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번째 여름 합숙

(feat.산적의 두번째 휴가)

by Rachel

나는 그해, 2010년을 잘 기억하지 못한다.
나에게는 가혹한 해였고, 그래서 조금은— 아니, 꽤 힘든 해였다.

그래서일까.
따뜻한 비가 내리던 그날 이후로,
나는 산적에 대해 생각하기를 그만두기로 했다.


대놓고 따돌림이 보이던 동아리 활동도,
좋아하는 선배가 늘 혼내기만 하던 동아리 활동도,
그 무엇도 내 삶에 여유를 주지 않았다.


생각해보면 그때의 나는 이미 여유를 잃은 상태였고,
삶의 이유를 찾느라 버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삶의 이유를 찾는 일은, 생각보다 훨씬 괴로웠다.

나의 사춘기는 늦게 찾아온 만큼,
나를 더 집요하게 괴롭혔다.
나는 남들이 흔히 지나오는 10대의 사춘기를 건너뛰고,
성장통을 스무 살을 넘긴 뒤에야 겪고 있었다.


뒤늦은 아픔은 늘 성장통을 수반하고,
그래서 더 아픈 만큼 성숙해진다고들 말한다.


하지만 성숙이건 뭐건,
겪는 당사자에게 그것은
그저 살이 에이는 괴로움일 뿐이었다.


밥을 씹는 시간조차
모래를 씹는 것처럼 느껴져 입맛이 없었고,
후배들을 바라보노라면
삶의 이유 하나 없이
흘러가는 대로 사는 내가 유난히 초라해 보였다.


차라리 선배들처럼
분명한 이유라도 있었다면 모를까,
그때의 나는
부평초 같은 존재였다.

뿌리를 잃은 풀처럼
물 위를 둥둥 떠다니다가,
어느 순간 가라앉아 버릴 것 같은—

쓰레기처럼 느껴지는 내 인생은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방식으로
나를 괴롭히고 있었다.


버티고, 또 버티던 그때—
잠시 산적이 내게 와
잠깐의 기쁨을 남기고 돌아갔던 날만큼은
이상하게도 또렷이 기억난다.


지금도 그 시절을 떠올리면
말로 다 하지 못할 만큼 괴롭다.

누군가 동아리 활동에 대해 이야기해 보라 하면,
나는 늘 할 말이 없었다.


아침 운동을 하고 있으면
정신도 못 차리고 내가 멍하니 서 있다며
선배들이 죽도(칼)를 쳐서 날려버리는 일이 종종 있었다.

그럴 때마다 나는 눈물을 삼킨 채
바닥에 떨어진 칼을 주우러 갔다.


그런데 그런 사람이
한 명뿐이었다면 괜찮았을지도 모른다.

문제는, 후배들 중에서도
그 행동을 따라 하는 사람이 있었다는 점이었다.


숨에 턱 끝에 다다른 채, 겨우겨우 아침 운동이 끝나고 나면
이어지는 명상 시간.


그 누구도 나에게 말은 안 했다.

하지만, 내 스스로도 내가 경멸스러웠다.

실력도 없는 주제에, 열정도 없다며

나를 향한 말들이 쏟아지는 것 같아 그 시간만 되면
나는 이유 없이 코가 매웠다.


어쩌다 한번, 동기들 중 한명이나 17기 선배들이 있으면 그런 일은 없었다.

그래서 그 때는 신나게 운동을 하고 활짝 웃으며 운동을 끝내곤 했다.



그래서, 산적의 두 번째 휴가는
나에게 반가운 소식이었다.

하지만 곧,
두 번째 여름 합숙의 소식도 함께 들려왔다.

반갑지 않은 점이 있다면—

두 번째 휴가와 두 번째 합숙의 시기가
겹쳐 있다는 사실이었다.

그러다 문득,
지난번의 그 ‘스킨십’이 떠올랐다.


…진짜로
죽을 때가 된 건 아니겠지.

이번에도 그렇게 해대면
머리를 따버리겠어,그런 생각을 하며

나는 기분 좋게 잠들었다.


합숙 둘째 날, 나는 스트레스성 장염으로 걷기 힘들어졌다.

탈수 증상에 가까운, 과민성 장 증후군 같은 반응이었다.

그러자 회장단은 이럴 줄 알았다는 듯
한숨을 푹 쉬더니 쉬라고 말했다.


첫날은 어찌어찌 버텼지만,
두 번째 강행군은
더 이상 버티기 힘들었다.


평소 뛰지도 않던 사람에게
갑자기 내리막과 오르막을 연달아 뛰라고 하면—

그게 극기훈련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나는 그 극기훈련을 버텨내기엔
애초에 너무 지쳐 있었던 것 같다.


그렇지만 셋째 날부터는 다시, 열심히 참여해 보려고 했다.

그런데—

산적의 두 번째 휴가는 취소되었다.

오지 않는다는 말은, 생각보다 더 슬펐다.

그나마 다행인 점이 있다면,
여자 동기인 여니가 합숙에 함께 참여하고 있었다는 사실이었다.

하지만 둘이 따로 이야기를 나눌 여지는 거의 주어지지 않았고,
그런 상태는 정신적으로 지치기엔 충분히 고된 코스였다.



합숙 코스는 일반적인 사람이 소화하기에 충분한 코스였지만,

심적으로도, 육체적으로도 흔들리는 나란 사람에게는 충분치 못했나보다-


다음 날, 나는 운동을 하다 결국 울고 말았다.

아무 일도 아니었다.

정말로, 평소와 다를 것 없는 운동이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
이제는 칼을 뺏지도 않고
나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는 회장단의 태도가

나를 아예 포기해 버린 것처럼 느껴져서,

나는 운동을 하다 말고 끝내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합숙 마지막 날, 산적이 왔다.

“어? 너 휴가 취소…”

“서프라이즈지!”

씩 웃는 얼굴을 보는 순간,
내가 생각보다 훨씬 지쳐 있었다는 걸 알았다.

나는 나도 모르게 그를 껴안고 있었다.

“와… 와줘서 진짜 고마워.
진짜— 위로가 된다.”

당황해하는 그의 표정을 모른 척한 채,
나는 한 번 더 그를 안았다.

정말로, 그 애가 와서 다행이라고 생각한 여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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