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살 4월 첫째 주

그냥 살고 있어요

by RachelJane



[출근길 버스안에서 모닝페이지 1]


꽃이 피었다. 버스 창문 밖으로 샛노란 개나리가 만개했다. 움츠렸다 고개를 드는 장면을 전혀 보지 못했는데 언제 저렇게 만개해 있는거지.

내가 본 시간이 다 라고 생각하는 오만. 내가 보지 않는 시간에도 모든 것들은 저만의 시간으로 흘러간다. 어떤 것들은 흘러가고, 어떤 것들은 다시 태어나면서 생은 돌고 돈다. 윤회가 이런건가. 별 생각들이 다 연결된다.


버스가 잠깐 멈췄는데 밖으로 쓰레기봉투 근처를 쪼아대는 비둘기가 보였다. 비둘기는 쓰레기봉투에 구멍을 내서 그 안에서 견과류 비슷하게 생긴것들을 쪼고 있다. 한번 먹고 두번 주위를 둘러보는 패턴이다. 목이 아래로 순식간에 빠졌다가 다시 위로 올라와 오른쪽 한번 왼쪽 한번 보는 식이다. 생존을 위해서 누군가가 오는게 아닌지 둘러보는 것이겠지.

길거리를 지나가고 팔로 휘휘 저어도 끄덕도 안하고 도망도 안가던 비둘기는 어디에 가고 먹이를 먹을 때는 긴장한 모습이라는게 아이러니하다. 그러면서도 그래. 저 비둘기는 사람들이 근처에 오면 날아가는 겁쟁이 비둘기일 수도 있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고, 그래 먹는건 비둘기의 유전자속엔 인간이라는 미물이 등장하기 아주 오래전부터 음식이 훨씬 더 생존에 중요한 것으로 각인되어 있을 수도 있겠단 엉뚱한 생각을 한다.

앞으로 남은 정거장은 세 정거장. 이제 슬슬 패드를 넣고 내릴 준비를 해야겠다.



[출근길 또다른 모닝페이지 2]


오늘은 머릿속에 어떤 생각이 흐르는지 한번 살펴볼까. 가사가 나오던 노래를 멈추고 오케스트라를 검색한다. 오케스트라 지브리가 눈에 띄어 재생. 오 역시 차분하면서도 만화같은 느낌에 빠져든다. 진지하면서도 따뜻한 멜로디가 연주된다.


음악이란 참 신기하다. 결국 건반 하나, 현 한 줄이 각자의 소리를 내는 ‘기능’을 가진 것 뿐인데, 그것이 뒤섞여 조화를 만들고 우리의 감정을 단번에 바꾸어버리는 것. 이런게 마법이 아닌가? 음악을 듣는 것도, 그림을 보는 것도, 우리의 무엇인가를 탁 하고 친다. 아마도 우리가 살면서 잊어버리지 않아야 할 것들이겠지? 아름다운 음악과 그림을 보면서, 그리고 애틋한 이야기를 읽어가며 인간으로 살며 잊지 않아야 할 것들을 계속해서 기억했으면 좋겠다.



[나무 말고 숲을 보는 거. 그거요, 저는 이제 안하려고요]


요새 시간관리, 몰입, 집중 같은 것들이 내 머릿속의 화두다. 그런 주제로 유투브나 책을 좀 읽다보니 결국 모든 것들이 수렴하는 지점이 있다. 결국 뇌과학의 관점인데, 뇌를 속이자(?)는 것. 생각을 할 때도 뇌가 부담을 느끼지 않게 잘게 쪼개고, 하기 싫은 행동이 있으면 아예 생각을 하지말고 먼저 몸으로 반복하여 뇌를 교묘히 속이면, 뇌가 어느순간 태세를 바꾸어 쉽게 한다는 것이다.


아무튼 이런저런 복잡한 생각을 하지 말고 ‘쉽게, 일단’ 해보자는 이야기다. 그렇지.

마치 생각이 짐이고 몸이 수레 같다는 생각을 한다. 생각이 많을수록 수레의 바퀴를 굴리는데 더 힘이 든다. 생각을 좀 빼자. 그러나 내 경우엔 꼭 생각의 정량이 있는 것처럼 매일 해야 하는 분량이 있는 느낌인데 이를 어쩌지.


그렇다면 생각을 어떤 일을 하기 전인, 사전 생각과 그 후인 사후 생각으로 나누어야겠다. 사전 생각은 필요한 경우에만 하고, 필요하지 않은 경우들에선 모조리 빼버리자. 그리고 사후에 그것들을 기록하는 방식으로 생각의 분량을 좀 조정해봐야겠다. 이렇게 일단 적고 어떻게 할지 고민을 하니 나름의 답이 나온다.


내가 살면서 놓친 것들에 관심이 가는 요즘이다. 큰 그림, 나무보단 숲, 일상보단 인생, 구체성이나 물성보다는 관념. 이런 것들은 내 삶에 그간 넘쳐왔다. 나에게는 이제 구체적인 것, 만져지는 것, 작은 것들을 보고 즐길 수 있는 힘이 필요하다. 줌인을 연습해봐야지. 그러면 재밌는게 얼마나 많을까.



[나의 안광은 안녕한가]


만우절이다. 나는 어릴때부터 장난끼가 많았다. 집에서도 누가 오는 기척이 들리면 숨는다던가, 뒤에서 무릎으로 툭 하고 건드리는 것, 볼 옆에 손가락을 두고 이름을 부르면 상대방이 예쁜짓~을 하게 하는 것들처럼 소서로운 장난을 사랑했다. 생각만 해도 재밌으니까. 장난을 준비하던 내 모습을 생각하니 눈빛이 빛나던 모습이 보인다.


이렇게 내 눈빛이 빛나던 몇가지 순간들이 같이 떠오른다. 1. 장난을 준비하며 기대하는 모습. 2. 이벤트를 준비하며 상대방을 놀래킬 상상을 할 때 3. 퀴즈에서 정답을 맞추려고 고민할 때 4. 재미있게 본 작품에 대해 이야기할 때. 생각보다 떠올린 장면은 상황이 확실하고 구체적이다. 나는 생각보다 내가 언제 빛나고 행복한지를 잘 알고있다. 이런 시간들을 늘리며 살아야겠다. 근데 잠깐, 전부 누군가가 필요하다. 먼저 누군가에게 잘해야겠다.



[저 좀 쑥스러운것 같은데요, 아닌가?]


나는 누군가에게 도움을 주었을 때 뿌듯함을 가장 크게 느끼긴 하겠지만, 왠지 모를 어색함을 느끼기는 경우도 허다하다. 완전히 충만하게 기쁘고 싶은데 그렇지 않고 늘상 한켠 찜찜한 기분은 왜일까?

한번도 구체적으로 이 감정이 무엇인지 생각해보지 않았지만, 지금와 표현해본다면 ‘겸연쩍다‘는 단어가 떠오른다. 그런 감정 아래에는 뭐가 있는것일까?

1. 오잉? 내가 이렇게 도움이 된다고? (이렇게 쉬운게 도움이 된다고?) 이거나

2. 이거 별거 아닌데 너무 고마워하네 민망하다 라던가,

아무튼 내가 가진 능력이나 도움보다 과도하게 고마움을 표현할때가 주로 그랬던 것 같다.

흐릿하게 느꼈던 이런 감정들을 포착해서 좀 더 명징하게 표현하고 싶다. 아마도 나와 비슷한 사람이 많으리라 생각된다. 작가들은 그런 힘이 있지. 소설을 읽을 때 감탄하는 포인트 중 하나, 아! 이거 분명히 나도 느낀 감정인데 어떻게 이걸 이렇게 표현해내지? 하는 것. 아마도 내가 말한 저 감정도 훌륭한 작가라면 잘 표현하겠지?

그것을 잘 표현하려면 일단은 그 감정에 숨겨져 있는 의미가 무엇인지를 해체해보아야 알수있는 것 같다. ‘겸연쩍음. 민망함’은 내가 과대포장되는 것에 대한 거부감인것일까? 싶은 생각이 드는 동시에 우리나라에서는 겸손을 미덕으로 두기 때문에 마냥 좋아하고 뿌듯해하면 안된다는 사회적 합의가 내 안에 깊숙이 들어와서였으려나 하는 생각도 든다. 아니면 둘다 합쳐서, 혹은 내가 나 스스로를 과소평가하고 지나친 겸양을 가진 것일지도 모르지.

언젠가 반드시 모두가 공감하고 무릎을 탁 칠만한 방식으로 이 감정을 표현해보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