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의 혈당 수치는 내 성적표
초등학교 때 나에게 엄마는 세상에서 제일 예쁘고 음식을 제일 맛있게 만드는 사람이었다. 누구보다 바쁘고 성실했으며, 열심히 사는 사람이기도 했다. 어떨 땐 가족들 눈치를 많이 보는 사람이었고, 남 싫은 소리 하기 싫어 혼자 궂은 일을 다 하는, 세상에서 제일 바보 같은 사람이기도 했다. 하지만 내가 낮은 시험 점수를 받아오면 엄마는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사람이 됐다. 엄마는 소녀같은 사람이기도 했다. 시를 사랑하고, 소박하게 핀 꽃들을 사랑하며, 길가에서 나물을 파는 할머니들을 지나치지 못하는 착하디 착한 영혼을 가진 사람이다.
이렇게 다채로운 빛깔을 가진 우리 엄마는 1형 당뇨를 앓고 있다. 당뇨는 2가지 종류로 나뉜다. 생활 습관 개선으로 나아질 수 있는 2형 당뇨와 달리, 몸이 인슐린을 만들지 못하는 1형 당뇨는 평생 인슐린 주사에 의존해야 한다. 점점 아픈 날이 늘어가는 엄마를 보며, 내 안에서 엄마의 여러 모습들 중 '1형 당뇨 환자'라는 정체성이 우뚝 솟아나기 시작했다. 아픈 엄마를 한국에 홀로 내버려 두고, 내 갈길을 찾겠다며 해외에서 편하게 살고 있는 내가 이기적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엄마의 들쭉날쭉 널뛰는 혈당 수치가 마치 내 성적표처럼 느껴져 강박적으로 집착하기도 했다.
시인인 엄마는 나의 T스러운 질문에, 가끔 시로 화답할 때도 있다. 그럴 때면 속이 터졌다.
당 관리가 너무 힘들고 지쳐, 인슐린을 일부러 안 맞았다는 엄마의 말에 엉엉 울었다. 혈당 관리가 안되면, 앞으로 건강한 엄마와 함께 보낼 날들이 점점 줄어드는 것 같아서 나는 이렇게 신경 쓰이고 슬픈데, 엄마는 왜 본인의 몸을 나만큼 신경 쓰지 않냐고. 엄마가 보기엔 내가 직장도 있고, 결혼도 했고, 행복해 보이는 것 같지만, 아픈 엄마를 생각하면 이런 것들 다 소용없는걸 모르냐고, 엄마 건강을 안 챙기면 그게 언니와 나에게 안 좋은 영향을 준다는 걸 모르냐고, 엄마를 나무랐다.
그 순간, 초등학교 여름 방학을 앞두고 낮은 등수가 적힌 성적표를 들고 '엄마, 나는 공부에 취미가 없어.'라고 말했던 때가 떠올랐다. 눈물이 쏙빠지게 혼이 났던 날이었다. '공부를 안하면 인생에서 실패자가 되는 걸 왜 모르니. 좋은 대학에 갈게 아니면, 대학에 갈 필요도 없고, 그냥 그렇게 멸시받으면서 실패자로 사는 거야.'라며 겁을 주던 엄마 모습이 아직도 생생하다. 천사 같던 엄마가 그렇게 무서운 사람이 되다니. 그 뒤로 나는 쭉 상위권을 놓치지 않는, 엄마를 자랑스럽게 하는 딸이 됐다. 그리고 알았다. 높은 등수를 가져올 때만 인정받았던 어린 내가, 아직도 내 안에서 무조건적인 사랑을 갈구하고 있다는 것을.
그 상처받은 아이가 이제는 '이건 엄마 건강을 위한 거니까, 겁을 주면서 이야기할 필요가 있어.'라고 합리화하며 엄마를 몰아붙이고 있었다. 혈당 관리를 하지 않으면, 우리 앞으로 행복하게 같이 보낼 시간들이 줄어드는 걸 왜 모르냐며 엄마를 향해 울고 있었다. 결국 내가 받았던 상처를 엄마 마음에 그대로 돌려주고 있었던 것이다.
낮은 점수의 성적표를 들고 떨고 있던 어린 나와 지금의 엄마가 겹쳐 보였다. 내가 행복한 인생을 살았으면 해서 나를 겁주면서까지 혼내던 젊은 시절의 엄마와, 같은 방식으로 엄마를 몰아붙이는 지금의 나도 겹쳐 보였다.
그때 깨달았다. 엄마에게 지금 필요한 건, 어릴 때의 내가 간절히 원했던 무조건적인 수용과 사랑이라는 걸. 무조건적인 사랑과 지지가 삶을 살아갈 힘을 준다. 삶은 목적지를 향해 달리는 게 아니라, 지금 이 순간을 의미 있고 행복하게 보내는 것이다. 앞으로는 혈당 수치로 엄마를 나무라지 않고, 따뜻한 지지와 격려를 보내줘야지.
시인인 F 엄마와, 엄마의 혈당 수치를 성적표처럼 느끼는 T인 딸의 당뇨 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