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스탯을 파악하자
대학생들 앞에 설 일이 있었다. 고등학생들의 멘토로 활동하는 전국의 수백명의 대학생 멘토들 중, 최우수 멘토 15명이 싱가포르에 해외 탐방 견학을 오게 됐고, 이 학생들에게 2시간 동안 내 이야기를 들려줬으면 한다는 요청을 받았다.
요즘엔 다양한 플랫폼들이 많다. 멘토링을 제공하는 플랫폼을 통해 1:1, 많게는 1:4 정도의 멘토링을 해본 적은 있다. 이런 세션들은 아는 후배를 만나러 가듯 편한 마음으로 임했는데, 1:15에 장소 대관까지 해서, 그리고 이번처럼 기업 스폰서까지 있었던 적은 처음이라 조금 긴장되기도 했고 설렜다.
정말 신기했던 건, 멘토링 문의를 받기 몇 주 전, 커리어 관련 책을 출판한 학교 후배와 카톡을 나누다 '평소에 후배들로부터 진로 상담 문의가 종종 오는데, 이걸 좀 더 많은 학생들에게 닿을 수 있게끔 하는 방식은 없을까'라는 대화를 나눴는데, 곧바로 이번 멘토링 문의가 온 것이다.
나도 커리어 고민을 할 때면, 무작정 조언을 듣고 싶은 사람들을 찾아가 많이 물어보고 다녔다. 그 결과 내가 내린 결론은, 사람들은 대부분 자기가 듣고 싶은 이야기만 듣는다는 것이다. 마음 속에 답은 이미 정해져 있고, 내가 가고픈 길을 지지하는 조언만 마음 속에 찐하게 남는다. 결국, 자기가 스스로 가야할 길을 가게 되고, 그렇게 헤매는 무수한 과정들이 합쳐져 인생이 되는 것이다.
그러니 멋진 말을 해주려고 고민하기 보다는 그냥 내 생각, 내 스토리를 진솔하게 들려주자. 그러면 그 중에서 본인들에게 와닿는 부분들을 알아서 takeaway로 가져가겠지! 이렇게 생각하니 마음이 편해졌다.
내가 전하고팠던 메시지는 아래였다.
우리는 시뮬레이션일지도 모르는 이 세상에, 각자의 고유한 스탯을 가지고 태어났다. 기술의 발달로 내가 헤엄칠 물을 더욱 쉽게 고를 수 있게 됐으니, 다양한 경험을 통해 내 스탯을 잘 파악해서, 내가 헤엄치기에 좋은 물을 능동적으로 스스로 선택하며 행복하게 살자.
발표는 무사히 잘 마쳤다. 그런데 2시간 동안 열심히 쏟아내서 그런지, 이후에 몸살이 크게 와서 일주일을 앓았다. 내 발표 시간은 괜찮았는데, 발표 뒤 질문과 답변 시간에 15명에게서 쏟아지는 질문을 감당하는데에 상당히 많은 에너지가 필요했다. 전체 세션을 참석자들과의 질문과 답변으로만 구성하는 법륜스님이 새삼 대단하게 느껴졌다.
그리고 며칠 전, 내가 나온 대학교의 여학생 후배들에게 멘토링을 제공해주는 곳에서 해외에서 활동 중인 졸업생 인터뷰 시리즈를 잡지에 연재하고 있어, 인터뷰 문의를 받아 아래 내용을 작성해봤다.
싱가포르를 베이스로 활동하며, 기후 정책과 신재생에너지 확산이라는 두 가지 큰 축을 기준으로 일하고 있으며, 조직 문화에도 관심이 많습니다.
기후 정책 연구단체에서 복잡하고 어려워보이는 기후 문제를 논리적이고 설득력 있는 정책 언어로 바꾸는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제가 들어갔을 땐 80명이었던 조직이, 2년 사이 150명을 바라보고 있어 급성장하는 과정을 함께하면서 많은 점들을 배우고 있습니다.
해상풍력 인프라 건설과 유지에 필요한 선박을 공급하는 대만 기업의 한국 시장 진출을 위한 사업 개발 자문을 맡고 있습니다.
여가시간에는 운동, 다이빙, 독서, 요리를 하며 에너지를 얻고 글쓰기를 좋아합니다.
학교를 다닐때까지만 해도 영어를 사용하는 국가에서 살아본 경험이 없었어서, 상당히 많은 시간을 영어공부에 투자했어야 했어요. 이렇게 많은 시간을 영어 공부에 쓰는데, 실제로 그 언어를 쓸 기회는 별로 없고, 단지 시험 점수를 받기 위해서만 공부를 하고 있다는게 늘 아쉽게 느껴졌습니다.
그러다 코트라에서 모집하는 해외 인턴 기회를 발견했고, 대상 국가 중 하나였던 말레이시아가 영어를 공용어로 쓰는 곳이란 것을 알았고, 단순히 영어를 쓸 기회를 가져보고 싶다는 마음으로 지원해 합격한 해외 인턴쉽을 통해 첫 해외 근무를 경험했습니다.
국가 별로 어느정도 차이점이 있겠지만, 제가 느낀 차이점은 덜 경직적인 근무 환경과, 미팅 시에 직급을 떠나 자유롭게 발언할 수 있다는 점이 가장 인상적이었습니다. 한국에서 비즈니스 미팅 시에는 일반적으로 미팅에 참석한 사람들 중 가장 직급이 높은 사람이 주로 발언을 하고, 직급이 낮은 사람들은 주로 미팅 노트만 작성하는 경우가 많은데요. 해외에서는 미팅을 시작할 때 참석한 사람들 중 처음 만나는 사람들이 있는 경우에는 돌아가면서 자기 소개를 하고, 미팅의 흐름을 크게 방해하지 않는 선에서 모두 자유롭게 발언을 하는 편입니다. 직급보다는 개인이 가진 아이디어나 생각이 더 존중받는 수평적인 분위기이죠.
한국 사람 입장에서 느끼기에는 쓸데없는 말을 많이 한다고 느낄 수도 있습니다. 미팅의 본 건에 대해서만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니라, 날씨는 어떤지, 지난 주말은 어떻게 보냈는지, 휴가 계획은 어떤지 등 - 이런 사소한 이야기를 하면서 유대감을 쌓는 것을 필수라고 생각하는 문화권 (남미, 영국, 미국, 캐나다 등)도 있습니다. 반면, 네덜란드나 독일쪽은 본론부터 바로 말하는 것을 선호하는 경우도 있고요. 제가 거주하고 있는 싱가포르에서 제가 가장 좋아하는 부분은 바로 이런 다양성을 포용한다는 것입니다. 한국처럼 인종과 문화적 배경이 하나인 단일 문화권 국가에서는 '이런 방식으로 해야해' 라는 정석의 방법이 존재하기 때문에, 조금 다른 형태로 비즈니스를 하는 사람들이 눈에 띌 수 밖에 없는데요. 반면 싱가포르처럼 다양한 인종과 다양한 문화권의 사람들이 모여서 살고 있는 곳에서는 다양한 방식의 일하는 형태가 존재한다는 인식을 바탕에 깔고 있습니다. 사람들의 다양성을 존중해주는 분위기죠. 그래서 커리어를 시작하는 사회 초년생의 경우에도 자기만의 색깔을 찾아가기가 더 너그럽고 쉬운 분위기라고 생각해요.
한국보다 이직, 헤드헌팅 문화가 더 활발하다는 것도 큰 차이점입니다. 아무리 성과가 뛰어나다고 해도 한 직장에 머물면서 급여 인상을 30%~50%씩 받는 것은 쉽지 않은데요. 보통 다른 회사로 이직을 하면서 급여를 올리는 경우가 많아, 2-3년 정도에 한 번 씩 직장을 옮기는 분들도 흔하고, 이를 더 활발하게 해주는 헤드헌터, 리쿠르터들도 많습니다.
가족들과 떨어져 타지에 나와있어서 그런지, 여기서 만난 친구들과는 서로 좀 더 쉽게 마음을 열었던 것 같습니다. 이제는 제 집이 된 싱가포르에서 만난 남편과 친구들이 해외 근무를 통해 얻은 가장 소중한 자산입니다.
개인적인 측면에서의 보람은 제가 좀 더 나다운 사람이 됐다는 점입니다. 싱가포르는 저에게 '나라는 사람의 정의'를 더 넓게 가져갈 수 있는 환경을 제공해줬고, 그런 환경 속에서 다양한 경험을 하면서 어떤게 나에게 맞는 옷인지를 알아갈 수 있었어요. 그리고 이렇게 변한 내 모습이 상당히 만족스럽고 편안합니다. 한국에서의 저는 사회가 정한 기준에 나를 맞추려 애썼다면, 이곳에서는 다양한 가치관을 가진 사람들을 거울삼아 제가 진짜 중요하게 생각하는 가치가 무엇인지 더 깊게 들여다볼 수 있었습니다.
해외에서 근무를 오래 하게 되면서, 가족들과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의식적으로 신경써야한다는걸 깨달았어요. 제가 해외에 있는 동안 부모님 건강에 문제가 생겼을 때 곁에 없었던 적도 있었고, 가족들에게 힘든 일이 있었단 걸 나중에야 알았던 적이 있거든요. 제가 해외에 있으니, 걱정시키지 않기 위해서 일부러 공유하지 않았던 건데, 그게 큰 충격으로 다가왔어요. 그때를 기점으로 우선순위에 변화가 생겼어요.
그 이후로는 시간을 정해놓고 가족들과 통화하고, 대화할 주제를 정하기도 해요. 책을 선정해서 같이 읽고 감상을 공유하는 독서 모임을 하기도 하고, 영상 하나를 공유해서 그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기도 하고요. 직장에선 팀 관리, 코칭을 위해서 1-2주에 한 번씩 1대1 미팅을 하는데, 생각해보니 이런 장치를 가족들과의 관계에도 사용하지 않을 이유가 없겠더라구요. 관계야말로 시간적 여유가 생겼다고 해서 갑자기 쌓을 수 있는 게 아니라, 평소 꾸준히 쌓아나가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링크드인 활용을 추천합니다. 단순히 프로필을 채우는 데 그치지 말고, 내가 가고자 하는 길을 먼저 간 사람들에게 '커피챗'을 제안해 보세요.
개인화된 메시지: "조언 좀 해주세요"라는 막연한 요청 대신, 상대의 이력에서 내가 감명 깊게 본 지점과 내가 기여할 수 있는 가치를 명확히 전달해야 합니다.
실무 경험 우선: 학위나 교육 과정도 좋지만, 무급이라도 좋으니 실질적인 프로젝트나 인턴십에 뛰어드세요. 실무에서 겪는 갈등과 해결 과정이 백 마디 말보다 강력한 포트폴리오가 됩니다.
나만의 고유함을 찾는데에 관심을 기울이라고 말하고 싶어요. 기술이 발전할수록 정보나 지식은 평준화되겠지만, 그 기술을 무엇을 위해서 사용할지는 결국 개인의 성향과 가치관에 따라서 정해지니까요. 실용적인 관점에서 보면, 나를 유용한 도구로 만드는 것도 중요하고 도움이 됩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대한민국 학생들은 - 공부해라, 자격증 따라, 제2외국어 공부해라 - 와 같은 이야기들은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을 것 같아요.
이제 30대 중반이 된 제가 깨달은 것은, 실용적인 지식들보다 나는 어떤 사람인지, 무엇을 하고 싶은지, 그리고 왜 하고 싶은지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들을 하는 것이 무척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이해를 바탕으로, 나에게 잘 맞는 직업과 환경을 선택하는 것이 행복한 삶을 사는 방법 중 하나입니다.
우리는 누구나 태어났기에 살아갑니다. 하지만 이 소중한 시간을 어떤 환경에서, 어떤 사람들과 교류하며 보낼지는 우리의 선택에 달려 있습니다. 어떤 물에서 헤엄치며 지낼지 내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이죠. 특히 해운이라는 분야는 비즈니스 자체가 글로벌 스탠다드를 따르기에, 다른 전공에 비해 해외 진출의 기회가 압도적으로 넓습니다. 이러한 산업적 이점을 전략적으로 활용해, 본인의 성향과 가장 잘 맞는 환경을 찾아 떠나보시길 권합니다.
결국 해외에서 일한다는 것은 단순히 직장을 옮기는 게 아니라, 내가 알고 있던 세계의 경계를 넓히고 내가 헤엄칠 물을 스스로 결정하는 주체적인 행위입니다. 낯선 환경에서 다양한 변수를 통제하고 적응해 나가면서, 나와 비슷한 가치관을 가진 물고기들을 만나며 우정과 사랑을 쌓는 그 자체가 여러분의 고유한 색깔을 더욱 뚜렷하게 만들어줄 것입니다.
이 글을 정리하다보니, 최근 독서모임에서 소감을 나눴던 헤르만 헤세의 책 '싯다르타'의 한 구절이 생각났다.
대부분의 인간들은 바람에 날려 빙글 돌다가 방향을 잃고 땅바닥에 굴러떨어지는 낙엽과 같은 존재요. 하지만 드물게도 별처럼 확고한 자기의 궤도를 가는 사람이 있소. 그들은 바람에 조금도 흔들리지 않고, 자기 내부에 그들 나름대로의 법칙과 궤도를 가지고 있소.
다들 이번 인생에서는 자기가 메인 캐릭터인 자기 삶을 사는 것이고, 그들의 관점에서 나는 NPC나 다를바 없다. 그리고 그들의 게임과 내 게임은 다르다. 우리의 관점이 다르니까.
세상은 하루가 다르게 빨리 변한다. 이럴 때 일수록 내 안의 변하지 않는 가치관들을 파악해 확고한 나의 궤도를 알아차리고, 이를 따르면서 유영하듯이 살자. 나에게 잘 맞기만 하면 그만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