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에는 엄마 혈당에 덜 집착하기

자유의지는 환상, 엄마의 혈당은 의지가 아닌 환경의 문제다.

by 파일럿

엄마는 췌장의 일부를 절제하는 수술을 했고, 췌장에서 혈당을 조절하는 인슐린을 분비하지 못하는 1형 당뇨를 앓고 있다. 예전에는 손끝을 의료용 바늘로 찔러, 밥 먹기 전과 이후 혈당을 측정하는 방식으로 혈당을 관리해야 했지만, 이제는 팔에 하루 종일 붙여두는 연속혈당측정기로 실시간으로 혈당의 움직임을 핸드폰 앱으로 파악할 수 있어 당수치 관리가 훨씬 쉬워졌다.



하루에도 몇 번씩 고혈당과 저혈당을 왔다 갔다 하는 엄마의 혈당 그래프를 보며, 혈당 관리를 엄마에게만 혼자 맡겨둘 것이 아니라 나도 같이 신경 써서 해야겠다고 다짐한 2025년은 나에게 정말 특별한 한 해였다. 엄마의 건강에 대한 책임을 느꼈으며, 자식으로서 늘 엄마의 사랑과 염려, 걱정을 받기만 하다가 이제는 상황이 뒤바뀌어 내가 더 엄마를 챙겨주고, 걱정하고, 잔소리를 하는 입장이 됐다. 배움도 많았다. 올 한 해, 엄마 건강을 신경 쓰면서 각종 의학 정보들을 소비하다 보니 나도 건강에 관심이 많아졌다. 덕분에 매일 아침 운동하고, 식단에 더 신경 쓰게 되어 근육량도 늘고, 건강 수명의 대표적인 지표인 최대산소섭취량(VO2 max)도 늘어났다. 이런 객관적인 지표를 능가하는 가장 큰 배움은 우리가 살아가면서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줘야 하는 것은 채찍질이 아니라 무조건적인 지지와 사랑, 격려라는 것이다. 사람들 모두 저마다 힘든 싸움을 하고 있고, 당사자인 엄마는 나보다 더 힘든 병과의 싸움을 하고 있다. 그러니 엄마에게 필요한 건 왜 인슐린을 깜빡했냐는 책망이 아니라, 잘하고 있는 부분에 대한 격려이다. 깨달았다고 생각하면서도 어제는 엄마와 통화하며 답답한 마음에 언성을 높였다. 그리곤 바로 후회했다.




12월 30일 엄마의 혈당 그래프, 초록색이 정상 수치의 범위이다.


엄마 혼자 혈당을 관리했을 땐, 자는 동안 저혈당이 오는 것이 두려워 잠자리에 들기 전 일부러 탄수화물, 과일 위주의 간식을 먹어 혈당을 200 이상 올려두고 자는 일이 많았다고 한다. 그런데 문제는 혈당이 높으면 충분한 숙면을 취하기가 어렵다. 질 좋은 수면을 취하지 못하면 인슐린에 대한 몸의 반응이 둔해져, 다음날 혈당 스파이크가 더 쉽게 온다. 악순환의 반복인 것이다. 그래서 최근에는 엄마에게 취침 전 간식으로 당을 빨리 올리는 당분이나 탄수화물 대신, 천천히 올려주는 단백질과 지방 위주의 간식을 먹을 것을 권했다. 이 변화로 인해 엄마의 수면 중 혈당이 안정적으로 유지되는 것을 경험해 좋은 성과가 있었다.



그런데 요 며칠, 엄마의 식후 혈당이 350 이상 넘어가는 날들이 계속됐다. 인슐린을 잃어버린 적도 있었고, 식사시간 즈음 저혈당이 와 인슐린을 맞지 않고 탄수화물이 많은 식사를 한 적도 있다고 한다. '내가 곁에 있었으면 잘 조절할 수 있었을 텐데' 하는 안타까운 마음과 식후 혈당을 잡기 위해 탄수화물을 먹기 전에는 반드시 인슐린을 맞고 식사하자고 함께 다짐한 다음날, 또 400 가까이 올라간 혈당 그래프를 받고는 감정이 북받쳐 올랐다. 그때 나는 공원에서 달리기를 하고 있었다.




엄마도 분명 열심히 하고 있는 것임을 알면서도 이렇게 안 좋은 패턴이 반복될 때면, 불타고 있는 집 안에 있는 엄마를 내가 꺼내주지 못하고 있는 것 같은 마음이 든다. 나만 건강을 챙기고, 엄마 건강은 이렇게 내버려 두는 게 맞나? 앞으로도 이런 일이 계속 반복될 텐데 그럴 때마다 이렇게 엄마에게 감정적으로 반응하는 것은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 것을 아는데. 어떻게 하는 게 좋을까. 왜 엄마는 자신의 혈당에 집착하지 않을까.



부정적이고 우울한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나를 괴롭히고 있었다. 그만 생각하자. 그러다 문득, 자유 의지는 환상에 불과하다는 뇌과학 연구 결과를 접했던 게 번뜩 생각났다. 현대 뇌과학은 우리의 의사결정이 독립적으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이미 그런 결정을 하게 하는 유전적, 환경적 요인에 의해 먼저 뇌에서 결정된 결괏값이라고 말한다. 우리 의식은 그에 대한 스토리텔링을 더해 왜 그런 행동을 했는지 '이유'를 붙이는 역할을 할 뿐이라는 것.



영화 매트릭스에도 비슷한 내용이 나온다. 네오에게 사탕을 건네는 오라클에게 네오는 "당신은 내가 사탕을 먹을지 안 먹을지 이미 알고 있지 않냐, 이렇게 내 선택들이 이미 정해져 있는 거라면, 내 선택이 무슨 의미가 있냐"라고 묻는다. 오라클은 이렇게 말한다.


"너는 여기에 선택을 하러 온 것이 아니야. 네가 왜 그런 선택을 했는지 이해하려고 온 거지.


영화 매트릭스, 오라클의 유명한 대사



내가 갖고 있는 생각들, 이념들, 사회적인 약속들, 그리고 내가 하는 선택들. 내가 선택했기에, 다 나의 주관적이고 독립적인 의지처럼 보이지만, 사실 상당 부분은 환경적인 요인에 의해 미리 정해진 선택일 가능성이 많다. 마치 알고리즘에 의해서 피드에 계속 보이는 두바이쫀득쿠키를 내가 실제로 먹고 싶어하는 것처럼 말이다. 현대의 뇌과학 연구 결과들도 이를 뒷받침하고 있다. 신경과학자 베냐민 리벳의 실험에 따르면, 우리가 어떤 행동을 하겠다고 의식적으로 결심하기 약 0.5초 전에, 이미 뇌의 해당 부위가 활성화된다고 한다.



즉, 엄마가 음식을 손에 쥐거나 인슐린을 잊어버리는 행동은, 엄마의 자유의지가 개입하기 이전에, 이미 수십 십 년간 쌓인 당뇨에 대한 심리적인 기저, 현재 혈당 수치에 따른 호르몬 상태, 그리고 저혈당에 대한 본능적 공포라는 환경적 자극이 만들어낸 생물학적 결괏값인 셈이다.



내가 처한 상황과 엄마가 처한 상황은 완전히 다르다. 만약 내가 엄마와 같은 환경, 똑같은 호르몬 불균형, 그리고 똑같은 고립감을 가진 채 그 순간에 서 있었다면, 나 역시 엄마와 같은 선택을 했을지도 모른다.



결국 내가 할 일은 엄마의 '잘못된 선택'을 책망하는 것이 아니라, 엄마의 뇌가 왜 그런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는지 그 배경을 '이해'하는 것이다. 엄마도 엄마의 상황 속에서는 최선의 선택을 하는 중일 테니까. 나는 그저 엄마의 환경 변수가 조금 더 긍정적인 방향으로 작용될 수 있도록, 옆에서 무조건적인 격려와 사랑을 더해주면 충분하다. 새해에는 엄마의 혈당 수치에 좀 덜 집착해야지.





12월 30일, 엄마의 일기

05 42 256

저혈당이 무서워 고혈당을 방치했다.

알았다.

고혈당으로 인해

ㆍ설사가 잦았다.

ㆍ음식 섭취를 많이 했다

ㆍ췌장이 아픈데 자주 호르몬 분비를 해야 하니 기진맥진

ㆍ간기능이 힘들었다

ㆍ대장도 힘들었다.

ㆍ소화도 되기 전 담도길도 힘들자 간 수치가 높아지고 항상 피곤했다.

*이렇게라도 살아 버텼다는 현실이 기적 같다.

*혈당을 잡는 것 큰 과제

지금이라도 깨달은 것이 은혜요 축복이다.


*매분 매시를 체크하는 매의 눈으로 지켜보는 딸들 덕분이다.

하나님 은혜다.


*음식에 욕심내지 않고 질에 신경 쓰기

*소식, 천천히 먹기

* 걷기, 새벽 운동하기

*나를 잘 챙기고 사랑하기

*주위 신경 덜 쓰기

*느리게 살기

*하루 한 가지씩 잘하기

*감사하기

(2026년 실천사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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