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eat. 산적의 휴가)
생일날의 그 특별한 이벤트가 끝난 무렵이었다.
산적이, 드디어 100일 휴가를 나왔다.
나는 100일 동안 쉬는 휴가라서
그래서 100일 휴가인 줄 알았다.
그게 아니라—
군대에 간 지 100일이 지나 처음 나오는 휴가라는 걸,
아주 나중에야 알았다.
동생이 군대에 가고 나서야.
“와, 오랜만이다 산적!”
“그래, 잘 지냈어? 살 좀 찐 거 같다?”
“뭐야, 왜 이렇게 능글능글해졌어?”
보자마자 놀리는 게
내가 알던 산적 같지가 않았다.
게다가 젖살까지 빠져서,
내가 아는 산적이 아니라
어쩐지 다른 사람 같았다.
“너— 내가 아는 산적 맞아? 다른 사람 아니야?”
이상하다는 듯 묻는 산적에게,
나는 팩트를 따지는 게
솔직하고 멋진 거라 믿으며 말했다.
“너 나 싫어하잖아.
잘해주니까, 죽을 때 됐나 싶어서 그래.
너 죽을 때 됐어?”
“뭐?”
당황해하는 산적을 보며 웃었다.
“너 기억 안 나? 우리 처음 만났을 때 내가 싫다며.
대가리 꽃밭이라고 싫어할 땐 언제고,
갑자기 다정한 척이야? 너 진짜 안 어울려. 어색해.”
“내가 그렇게 말했었어? 기억도 안 나.
신경 쓰지 말지.”
“그걸 왜 신경 안 써.
너 말고도 나 싫어하는 동기들 많았잖아.
그래서 더 신경 썼지.”
미안해하는 기색이 역력한 산적에게,
나는 마지막 어퍼컷을 날렸다.
“그리고 그 애들 중에
남은 건 너 하나잖아.
그러면 더 잘 기억해야지.
싫어하는 게 대가리 꽃밭이니까.”
그러자 산적은 진짜 한 방 먹은 얼굴로 말했다.
“그… 그게 그렇게 상처가 될 줄 몰랐어.
미안해.”
미안해하는 산적에게 나는 말했다.
“그런 거 신경 쓰지 마. 상처 받으면 네가 약 발라 줄 것도 아니잖아.
그리고, 상처 받았던 건 이제 신경 안 써.
그러니까 너도 신경 쓰지 마.”
그 말은, 괜찮다는 뜻이 아니었다.
나는 이미 멘탈이 유리처럼 바스러진 뒤였고,
이제는 그런 말조차 상처로 남지 않을 만큼 가루가 되어 있었다.
그래서일까,
나는 그날의 비를 기억한다.
산적이 휴가를 나왔던 날의 비는
조금 이상한 비였다.
따뜻한 비였다.
“어? 이거 뭐야? 비가 따뜻해.”
나는 늘 비에서 차가운 온도를 먼저 느끼는 사람이었는데,
그날만큼은 달랐다. 이상하게도 비가 따뜻했다.
체온과 비슷한 온도여서,
마치—
눈물 같은 비가
조용히 내리고 있었다.
비가 내리는 게 좋아서
그대로 비를 맞고 서 있었더니,
술을 마시던 산적이 밖으로 나왔다.
“뭐 해?”
“따뜻한 비라서. 신기해서 맞고 있지.”
“그게 뭐야. 젖기만 하는데. 들어와.”
“싫어. 실내는 답답하기만 한데, 윗공기 맡는 것처럼
좀 가슴이 트였으면 좋겠다.”
그러자 산적이 말했다.
“내가 윗공기 쐬어 줄까?”
“뭐? 네가 어떻게?”
“업어주든, 안아주든 해서 180cm의 공기를 느끼게 해주면 되지.”
“진짜? 근데 네가 날 어떻게 업어. 너 나 무겁다고 했잖아. 안 돼.”
“업을 수 있어. 나 믿어 봐.”
“에이— 난 못 안고, 못 업는다에 건다.”
“업는다?”
그리고 산적은 나를 정말로 안아서 들어 올렸다.
180cm의 공기는 생각보다 좋았다.
그것보다 더 놀라웠던 건
산적의 변화였다.
나와의 스킨십을 질색하던 산적이,
오히려 스킨십을 먼저, 적극적으로 주도하고 있었다.
그날 밤,
나는 잠자리에 들기 전까지
산적의 이상한 행동에 대해
한참을 생각하다가 잠들었다.
…진짜로
죽을 때가 된 건 아니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