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같은 놈이 어떻게 경찰이 되었을까?[1]
경찰관이 된 사회적 약자
1987년에 춘천에서 고등학교를 다녔다. 고향인 영월을 떠나 입학했으니 일종의 유학인 셈이었다. 가정 형편이 어려웠지만 형의 거듭된 설득에 부모님은 결국 용단을 내렸다. 입학하자마자 형은 군대에 가버렸고 생면부지 타향에서 난 졸지에 고학생이 되었다. 공부든 취사든 빨래든 외로움이든 혼자 해결해야 했다. 모든 게 서툴렀다. 특히 외로움은 어쩔 도리가 없었다. 그것은 끈질기고 난폭하게 나를 괴롭혔다. 야자 끝나고 자취방 문을 열면 엎드려 있던 검은 외로움이 확 끼쳐오는 게 너무 끔찍했다. 불을 켜도 놈은 사라지지 않았다. 장판 밑이나 벽장 같은 데 잠복했다가 수시로 출몰했다. 내가 취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대비책은 기타치고 책 읽고 그리고 혼자 우는 거였다.
그해 6월, 친구들이 너무 보고 싶었다. 집에서 엄마가 해주는 따뜻한 밥만 먹고 재잘거렸을 친구들에게 내 외로움을 위로받고 싶었다. 원주터미널에서 일요일 오후 네 시에 보자고 약속을 잡았다. 원주 가는 편도 차비밖에 없었지만 걱정하지 않았다. 돌아올 때 차비는 친구들이 줄 테니까. 땡볕에 빨래를 말리듯 곰팡내 나는 입을 한껏 벌리고 실컷 떠들어야지. 외로움 극복하는 법을 아냐며 한참 동안 설레발쳐야지. 개교 기념 마라톤 대회에서 축구부, 야구부를 제치고 1등한 것도, 백일장에서 입상한 것도 자랑해야지. 하지만 친구들은 세 시간이 지나도 나타나지 않았다. 뭔가 급한 사정이 생긴 게 분명했다. 휴대폰이 없던 시절이라 그 이유도 알 수 없었다. 등교를 해야 하니 노숙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안달복달한다고 해결될 일이 아니었다. 어떻게든 춘천 가까이까지 가야 했다. 무작정 횡성군을 향해 걸었다. 차들이 쌩쌩 달리는 국도에서는 사고를 당할까 봐 무서웠다. 그보다 더 무서운 건 내일 학교에 갈 수 없다는 거였다. 한적한 지방도에 접어들면 히치하이킹을 할 생각이었다. 뛰다 걷다 두 시간을 허우적거려 횡성군 근처에 도착했다. 온몸이 땀에 젖었고 배가 고팠다. 더는 걷거나 뛸 수 없었다. 사위(四圍)는 어둑어둑했고 멀리서 개 짖는 소리가 들려왔다. 다리를 절며 어느 촌락으로 접어들었다. 집집마다 전등이 켜지고 밥 짓는 냄새가 안개처럼 골목을 가득 매웠다. 담이 높은 집은 지나쳤다. 사나운 개를 기르는 집도 걸렀다. 맹견철침(猛犬鐵針)의 부잣집은 이방인을 달가워하지 않을 테니까.
“저... 밥 좀 주세요.”
담이 낮고 울타리 허술한 농가로 찾아 들었다. 백열등 희미한 마루에서 노부부가 저녁을 먹다 말고 어깨가 축 늘어진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나는 어쩌다 곤경에 처했는지 있는 그대로 설명했다. 밥상에는 보리밥과 된장찌개, 푸성귀와 고추장, 김치와 산나물이 올라 있었다. 아주머니는 대접 가득 잡곡밥을 내왔다. 아주머니는 허겁지겁 먹는 나를 보더니 치맛자락으로 눈물을 훔쳤다. 군대 간 막둥이가 생각난다며, 밥은 잘 챙겨 먹는지 걱정이라며 훌쩍이셨다. 아저씨는 된장찌개를 내 앞으로 밀어 주셨다. 밥을 든든히 먹고 아저씨를 따라 나섰다. 십분 정도 걸어가니 경찰 검문소가 나타났다. 아저씨는 경찰관에게 나를 춘천 가는 차에 태워 주라며 부탁하셨다. 그리고 오천 원짜리 지폐 한 장을 손에 쥐어주셨다.
그해 여름방학에 노부부를 찾아갔다. 내 손에는 수박 한 통과 막걸리 한 병이 들려 있었다. 집에는 아무도 없었다. 수박과 막걸리를 수돗가 물통에 담그고 한참을 기다렸으나 노부부는 돌아오지 않았다. 난 공책을 찢어 간단한 인사 글을 남겼다. 3년이 지난 후, 군 입대 전에 그 집을 다시 찾았다. 군 입대가 대단한 일은 아니었지만 난 그때까지의 삶을 갈무리하고 싶었다. 나보다 서너 살 많아 보이는 청년(막둥이) 하나가 수돗가에서 어두운 얼굴로 서 있었다. 어머니가 돌아가셨다는 뜻밖의 말에 나는 깜짝 놀랐다. 엄마와 어떤 관계냐는 청년의 물음에 나는 자세한 설명을 하지 않았다. 나에게 밥을 먹일 때 막둥이 생각에 울었다는 걸 말하면 청년은 어머니에 대한 상실감이 더 클 테니까.
돌아보면 나를 키운 건 8할이 외로움이었다. 내 외로움이 절망으로 이어지지 않은 건 이 땅의 횡성 어머니들의 따뜻한 밥 한 끼 덕분이었다. 오천 원을 쥐어주시던 횡성의 아저씨, 춘천고 학생이라 특별히 차 잡아 주는 거라며 너스레떨던 검문소 경찰관. 내가 그 숱한 방황과 방랑에 노출되었지만 결국 경찰관이 된 것도 밥 한 끼의 면역력 덕분이었다. 대추가 저절로 붉어질 리 없듯 경찰도 아무나 저절로 될 리 없다. 해와 달과 태풍이 대추를 붉게 했듯 개인적안 시련과 사회에 대한 고민과 인간적인 외로움이 스며야 비로소 경찰이 된다. 그러니 누군가의 외로움을 못 본 체하는 경찰의 교만은 얼마나 꼴불견인가. 누누이 말하지만 내가 나를 만든 게 아니다. 나에게 해코지하지 않은 누군가의 무관심마저도 나를 만들었으므로 감사한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