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정의 기원 - 칼 다이서로스, 올해 최고의 책

뇌과학의 차가운 이성과 뜨거운 인류애가 교차하는 지점에 있는 책

by 파일럿


뇌과학의 차가운 이성과 뜨거운 인류애가 교차하는 지점에 있는 책, 감정의 기원. 작가는 매년 노벨 생리의학상의 유력한 후보로 거론되는 신경과학 분야의 세계적인 과학자이자, 정신의학과 교수이면서 실제 환자들도 보고 있는 의사, 칼 다이서로스 박사이다. 정신과 의사로서 만난 환자들에 대한 이야기를 통해 인간 감정의 기원에 대한 통찰을 담았다. 때로는 과학/이성이라는 렌즈로, 인간의 가장 연약한 부분을 차갑게 서술하기도 하지만, 뜨거운 인류애를 가진 작가의 마음이 느껴져 너무나 매력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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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시에 이 책은 상당히 문학적이기도 하다. 과학자/의사이지만 문학에 상당한 관심과 소양을 가진 작가는 공감각적인 표현을 많이 사용한다. 생전 처음 들어보는 너무나 생소한 뇌의 특정 부분을 가리키는 과학 용어들이 등장하기도 하지만, 이 책은 상당히 문학적이며, 통찰도, 감상도, 이를 나타내는 표현들 모두 밀도가 높다. 그래서 지난 한 달 동안 온전히 집중할 수 있는 시간에만 아껴가며 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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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이전에 과학자인 칼 다이서로스는 광유전학(Optogenetics)이라는, 빛으로 몸의 세포들을 제어하는 기술을 창시해 세계적인 명성을 얻었다. 광유전학의 발달 이전에는, 뇌 신경 세포들 사이의 상관관계를 연구할 때엔 전기신호를 가해 반응을 살펴볼 수 밖에 없었다. 이 방식의 한계는 신경세포들이 모두 긴밀하게 연결되어있기 때문에 실험하고 싶은 세포에만 자극을 주는 것이 불가능하다. 하지만 칼 교수의 광유전학은 실험 대상인 세포만을 빛에 민감하게 만드는 기술을 사용해 독립적인 연구가 가능하게 만들었다.


그의 연구는 세계 적으로 만 회 이상 인용되며, 뇌/신경 과학과 생명 시스템 연구에 혁명적인 변화를 가져왔다. 이 공로로 여러 국제적인 상을 수상하며 부까지 거머쥐게 되어, 과학자들 사이에서 그는 열정을 가지고 내 길을 가면 나머지는 다 따라온다 - 의 살아있는 예가 됐다.



이 책은 미국에서는 2023년에 발간됐지만 한국어 번역본은 올해 1월에 나왔다. 그래서인지 아직까지 한국에선 책이 잘 알려지진 않은 것 같다. 단연코 올해 나의 최고의 책이다. 일요일 오전, 방금 책을 다 읽었고, 감상이 가장 강할 때 밑줄 친 부분들을 다시 한번 음미하고자 블로그에 옮겨본다.




가장 마음에 드는 구절



인간의 자아 인식은 우선순위나 기억 어느 하나로부터만 생기는 게 아니고 둘이 함께 우리가 세상에서 나아가는 길을 정의한다는 생각이었다. 살짝 과장하면 길이 곧 자아라고 볼 수도 있었다. 다만 이 길은 단순히 공간만 지나는 게 아니고 보다 고차원적 영역을 통과한다. 삼차원 공간과 일차원 시간 그리고 가치라는 마지막 차원-보상의 골짜기와 고통의 능선이 이어지는 세상의 값어치 또는 비용이라는 고차원-을 아우르는 길이다.


우리는 타인이 설치한 장애물과 통로, 자연현상 혹은 몸뚱이의 욕구에 규정되지 않는다. 이런 자잘한 것들은 내가 아니다. 타인과 태풍과 욕구는 수시로 나를 스쳐 지나가고 그럴 때마다 내 주변의 언덕과 골짜기 지형이 변하지만 나의 자아는 가던 경로를 계속 걸어 가기로 결정한다. 길을 선택하는 것은 우선순위다. 이때 복잡한 이 세상을 여행하는 동안 내 앞에 펼쳐지는 풍경의 윤곽은 나의 자아가 아니다. 나의 자아는 내가 선택해 걷고 있는 이 길이다. 그리고 기억은 이 길을 따라 이정표를 찍는다. 그렇게 내가 지나온 길목마다 내 자아의 형체가 점점 또렷해진다.


이런 식으로 생각하니 자아를 길이라는 하나의 요소로 합쳐진 기억과 원칙의 융합체로 볼 수 있었다.




책 중에서


씨실과 날실로 이루어진 세상


이 자리를 빌려 환자들께 깊은 존경과 감사를 표하고 싶다. 그들 덕에 이런 통찰에 눈을 뜰 수 있었다. 세상에 알려졌든 알려지지 않았든 그들 내면의 고통은 우리 모두가 비슷하게 걸어가는 생의 여정이라는 길고 어둡고 간절하고 불확실하지만 때때로 애틋한 태피스트리에 깊이 새겨져 있다.




감정처럼 신비로운 무언가를 세포 수준에서 이해하는 게 가능할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건강하거나 아픈 사람에게 무엇이 상황에 맞는 혹은 맞지 않는 강력한 감정을 일으킬까? 더 직설적으로 묻자면, 세포 그리고 세포의 연결 수준으로 내려간 물리적 의미에서 감정이란 도대체 뭘까? 나는 이게 우주의 기원과 그 존재 이유에 견줄 만한 우주 최대의 미스터리일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 인간은 희망이 없어 보이는 도전 앞에서도 설명을 찾으려 기를 쓴다.




뇌 심부에서 뻗어 나오는 축삭돌기들은 뇌의 상태를 정의하고 감정 표현을 조율한다. 그렇게 속속들이 드러난 물리 구조 수준에서 우리 내면의 상태를 근원적으로 이해함으로써, 우리는 지나온 인간 진화사를 명료하게 바라보게 된다. 이와 같은 통찰은 이런 물리 구조들이 생명 발생 초기와 영아기에 유전자의 작동으로 인해 형성된다는 사실에서 비롯되었다. 그리고 유전자는 오랜 진화 과정을 거쳐 인간의 뇌를 지금과 같은 모습으로 빚어냈다. 그러므로 어떤 의미에서 우리의 마음속 실은 우리 안의 모든 공간 뿐만 아니라 우리가 살아온 모든 시간대를 투영한다고 할 수 있다. 생존이 지상 최대 과제였던 선사시대의 우리 조상에게로 그 뿌리가 거슬로 올라가는 인류의 유산인 셈이다.




인간에 관한 거의 모든 것을 진정으로 이해하려면 직접 사람들과 부딪치지 않으면 안 된다.




광유전학 이야기는 정치 논리가 지배하는 이 사회에 순수과학의 가치를 일깨운다는 것이다. 현대의 우리가 광유전학을 발명하고 감정과 정신질환을 더 깊이 이해하게 된 것은 100년도 더 전에 해조류나 박테리아를 가지고 수행한 역사적 연구들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일이다. 그 길이 이런 성과로 이어지리라고 처음부터 예견할 수는 없겠지만 말이다. 광유전학 이야기는 과학의 실천이 실용성만 중시하거나 연구자의 시선이 질병 상태에만 집중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강조한다. 이것은 지금껏 여러 과학 분과의 진보 과정에서 거듭 증명됐고 앞으로도 그럴 진리다. 우리가 연구를 특정 방향으로 유인할수록(가령 유망한 치료법 후보를 겨냥한 대형 프로젝트에 공공 연구 기금을 몰아주는 게 그런 예이다) 과학의 발전은 외려 지체될 공산이 크다. 그렇게 되면 미지의 영역이 계속 그림자에 가려져 과학과 인간에 대한 이해와 인류 건강이 나아갈 길을 본질적으로 바꿀 아이드어들이 영원히 드러나지 않을 것이다. 의학과 과학 그리고 우리 모두가 세상을 헤쳐가는 우리의 궤적을 발견하고 따라갈 때 예상치 못한 방향에서 튀어나오는 새 아이디어와 거기서 받는 충격은 중요할 뿐만 아니라 꼭 필요한 요소다.




마테오의 이야기는 추상화하지 않고는 떠올리기가 힘들었다. 마음속에서 간이침대처럼 납작하게 펼친 다음 다른 환자들의 이야기 사이에 끼워넣는 것이다. 그래야 그가 전복된 차 안에서 얼마나 오래 안전벨트에 매달려 있었는지, 옆에서 가족이 죽어가는 모습을 보며 얼마나 큰 무력감을 느꼈는지 생각하지 않을 수 있었다. 그래서 나는 모든 게 찰나의 일이었다고 되뇌었고 지금도 여전히 그렇게 한다.


아니면 마테오 자신이 그랬던 것처럼 마음속 공간의 차원을 줄여 인간적인 면들을 납작한 평면으로 축소하는 방법도 있었다. 그런 다음 마테오의 이야기를 내가 보고 들은 비슷한 이야기들과 한데 묶으면 각각의 개성이 사라지고 한 덩어리로 변했다. 쏟아지는 눈물에 흠뻑 젖어 죄다 들러붙은 지 오래된 신문 더미처럼. 이렇게 하면 열 명의 고통이든 만 명의 고통이든 하나의 대상으로 압축되니 마주하기가 수월했다. "제가 왜 울지 못하는지 모르겠어요." 이 한마디로 시작해 마테오가 들려준 모든 얘기를 나는 이야기 다발에 합쳤다. 그러고 나면 사람 사는 세상의 흔하디흔한 결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의과대학에는 의사의 마음을 보호하는 정해진 지침 같은 게 없다. 절망적인 상황에 무방비로 노출되는 의사와 간호사, 군인, 심리치료사는 모두 감정 관리 방법을 스스로 터득한다. 극한의 고난이 넘쳐나는 최전방에서 일하면서 자신이 살기 위해서다.



고통이 너무 지독할 때는 공감 능력은 좀 아껴두고 시야를 좁혀 환자의 인생이라는 직물에서 한 지점에만 주목하는 게 낫다. 마음의 날실과 씨실이 교차하며 창조된 경험의 특별한 형태와 색깔 하나에 집중하는 것이다.



인간 존재의 표상에 내게 소중한 이의 직조된 이미지가 겹쳐 보이고, 그렇게 느끼는 순간 내 안의 일부가 점령당하는 것이다. 자아 안의 감춰진 공간인 이곳은 원래 불을 밝혀두고 태피스트리를 안전하게 걸어 보관하는 은밀한 내실 같은 곳이다.




앤디가 씨를 뿌리고 분노가 거름을 주어 무럭무럭 자란 이 생각은 다른 이들은 이런 식으로 살아남을 수 있겠지만 난 아니라는 것이었다. 평생 이런 식이라면 의료게에서 오래 버티지 못할 것 같았다. 나는 생각했다. 평화로운 연구실로 가자. 내 장기인 순수과학으로 후퇴하자. 아이들이 죽지 않는 곳으로.




광유전학에서는 유기체 설계의 일부분을 다른 생명체 안에서 재현시켜 그 안에 자리 잡고 숙주와 하나로 통합되게 한다. 이식된 새 부분, 즉 유전자는 행동규범을 제공함으로써 숙주의 행동에 영향을 미친다. 어떤 통찰이나 색다른 경험이 그러는 것처럼.




경계를 넘는 이동은 지구상 모든 생명의 이야기이며 곳곳에서 일어난다. 특히 양측 사이의 거리가 멀고 장벽이 높을수록 양측 모두에게 기회가 크다.



인간을 비롯한 지구상의 모든 동식물은 다른 세계에서 넘어온 이 여행자들에게 목숨을 밎지고 있다. 고세균이라 불리는 이 원시 미생물종은 산소를 이용해 에너지를 생산하는 신비한 기술을 함께 가져와 20억 년 넘게 거슬러 올라가는 머나먼 우리 선조 세포에 심었다.




그는 건축가였고 체스를 몹시 좋아했다. 결국 그는 자신을 체스판 위에 홀로 남겨두었다. 그는 수가 막혀 갈 곳을 잃은 외로운 왕이었다.




어쩌면 세 번째 회로의 존재 이유는 우리의 삶이 직접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판이한 카테고리들 사이에서 선택을 요구하기 때문인지 모른다. 좋거나 나쁘다고 느끼는 주관적인 기분은 아마도 뇌 내부 경제를 위한 일종의 공통 지불 수단일 것이다. 음식과 잠에서부터 섹스와 인생 자체까지 다양한 목표를 추구하는 과정에서 느끼는 긍정성과 부정성을 하나의 화폐로 환산해주는 것이다. 이 환산 시스템은 카테고리를 넘나들어 어려운 결정을 내리고 선택을 행동으로 옮기게 한다. 그것도 개체와 종족의 생존 욕구에 가장 적합하고 신속한 방식으로. 만약 이런 시스템이 없다면 시시각각 변하는 어지러운 세상에서 엉뚱한 결정을 내리게 된다. 움직여야 할 때 멈추고 가만히 있어야 할 때 움직이는 것이다.


이와 같은 환산율이 행동의 진화를 일으키는 원동력이 아닐까 싶다. 뇌가 다양한 감정에 (주관성이라는 공통 통화 단위로) 할당한 상대적 가치가 어느 한 생물체 혹은 인간이 내리는 최종적인-그야말로 실존적인- 판단을 필연적으로 결정한다는 점에서다. 그러나 이런 환전 매커니즘은 유연하기도 하다. 개체의 일평생과 진화가 일어나는 동안 가치가 달라지면 환산율도 따라서 변해야 하기 때문이다.




오직 인간만이 눈물의 미스터리를 이용해 울 줄 알고 보는 사람 없이도 홀로 눈물짓는다. 인간은 자신의 속마음을 이처럼 요상한 외적 신호를 통해 드러내 보인다. 보는 사람이 있든 없든, 특별한 의지나 목적 없어도 눈물을 흘려 그저 내 감정을 불특정 다수와 나 자신에게 알리는 것이다. 울음은 마치 대체로 정직한 저널리스트처럼 특정 종류의 감정을 모종의 이유로 세상에 보도한다.




희망이 산산이 부서져서 세계관이 흔들리고 인생의 모든 갈림길이 표시된 지도(지도는 희망이다)를 처음부터 다시 그려야 하는 상황에 배신감이 들 정도의 충격을 받아야만 진심으로 슬픔에 겨워 울게 된다. 그러나 설령 그 이유가 부정적 감정일지라도 우리가 흘리는 눈물에는 희망이 존재할지 모른다. 형편이 달라지긴 했어도 희망은 희망인 것이다. 이때 우리는 미래를 향한 가냘픈 희망을 저도 모르게 진심에서 드러내 선전한다. 우리의 세계관이 변하고 있다는 사실을, 이것이 지금 이 순간 실현되는 일임을 우리는 동족과 공동체에게 그리고 가족과 자신에게 귀띔한다. 정말로 진화는 희망을 소중히 여길까?



희망은 집중력과 감정이라는 예산에서 자원을 끌어다 쓴다. 그러나 희망이 전혀 보이지 않을 땐 버티고 맞서 싸우는 데에 들 에너지를 아끼고 눈물셈을 잠가 두는 게 상책이다.



우리는 모두 스스로 씌운 굴레 안에서 살아가고 행동하는 존재인 것이다.



집을 지을 때는 단단한 지반이 필요하고 사회를 세울 때는 단단한 진실이 필요한 것이다.



평생 우직하게 쓰임과 선함을 지향하던 그의 여정은 불타는 쌍둥이 빌딩에서 막을 내렸다.



이 구절에서 아빠가 생각났다.




우리는 인간의 상상이 본디 주관적인 것이고 개개인의 관점은 편협하기 짝이 없다는 사실을 잊으면 안 된다. 망가진 것과 온전한 것을 구분하는 경계는 언제든 바뀔 수 있고 모호하며 우리가 가까이 다가갈수록 오히려 더 흐릿해진다.




중요한 것은 지구 반대편에서 나고 자란 아이누르와 내게 공통된 감정이 있다는 사실이고, 오래전 인류 조상들이 이 감정을 어떻게 인지했는지도 중요했다. 내게는 이 연결성을 깨닫는 것이 영겁의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는 우리 선조들에게는 은총이자 현대인에게는 위안이라고 느껴졌다. 인류라는 가족의 대화 속 등장인물 하나하나를 존중한다는 점에서 그랬고 감정을 바깥세상에서 머릿속에 주입된 주관적 정보가 아니라 서로가 연결되어 있다는 증거로 여긴다는 점에서 그랬다.



그의 이런 따뜻한 시선이 좋다.





내향인의 뇌와 외향인의 뇌


무의식의 예측 모델이 계속 돌아가게 할 때 두뇌의 연산 작업에 들어가는 에너지는 어마어마하다. 내향인이나 복잡한 인간관계에 지친 모든 이의 경우는 이 소모성 자원이 신경회로 수준에서 급격히 고갈된다. 반대로 이 두뇌 활동을 위한 자원이 유달리 풍부한 사람은 진정한 외향인이어서 쉼 없이 사람들과 어울려야만 살아갈 수 있다.



정말 흥미로웠다! 내향인과 외향인이 신경회로 수준에서 에너지 효율이 달라 생긴 성향의 차이라니.





흥분성 세포의 활동성 증가가 건강한 성년기 포유동물에게서 사회성 결핍을 유발할 수 있다는게 증명됐고, 억제성 세포의 활동성을 동시에 높임으로써 균형을 되도려 이 효과를 약화시킬 수 있었다.



이것도 정말 흥미로웠다. 흥분성 세포가 활성화되면 불안하니 사교성이 줄어들고, 억제성 세포가 활성화되면 chill 해지니까 사교성이 올라가는구나.





모두가 내 능력치보다 높은 수준의 사회적 통찰력을 끈질기게 요구할 때 꿋꿋이 자기 소신대로 살아가는 게 얼마나 어려운지 알 것 같았다. 그래서 이 반감은 소소하게 스트레스를 주는 인간관계가 반복되면서 평생에 걸쳐 학습되고 오해가 깊어지는 식으로 사회적으로 조건화된 감정일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만약 이 반감이 학습되는 게 아니라면? 혹시 한 사람의 적재 용량을 초과하는 정보 과잉 자체가 혐오스러운 것은 아닐까? 사교적인 사람부터 단순히 내성적인 사람, 나아가 자폐스펙트럼 환자까지 사람이라면 누구나 지나치게 길어지는 사회적 상호작용에 싫증을 낸다. 사회성 신경회로가 일정 수준 이상으로 고갈되는 까닭이다.




환자인 퇴역군인과 엔포드인 나. 우리는 각자의 방식으로 또 다른 전투를 벌이는 중이라는 것을 나는 차차 깨달았다. 그들은 과거의 상처에서 느꼈던 감정을 현재로 끌어오지 않으려고, 나는 한쪽의 추측과 비난을 다른 관점으로 확대하지 않으려고 고군분투하고 있었다.




우리 주변에서도 사회성이 유난히 좋은 유형의 사람은 이 기능을 상시 가동한다. 적재 용량이 보통이 아니어서 노력이나 연습이 따로 필요하지 않는 데다 산사태처럼 미려 들어오는 사회적 데이터를 시간차 하나 없이 적확하게 꿰뚫어 보고 순간의 의미를 명료하게 짚어내는 사람들이다. 그러나 우리 모두는 온전한 전체가 각 부분에 투영되어 담긴다. 정보 적재 용량이 아무리 적은 사람도 연결될 것은 다 연결된다. 시간이 좀 걸릴 뿐이다.




석 달 전 그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마법처럼 사랑에 빠지는 느낌을 경험했다. 의자 비닐 커버가 다 찢어진 교회 버스 안에서 안감이 털로 된 쇼트코트 차림의 셀리가 뒤돌아 그에게 입을 맞췄을 때였다. 순간 햇살이 나무 그늘과 안개를 뚫고 자신에게 쏟아지는 것 같았다. 해안가 삼나무 숲에 드리운 초봄의 쌀살한 공기에 익숙했던 헨리는 유리창을 뚫고 피부에 와닿은 급작스러운 온기에 화들짝 놀라 어쩔 줄 몰랐다. 셀리의 체온과 그녀의 붉은 입술 때문에 달아오른 열기가 그녀와 태양을 헨리 안으로 끌고 들어왔다. 셀리는 그를 온 세상과 연결시켰고 그녀 역시 헨리 안의 모든 것과 이어졌다.




경게성격장애 환자들은 거의 감정 유도의 전문가다. 그들은 압도적인 부정적 혹은 긍정적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실력이 탁월하고, 자신뿐만 아니라 주변 사람들의 마음까지 움직인다.




자해는 현실과 비현실의 경게를 숨차게 넘나들면서 보살핌받는 느낌과 인간적 유대감을 찾아다니는 행위였다.




모든 감정에는 저마다 물리적 성질이 있다. 사랑에 빠지면 가슴이 몽글몽글해지는 느낌이 드는 식이다. 영역 침범이 불러오는 분노는 피부라는 물리적 경계에서 느껴진다.




인간이 스스로 제 살을 찢도록 만드는 것은 뭘까? 이미 어려운 질문이지만 한 걸음 더 깊이 들어가 이렇게도 물을 수 있다. 과연 무엇이 어떤 존재로 하여금 무언가를 실행하게 하는 것일까? 아마 반사, 본능, 습관, 불편함이나 고통의 회피 혹은 소소한 쾌감이나 두근두근하게 만드는 보상 등 상황에 따라 여러 답이 나올 것이다. 아니면 이런 세상을 상상할 수도 있다. 통증에서 그리고 통즈응로부터 벗어나고 싶다는 바람에서 모든 행동이 비롯된다고 가정하는 것이다. 우리는 종종 긍정적 감정을 기대하고 움직이지만 어떤 이에게는 괴로운 마음을 억누르는 것이 모든 행동의 동기일 수도 있다.




가치의 변화는 순간적으로 새로운 통찰을 얻을 때처럼 빠른 경우도 있지만 개인의 성장과 성숙 과정에서는 느리고, 세상과 동물종들이 함께 진화해온 지구의 역사 규모에서는 훨씬 더 느려진다. 이런 가치 변화는 어느 시간 척도에서든 고통과 보상이라는 두 내적 화폐의 교환율을 조정함으로써 인간으로 하여금 환경 변화에 적응하도록 돕는다.




경계성성격장애 환자들의 사례와 현대 신경과학이 밝혀낸 지식을 종합하면, 감정가-긍정적인 혹은 부정적인 경험, 호 혹은 불호, 좋음 혹은 나쁨의 잣대-는 본디 변하도록, 그것도 쉽게 변하도록 만들어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겨냥한 신경회로가 무엇이냐에 따라 실험동물의 공격성과 수동성을 높이거나 줄일 수 있고, 얼마나 사교적인지, 이성을 밝히는지, 먹을 것과 마실 것에 얼마나 집착하는지, 잠이 얼마나 많은지, 얼마나 활동적인지에도 변화를 줄 수 있다. 비결은 광유전학 기술로 신경활성을 만드는 것인데, 쉽게 말해 특정 세포나 신경회로 안에서 전기가 몇 번 찌르르 흐르게 하면 된다.



상당히 위안이 되고, 사람들에게 더 너그러워지며 연민의 마음을 갖게 한다.





장기적으로는 대체로 나이가 들면서 순해지는 경계적 증상들의 특징 때문에 그의 상태가 모호해질 가능성이 있었다. 대신 시간이 길어지면 스스로 생을 끝내는 결말로 이어질 수 있고 그 비율은 15퍼센트나 된다. 인간사의 어떤 우환과 비교해도 높은 자살률이다. 그를 아끼는 사람들이 그를 볼 때 들었던 마음을 잘 이용하는 법을 배우길 바랄 뿐이다. 나는 그들이 자아 침해라는 태곳적 감정을 100배로 확대해 그들이 헨리에 대해 갖고 있는 각자의 심상 위로 투영했으면 했다. 때로는 분노의 불꽃이 옮을 때 공감이 더욱 깊어지기 대문이다. 내 경우는 분노의 불길이 꺼진 지 오래였지만 여전히 그를 생각하면 마음이 약해졌고 앞으로도 그러리라는 것을 잘 알았다. 헨리는 내게 투영됐고 종이에 꾹꾹 눌러 쓴 글자처럼 나와 가까워졌다. 한편으로 내가 그에게 괴로움을 덜어주고 싶은 간절함에 너무 비위를 맞추는 사기꾼 같은 모습만 보여준 것 같았다. 게다가 아들을 볼 때마다 자꾸 헨리가 떠올랐다. 그는 내 얘기 위로 자신의 얘기를 덧새겼다. 한번 사용했던 양피지를 긁어내고 얇게 편 짐승 살가죽 위로 심판과 계시의 기호를 새로 적는 중세 수도승처럼.



이래서 싸운 뒤에 더 사이가 돈독해지는 걸까. 서로를 상처주며 싸우다가도, 상대가 약한 면모를 보이면 마음이 안쓰러워질 때가 있다.





계절의 변화가 더없이 선명해지자 온갖 징조가 하나로 합쳐지는 것처럼 새로운 생각들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초가을 공기가 그러듯 첫 몇주는 마음의 기압이 살짝 달라지는 정도였다. 마음속에서 한 줄기 바람이 자기 존재를 드러내자 우거진 신경망 꼭대기의 잎사귀들이 일렁이며 바스락 소리를 냈다.




변화는 피부로도 느껴졌다. 쌀쌀한 초가을 기운에 살갗이 따끔따끔했다. 오래된 기억 하나를 떠올리게 하는 감각이었다.




망상을 비롯한 어떤 종류의 지식은 굳었다고 표현될 정도의 신용을 얻어 '진실'이라는 그릇에 담겨 보호된다. 그래서 회피되지도 평가 절하되지도 않는 특별 대우를 받는다. 이 진실이라는 카테고리 덕분에 우리 뇌는 통계 연산에 시간 낭비할 필요 없이 신속한 결단을 내리고 의심의 여지 없는 사실들 위에 복잡한 논리체계를 세울 수 있다.




생각이란 본래 스스로 떠오르는 것이다. 모든 사람은 그저 생각이 들기 때문에 생각을 한다.



명상을 통해 깨닫게 되는 것이다. 내 생각은 내가 제어할 수 없다.





현실은 진짜가 아니라 다수의 믿음이다. 인류가 공통으로 알고 있는 현실은 진짜가 아니며 그저 절대다수가 공유하는 믿음일 뿐이라는 진실이다.




사람의 마음은 수천 가닥의 실이 전후좌우로 교차하면서 사선 무늬를 그려가며 그 사람만의 개성을 입히는 창작물이었다. 복잡한 신경회로 배선을 짜서 정신의 모든 것을 통제하고, 마음의 모든 측면을 지시하고, 비현실적이고 기이한 아이디어에 대한 관용 성향 같은 특질을 설정하는 머릿속 베틀에는 세포에 전류를 흐르게 하는 단백질을 합성시키는 유전자가 있고 시냅스에서 세포 간 정보 흐름을 조절하는 분자를 합성시키는 유전자가 있다. 또 각종 전기적 혹은 화학적 단백질의 생산을 지시해 신경세포 내 DNA 구조의 길잡이가 되는 유전자가 있다. 그리고 뇌 안에서 구역과 구역을 연결하는 긴 실 가닥인 신경 축삭돌기가 뻗어나갈 때 이정표 역할을 하는 유전자도 있다.




경계를 대강 추측할 수는 있다. 가령 자아는 피부를 뚫고 나가 확장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 구분도 사실 보이는 것만큼 명료하지는 않다. 부모가 되면 이 경계선이 특히 흐려진다. 게다가 자아는 피부 아래 공간은 물론이요, 뇌 하나도 가득 채우지 못한다. 자아는 육체의 요구를 감지하지만 그런 요구들은 타자임에도 내 안에 존재하는 모 종의 주체에 의해 전달된다. 이때 심각하고 진지한 신경계가 계산기를 두드려 분배하는 괴로움과 즐거움-욕구가 채워지지 않을 때 느끼는 고통과 욕구가 충족됐을 때 찾아오는 기쁨-은 자아를 행동하도록 유도하는 화폐에 불과하다. 자아 자체가 결코 아니고 자산과 부채, 상여금 같은 금전적 수단일 뿐이라는 소리다.


철학, 정신의학, 심리학, 법학, 종교는 모두 자아에 대해 독자적인 관점을 갖고 있다. 예외없이 상상에 지나지 않지만 그럼에도 각각의 판타지는 일말의 진실을 드러낸다. 그런 가운데, 새로운 종류의 진실을 밝히고 그것을 널리 알릴 힘을 지닌 신경과학은 여전히 입을 꽉 다문 채 어느 쪽의 편도 들지 않는다. 우리는 신중해야 한다. 아직 정확한 과학 용어조차 존재하지 않을지 모른다. 어쩌면 애초에 자아라는 것 자체가 없을 수도 있다.




인간관계는 자아를 세상으로 확장시킨다. 사랑을 통해서.




인간의 자아 인식은 우선순위나 기억 어느 하나로부터만 생기는 게 아니고 둘이 함께 우리가 세상에서 나아가는 길을 정의한다는 생각이었다. 살짝 과장하면 길이 곧 자아라고 볼 수도 있었다. 다만 이 길은 단순히 공간만 지나는 게 아니고 보다 고차원적 영역을 통과한다. 삼차원 공간과 일차원 시간 그리고 가치라는 마지막 차원-보상의 골짜기와 고통의 능선이 이어지는 세상의 값어치 또는 비용이라는 고차원-을 아우르는 길이다.


우리는 타인이 설치한 장애물과 통로, 자연현상 혹은 몸뚱이의 욕구에 규정되지 않는다. 이런 자잘한 것들은 내가 아니다. 타인과 태풍과 욕구는 수시로 나를 스쳐 지나가고 그럴 때마다 내 주변의 언덕과 골짜기 지형이 변하지만 나의 자아는 가던 경로를 계속 걸어 가기로 결정한다. 길을 선택하는 것은 우선순위다. 이때 복잡한 이 세상을 여행하는 동안 내 앞에 펼쳐지는 풍경의 윤곽은 나의 자아가 아니다. 나의 자아는 내가 선택해 걷고 있는 이 길이다. 그리고 기억은 이 길을 따라 이정표를 찍는다. 그렇게 내가 지나온 길목마다 내 자아의 형체가 점점 또렷해진다.


이런 식으로 생각하니 자아를 길이라는 하나의 요소로 합쳐진 기억과 원칙의 융합체로 볼 수 있었다.




자유의지는 실질적으로 존재하는가라는 주체성의 수수께끼를 풀어낼 방향이 어느 정도 잡힌다. 몇몇 세포의 반짝 하는 전기활성이 개개인의 선택과 행동을 통제한다는 게 이제는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 됐기 때문이다.




우리가 어디서 배운 것이 아닌데도 기쁨이나 보상감을 느낄 때 그것은 오랜 세월에 걸쳐 인류 혈통에 쌓인 경험이 후손인 우리에게까지 이어진 과거의 자취다. 우리 조상들은 살면서 언젠가 그런 기쁨을 느꼈을 테고 이 감정을 알게 된 그들이 이런 우리를 낳은 것이다.




학습된 것이든 타고난 것이든 감정을 특정 뇌 회로의 강도를 변화시키는 물리적 전략을 통해 경험과 연결될 (혹은 분리될) 수 있다. 그럼으로써 감정과 기억이라는 두 개의 별개 개념이 강력하게 융합한다.




치매에 걸리면 영장류 새끼의 생존을 위해 진화가 고안한 안무 동작인 신생아 반사가 다시 나타난다. 모로반사 (몸이 갑자기 아래로 내려가거나 위로 들리면 팔을 쫙 펴는 것. 나무를 타고 살던 원시 동물이 훗날 인류의 조상이 될 그들의 새끼를 살릴 수 있도록 남긴 유물이다)와 먹이찾기반사(뺨을 가볍게 건드리면 그쪽으로 고개를 돌리면서 입을 벌려 엄마 젖을 찾는 것)가 그것이다. 높은 곳에서 추락하고 엄마와 떨어지는 것. 이 두 가지는 인간이 태어나면서부터 아는 본능적인 공포다.


두 반사 모두 생후 몇 달 안에 사라지지만 치매에 걸리거나 뇌손상을 입은 사람은 반사 반응을 다시 보인다. 생의 마지막에 다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원시 반사는 늘 거기 있지만 살아가는 동안 인생의 씨실과 날실이 엮어낸 극기와 인지적 제어라는 고급 기능에 덮여 수십 년을 잠잔다는 것이 더 정확한 설명이다. 그러다 천이 해지고 구멍이 나면 본연의 자아가 다시 목소리를 내는 것이다. 오래전 돌아가신 어머니의 안전한 품을 간절한 손길로 찾으면서.


지난 평생 그토록 중요했고 수많은 행복과 고통을 안긴 온갖 인생사가 마음속 시실이 되어 켜켜이 쌓여 더 이상 어머니를 볼 수 없게 덮어버렸다. 그러나 어머니는 항상 그곳에 있었고 생에 마지막 날 이제 모든 것의 뼈대가 다시 들어난다. 가는 씨실이 떨어져 나가고 다시 한번 어머니가 아기의 온 세상이 된다. 팔을 뻗으면 그녀에게 닿을 것만 같다. 아기를 세상에 존재하게 했고 떨리는 손으로 안아 젖을 물리고 돌보면서 비바람과 땡볕으로부터 지켜준 어머니에게.


마음의 실 한가닥이 한 올 한 올 풀리고 두텁던 신경섬유다발이 갈라지고 부서진다. 그렇게 기억과 의지가 사라진 자리에 남는 것은 인간이 태어날 때부터 가지고 있었던 것뿐이다. 얇은 회색 천에 사인 아기는 다시 추위에 노출된다. 혼란스러운 어둠 속에는 선들선들하는 흔들림만 존재한다. 그러다 마른 가지가 힘없이 꺾이면서 돌연 균형이 깨진다. 아기는 세상으로부터 분리되어 깜깜한 밤으로 떨어진다. 뭐라도 붙들려고 필사적으로 두 팔을 휘저으면서. 나뭇가지가 부러지면 그대로 끝이다. 어머니에게 매달려 나무에 살던 아기가 끝 모를 공간으로 추락한다.




내가 만난 환자들의 사연을 관통하는 모든 감정과 생각이 지금의 나를 만들었다. 이 감정들은 처음 경험한 순간보다 오늘 내 안에서 훨씬 풍성하고 촘촘하게 서로를 엮고 있다.




신경회로들의 작용이 도덕성 이탈을 막고자 인간이 만든 알량한 사회 구조를 압도할 만큼 강력하다는 얘기다. 이때 우리는 뭘 할 수 있을까? 거기에 어떤 희망이 있을까? 정말 뇌시포 몇 개에 전류를 잠깐 흘리는 것만으로 끔찍한 폭력성이 즉각적으로 발동한다면 인간은 진정 어떤 존재일까?




우리는 왜 여기에 있는가라고 자문할 때 우리 머릿속에는 우리는 왜 깨어 인식하는가라는 고민이 함께 떠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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