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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토리텔러 레이첼 May 29. 2024

우리는 이야기를 해야만 한다.

우리 안의 곡창지대

우리는 이야기를 해야만 다. '이야기'는 과거라는 곡창지대를 품은 무한한 가능성의 공간이다. 갑자기 돌아가신 아버지를 잃은 상황이 용납이 안되어 어금니를 앙다물고 기억하지 않으려 . 그렇게 아버지를 두  잃었다. 이제 글안에서 아버지를 만난다. 우리가 이야기를 한다면 오늘을 살 수 있다.


Moso Bamboo라는 나무는 나이테가 없고 마디만 있다. 4년 동안 3센티미터 자라지만 그 기간에 뿌리를 깊고 넓게 내린다.  5년 차부터는 하루에 30센티미터씩 자란다. 나도 전 생애적인 발달을 하고 있다. 이제야 대나무처럼 쑥 크고 있는지도 모른다.


빅터 프랭클은 '인간은 대개 그루터기밖에 남지 않은 일회성이라는 밭만 보고 그 행동과 기쁨과 심지어는 고통까지도 구원해 준 과거라는 곡창은 그냥 지나쳐 버리는 경향이 있다'라고 말한다. 과거는 사라지는 것이 아닌 확실한 존재방식이라고 한다. 과거가 곡물창고라고 하니 그 곡물창고에 무엇이 들어있는지 궁금하지 않은가?


최근에 어느 노인을 돌보는 친구의 이야기를 듣고  사람의 곡창지대를 어떻게 보호할 수 있을까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글쎄 그 노인은 내가 가면 그때부터 한이 맺힌 듯 욕을 . 평생 그런 욕을  분 같지 않은데 갑자기 그런 욕이 터져 나오는 이유는 무엇일까?"

"자녀들도 알고 있어?"

"자녀들이 오면 바쁜데 왜 왔냐며 얌전하셔. 그렇지만 자녀들이 가고 나면, 자주 오지 않는다고 불평을 시작해."


그 노인의 욕을 모두 들어야 하는 친구는 괴롭다고 했다. 의사를 통해 우울증 약물치료를 받으면 좋겠는데 자녀들은 미처 그런 생각까지 하지는 않는단다. 아직도 노인의 우울증은 비중 있게 취급되지 않는다.


'염증에 걸린 마음'이라는 책에서는 '몸의 염증은 뇌가 작동하는 방식을 변화시키고 이는 다시 우리가 우울증으로 알고 있는 기분과 인지, 행동의 변화를 불러온다"라며 우울증이 전신성 염증 질환의 여러 증상 중 하나이고 높은 혈중 사이코 카인 수치와 직접 연결된 것'이라고 주장한다.


우울증에 걸린 것이 순전히 당사자의 마음 때문이 아니라 몸의 염증이 원인이 되었다는 것은 우울증을 새롭게 바라볼 수 있게 한다. 그렇다면 몸과 마음을 함께 통합적으로 치료할 수 있게 될 때 훨씬 더 치료 효과가 크지 않을까?


돌아가신 아버지는 지금 생각해 보면 심한 우울증을 앓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 한다. 우울증으로 인해 술로 자기비판을 한 셈이었다. 아버지 몸에는 염증성 사이토카인이 많았고, 그 염증은 아버지의 스트레스를 촉진시키고 아버지는 그렇게 스러져가신 것이다. 반면에 스트레스가 아버지의 몸속 염증을 폭발적으로 분출시키고 아버지는 그에 속수무책이었을 수도 있다. 우울증의 가장 큰 이유는 스트레스라고 한다. 스트레스는 면역계를 교란시켜 더 많은 염증성 사이토카인 (CRP)을 혈액 속으로 쏟아 낸다고 한다.


간혹 팔이나 발이 부러진 사람들이 캐스트를 하고 그 캐스트에 쾌차를 기원하는 문구를 잔뜩 받아서 당당하게 다니는 것을 보았다. 길을 가다가 넘어져 무릎에서 피가 날 때조차 주변에 있던 사람으로부터 "괜찮니? 괜찮지?"라는 말을 들으며 위로 받는다. 하지만 마음아픈 경우는  위로를 받기 힘들다. 자신의 마음뿐 아니라 다른 사람의 마음을 느끼는 것에 문외한이었던 사람들이 공감 가는 위로를 해 줄리도 만무하다. 무슨 말을 해 주어야 할지 막막하기만 할 것이다.


우울증은 상실감의 다른 표현이다. "난 괜찮아” “웃는 표정을 지어봐” “가족과 친구를 위해 괜찮아야 해” “다른 사람을 돕고 싶어”라는 말을 늘 하며 지낸 사람들은 자신도 우울증에 걸렸을 수 있음을 고려해 보아야 한다.


'염증에 걸린 마음'의 저자가 사는 영국에서도 정신과 의사는 청진기를 지니지 않는 지침이 있다고 한다. 신체적 측면을 치료하는 의사와 정신을 돌보는 의사는 각자의 영역위해서 훈련받기 때문에 환자는 몸과 마음을 분리하여  치료를 받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 몸과 마음은 서로 아픈지도 모르고 한몸안에서 따로 살았다. 


현재 양로원이나 재활 시설에 있는 노년층들 중 제대로 마음과 몸을 통합한 치료를 받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 싶다. 그렇다 보니 노인의 우울증과 같은 정신 치료는 슬쩍 넘어간다. 그러는 사이에 늙은 몸과 다친 마음은 서로를 위로할 방법을 찾지 못하고 스러질 것이다. 그 이야기는 바로 나의 이야기가 될 수 있다.


친구에게서 들은 욕하는 노인의 이야기는 현실적이다. 자신도 많이 아프면서 친구는 노인의 이야기를 들어드리면 어떻겠냐는 제안을 했다. 그 노인께 무슨 일이 있었는지 들어드린다면 아픈 마음도 달래 지지 않을까 하면서.


"만일 내가 글을 쓸 수 있었다면 이렇게 안 됐을 거야."라고 말씀하셨다는 그 노인처럼 나의 엄마도 이런 말씀을 하셨다. "만일 글을 쓸 수 있었다면 자식들이 자라는 꼬물꼬물 한 모습을 전부 기록했을 거야." 


늦지 않았다. 이제라도 자신을 표현할 수 있도록 말하기와 글쓰기를 통한 치료를 시작해야 한다.  스트레스가 몸속 사이토카인, 염증을 막아 줄 수 있도록 자녀들도 부모님과 충분한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어떤 방법이라도 강구해야만 한다. 모로 대나무가 땅속에 키우고 있는 죽순처럼 자신의 이야기를 숨기고 살아가는 노인들이 있다. 모로 대나무의 죽순이 한꺼번에 땅속으로 머리를 내밀며 자신을 치유하는 것처럼 사람들도 스스로를 치유할 수 있다. 100세 시대 서로가 서로의 이야기에 관심을 가져 주는 것, 그것이야말로 치유다.


이야기를 좋아했던 아버지, 지금이라면 하루 종일 아버지의 객살이 담긴 이야기를 들어 드릴 수 있을 텐데, 그 아버지가 안 계시다. 이제 내가 할 일은 엄마의 이야기를 들어 드리는 일이다. 엄마가 하시고 싶어 하는 이야기를 모두 고 싶다.


우리는 이야기를 해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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