는 후배 연구원들에게 “어머니가

늘 너는 한국 핏줄임을 잊지 말아라, 장차 아버지의

나라로 돌아가 봉사하는 삶을 살아라고 하셨다”라고

 말씀하셨던 터라 연구원들도 다같이 슬퍼하며
연구소 강당에 분향소를 차리고 우박사님 어머니의

죽음을 애도할 수 밖에 없었다고 합니다. T.T
 
이를 안타깝게 여긴 주변인들이 조의금을 모아

전달했지만 우 박사는 그 돈 역시 일본에서 생계 문제로
곤란을 겪던 가족들에게 보내지 않습니다.

그 대신 한국농업과학연구소가 있었던 부산시

동래구 지역이 늘 물 부족으로 고생하고 있던 상황을

 타개하고자 새 우물을 파는데 그 돈을 사용하고
1954년 2월 준공한 우물에 자유천(慈乳泉)이라고

손수 이름 짓습니다.
‘자애스러운 어머니의 젖’이란 뜻이지요…
그후 매일 아침마다 우물 주변을 청소하며

하루를 시작하셨다고 합니다… T.T

(자유천 기념 비석)
 
이런 어려운 상황에서도 우장춘 박사는 연구원들을

독려해 일본 종자에 대항할 한국 채소 종자 개발에 몰두해 1954년부터 맛 좋고 병에 강한 배추와 무를 만들어 내어
우리가 지금 맛보는 싱싱한 김치를 담글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뜻밖의 난관에 부딪힙니다.

농민들이 국산 종자를 불신해 심으려 하지 않은 것입니다.
그래서 여전히 일본 종자가 최고라는 생각에 몰래

밀수해서 심는 일이 허다하게 발생합니다.
 
이에 우장춘 박사는 한국 농업 연구 우수성을 알리기

위한 퍼포먼스로 1955년 전국 곳곳을 돌며

‘씨없는 수박 시식회’를 개최해 농민들에게

 ‘씨없는 수박’을 선보이게 됩니다.
사실 씨없는 수박은 배추, 무 개량사업보다는

상대적으로 쉬운 재배법이지만
눈으로 그 성과를 보여주기엔 안성맞춤이었던 것이죠.
겉으로 보기엔 일반 수박과 똑같아 보이는 수박을

 반으로 쪼개어 씨가 없는 민둥 수박 속을 보여주자
농민들은 그저 우와 감탄을 하게 되고 단박에 신뢰를

얻게 됩니다.

이에 그 자리에서 우장춘 박사님은 이 씨없는 수박을

만들어 낸 것처럼 우리 기술로 개량한 배추와 무가

일본 채소보다 더 좋다는 것을 역설해 국산 종자 사용을

 확산시켜 나갑니다.
또한 이 시식회는 당시 TV가 없던 시절에 극장에서

 본 영화 상영에 앞서 방영하던 <대한늬우스>를
통해서도 널리 국민들에게 홍보되므로써,

본의아니게 우장춘 박사는 세계 최초로 씨없는 수박을

만든 위대한 과학자로 추앙받기에 이릅니다.
 
그 이후는 순풍에 돛 단 듯 순조롭게 진행되어

국산 배추와 무가 확산됨과 동시에
고추도 개량해 처음부터 끝까지 알싸하게 매운

한국 고추로 개량했고
강원도 감자의 품종도 개량해 고랭지에서도 잘 자라면서

 바이러스에 강하고 맛있는 감자로 바꿉니다.
또한 제주도에 가서는 감귤 나무 재배를 적극 권장해

 제주도민들이 감귤을 팔아 자식을 대학에 보낼 수 있는

 경제적 기반을 만들어 주십니다.  
 
이로써 갑자기 유명해진 한국농업과학연구소는

전국 학교의 수학여행 견학 코스가 되어
전국에서 많은 학생들이 연구 현장을 보러 왔는데
우박사님은 늘 고무신 차림에 헐렁한 런닝셔츠

차림으로 맞이하셔서 아이들에게 '고무신 박사'로

 불리셨다네요.
당초 별명은 하도 무뚝뚝하고 사람을 빤히 쳐다봐서

 ‘불독’이었다지만…^^;
 
하지만 과학적 업적으로 보자면 우 박사님의 대한민국에서의 마지막 10년은
새로운 육종학 연구는 포기하고 한국 농업 발전을 위한

 육종 실험에만 매달린 셈이니 과학자로서는 참으로

 감내하기 어려운 희생을 하신 겁니다…
이 같은 그의 헌신에 감복한 이승만 대통령이

이후 농림부장관 직을 제안하지만
연구할 시간도 모자란다며 완곡하게 거절하고

종자 개량에만 매진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귀국후 9년간 자신의 몸을 돌보지 않고

열심히 일만 하던 우장춘 박사는 1959년 5월

원예시험장 창립 10주년 기념식을 마친 뒤

쓰러져 병원 응급실로 실려가
'십이지장 궤양'으로 세차례 수술을 받지만

결국 8월 10일 운명하시게 됩니다.
 
당시 병세가 위중하다는 소식에 정부는 운명하기

 3일전인 1959년 8월 7일 대한민국 건국 후

 두번째 문화포장 수여를 결정하고 이근식 당시

 농림부장관이 병원으로 찾아와 전달했다고 하네요.
병상에 누워있던 우박사님은 “조국이 드디어 나를

 인정했구나”라고 고마워 하면서도 “그런데 좀 일찍

 주지”라고 솔직한 아쉬움을 토로하셨다지요.
그리고 숨을 거두기 직전에도 보릿고개로 아사하는

빈촌을 걱정해 개량에 한창이던 벼 이삭을 링거병 옆에

 달아두고선 "이 벼! 끝을 보지 못하고 내가 죽여야

 하다니"라고 한탄하셨다고 합니다…

으흑… 눈물이 납니다. T.T


결국 우장춘 박사님의 못다 이룬 벼 개량 연구는

1971년 통일벼가 개발되고1975년에 쌀 자급자족이 가능해지면서 1차 완성되었고 이와 동시에 준비하던

2모작 벼는 2010년대에 들어서야 본격화 됩니다.
 
마지막으로 먹먹한 이야기 하나 소개할게요. =.=
하숙하면서 연구에 매진하던 어느 날 집에 돌아온

우박사는 깨끗이 청소된 방과 저녁이 차려진 소반을

보고 깜짝 놀랐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이상한 일은 다음날에도 또 그 다음날에도

똑같이 반복이 됩니다.
이에 우박사님이 자초지종을 알고 보니

한 중년 부인이 우박사님이 세들어 있던 집 주인을 설득해
문을 따고 들어와 청소와 식사를 마련하신 것이었지요.

 1950년대에도 사생 팬이 존재했군요… =.=
 
이에 우박사님이 우렁각시를 자처한 그 부인을

 어렵사리 만나 “왜 이러느냐”고 물어보니,
남편과 사별해 혼자 살던 그 여인은 우박사님의

애국 충정에 감동했다며
“존경하는 박사님을 평생 모시고 살고 싶다”며

우박사님과 재혼하길 희망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일본에 가족을 두고 온 우박사님은

 정중히 거절했다고 하지요.
그랬음에도 그 여인은 계속 우박사님 주위를 맴돌며

 뒷바라지를 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부분에 대해 국내와 일본측 자료는

 엇갈리고 있습니다.
우리나라 자료에선 그저 그 여성 분이 계속 쫓아다닌

걸로 나오고 일본 자료에서는 현지처라고 못을

박더군요… =.=
 
진실은 무엇인지 모르나 이처럼 중년의 여인이

수시로 집에 드나들다보니 어느새 주변의 입 싼 인간들이

 “우박사가 새 살림을 차렸다더라”라는 소문이 퍼져
일본에 있던 부인, 고하루 여사에게까지 알려지게 됩니다.


“이 넘의 영감탱이… 조선인에게 시집가는 거 반대한 친정과 의절해 남의 집 양녀로 들어가고.없는 살림에 6남매를 낳고.

 시어머니까지 모시고 지금껏 고생하며 살았더니만
바다 건너가 돈도 한푼 안 보태주면서 아예 새 살림을

차려? 배신자!!!” 이런 심정이셨을 겁니다… =.=
게다가 마지막 네째 딸의 결혼식마저 남편이 오지 않자

 단단히 배신감을 느낀 부인은 당초 자식들을 다 출가시킨

후 한국으로 건너와 우박사님과 같이 살려던 계획을

 접었다고 합니다.
(그때 결혼한 막내사위가 경영의 신으로 불리는

교세라 그룹 창업자이자 일본항공 회장이 되는

 이나모리 카즈오…)
실은 우 박사님은 이때도 정부에 일본에 잠시

다녀오겠다고 탄원을 했다고 하는데…
여전히 출국 금지… =.=
 
그랬음에도 이후 남편이 위독하다는 소식을 접하고는

 어렵게 지인들의 도움으로 한국에 오지만,
차마 새 부인이 있는데 떳떳이 면회하기가 어렵다고

생각해 남편을 만나기를 망설였다고 합니다.
그때 딱한 사정을 접한 국립중앙의료원 측의 배려로

 간호사복을 입고 간호사인 척 병상에 갔는데
사경을 헤매던 우장춘 박사가 부인을 한 눈에 알아

보고 그간의 오해를 풀었고 결국 8월 10일 새벽 3시 10분

 아내 고하루 여사가 지켜보는 가운데 눈을 감았다는
슬픈 이야기가 아스라히 전해지고 있습니다.
그때 우장춘 박사님 나이 겨우 62세…

지나친 과로와 열악한 환경 탓에 단명하신 겁니다… T.T
 
우장춘 박사님이 운명한 뒤 정부는 장례식은

국장에 준하는 사회장으로 치루기로 결정합니다.
이 사회장은 대한민국 건국 이후 최초였으니

국가에서 우장춘 박사님의 성과를 인정한 것이지요.
우장춘 박사님의 묘는 원예시험장이 옮겨 온

경기도 수원 농업진흥청 내 여기산에 모신 후
현재까지 매년 농업진흥청 주최로 추모식을 올리고 있습니다.
 

(농촌진흥청 우장춘 박사 추모식 장면)
 
또한 우장춘 박사가 연구에 매진하던 부산 동래구

온천동 원예시험장 자리는
지금 우장춘 기념관이 되었습니다.
 

(우장춘 기념관 안내문)


초딩 시절, 부산 광안리 해수욕장에 놀러 간 어느 날,
수박을 드시던 아버지가 문득 "씨 없는 수박을 만드신

우장춘 박사님이 노벨상을 탔어야 했는데…
나라가 힘이 없어서 널리 알리지 못했다"라고 한탄하셨습니다.
어린 마음에도 그런 훌륭한 분이 일본에서 귀국하여

고생만 하시다가 돌아가신 얘기에 눈물이 났지요.
 
비록 이제는 씨없는 수박 최초 개발자가

 우장춘 박사님이 아니라고 알게 되었지만,
알면 알수록 더 위대한 분이란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어려운 시대 환경 속에서 본인과 가족의 희생을

바탕으로 우리 국민들의 식량 문제 해결을 위해
기꺼이 돌아오셔서 인생을 바치신 우장춘 박사님의

충정 덕에 일본에 로열티를 내지 않고
국산 종자로 만든 사각사각 배추와 양배추, 무,

맛있는 제주감귤, 강원도 대관령 개량감자를
먹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후로도 농업진흥원 후배들의 후속 연구로

지속적인 개량이 이루어지면서
한국 배추의 우수성이 널리 인정되어

2004년 배추게놈 분석 국제회의에서 우리나라 배추가
게놈 분석을 위한 대상 품종으로 선정되는 개가를 올렸고
이제는 중국과 일본으로 김치용 배추 종자를 연간 수백억원식 수출하는 성과를 이루고 있는 것이
다 우장춘 박사님의 희생이 그 토대가 되었다는 사실에

다시 한번 옷을 여미고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자연과학 학사 출신이자 야간 MBA를 이수한 자로서

 개인의견을 첨언하자면…
과학과 기술 인프라는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는

오랜 축적과 경험의 산물이며 국가의 발전과 부가가치를

 창출하는 가장 큰 원동력입니다.
서구 및 일본 등 주변 강대국들에 비해 한참 늦게

과학 입국한 우리나라가 현재와 같은 위상까지 올라온

 데에는 이처럼 수많은 과학자와 경영자 등

많은 선각자들의 노력이 큰 역할을 하셨음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부디 그 분의 업적이 더 널리 부각되어

새로운 과학 꿈나무들에게
롤 모델로 기억되고 존경받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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