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쓰기는 봄을 부른다

기쁨을 기록하세요.


겨울의 두터운 손등 밑에서 움이 튼 새싹들이 봄바람을 기다리고 있다. 겨울은 어머니처럼 비와 눈을 머금고 씨앗을 품었다. 따뜻한 봄기운이 돌면 씨앗들처럼 겨울을 난 우리도 전원교향곡의 지휘자가 될 수 있다. 천진 난만 하게, 기쁘게!


새로운 생명의 탄생은 동시다발적이다. 여기저기서 머리를 내밀 싹들이 땅을 진동케 한다. 반면 봄을 맞이하는 사람들은 어떤가? 겨울을 단지 봄으로 가는 징검다리 정도로 생각하고 건너뛰려 한다. 겨울이 어떻게 봄을 길러 냈는지 안다면 따뜻한 포옹으로 맞이하기라도 해야 할 텐데 어차피 다시 올겨울이라고 무심하다. 다시 겨울이 올 거라고 어떻게 장담할 수가 있을까?


톨스토이는 ‘살아갈 날들을 위한 공부’에서 “행복한 사람이 되고 싶은가? 우리가 원하는 행복은 이미 모두 주어졌다는 것을 기억하라. 진정한 행복의 원천은 우리들 가슴에 있다. 다른 곳에서 행복을 찾는 것은 어리석다. 행복은 정작 우리 안에 있다. 자기 안에 없는 행복은 어디에도 없다. 궁극적으로 행복은 타인을 사랑하는 능력이다"라고 말했다.


이 세상에 가지지 못한 것보다 가진 것들이 훨씬 많은 우리는 왜 인생의 봄을 맞이하여 꽃을 피우지 못하는 것일까? 알랭 드 보통은 <불안>을 통해 “주변 사람들의 조건과 우리의 조건에 대한 비교가 박탈감을 낳는다"라고 말했다. 주변 사람들을 통제할 수 없기에 행복하기가 힘들다. 행복이 타인과의 비교 때문에 올 수 없다니 이보다 더 안타까운 일은 없을 것이다. 너무도 쉽게 타인의 손안에 우리의 행복을 쥐여 준 결과다.


글을 쓰기 전에는 마음의 갈피를 잡기 어려웠다. 머릿속에만 맴도는 해결책은 아지랑이처럼 손에 잡히지 않았다. 어지럽게 흩어져 있던 마음을 색깔과 모양을 갖춘 글로 정리하며 겨울을 보냈다. 무의식을 넘어설 수 없었던 의식의 테두리는 너무도 뻔한 해답만 주는 것 같아 한계가 느껴지게 했다. 그럼에도 가끔 손가락 끝을 통해 나도 모르는 글들이 마치 거미가 거미줄을 치듯 뽑아져 나올 때가 있었다. 그럴 때 글이라는 것이 머리로 쓰는 것이 아니라 손가락이 쓰는 것이므로 너무 절망할 필요가 없다고 느꼈다. 최소한 부지런하기만 하다면 봄은 누구에게나 올 수 있다는 희망이 생겼다고나 할까?


펜은 우선 스스로를 설득한다. 다름 아닌 자신의 편견과 고집 때문에 앞으로 나아가지 못했음을 여실히 보여준다. 추측만으로 막연한 불안에 떨던 시간을 계량해서 보여준다. 터무니없는 타인의 잣대에 놀아난 시간을 계산해서 보여 줄 때 느꼈던 허망함은 덤이다. 이렇게 인생의 의미 찾기는 글쓰기를 통해 가능하다. 말로는 담을 수 없는 진실이 글에는 담긴다.


랄프 왈도 에머슨은 “모든 사람이 저마다 부리고 쓸 수 있는 힘을 타고났으므로 그 힘에 맞게 각자 마땅히 가야 할 자리에 가는 것”을 보고 싶다고 말했다. 무기력의 늪에서 벗어나 “과연 내가 부리고 쓸 수 있는 힘’은 글에 있음을 다시금 깨닫는다.


창밖을 보니 유모차를 타고 가던 아기가 내려 서너 살가량의 언니와 손을 잡고 엄마의 카메라 앵글을 바라본다. 마치 행진이라도 하는 것처럼 연이어 반려견들이 경쾌한 발걸음으로 지나다닌다. 그러다가 뒤를 돌아보기도 하는데 혹시 텔레파시라도 통한 것일까 싶어 손을 흔들어 본다. “기뻐하라, 즐거워하라, 삶의 목표는 기쁨이다. 자연과 만나는 사람에게서 기쁨을 느껴야 한다"라고 톨스토이는 말했는데 바로 이 순간을 말하는 것이리라.



순간을 기록하는 것은 글이다. 순간에 살 수 있는 사람이라면 인생의 봄을 맞이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