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항에서 20시간 보내기

기다림을 보내기로 바꾸는 순간, 은사는 작품이 된다

by 김혜신

조지아 아르메니아의 2주간의 일정이 끝나고 한국을 향해 돌아오는 날이다.

빡빡한 일정과 긴 여정의 소화가 채 되지도 않았는데 벌써 집으로 가는 길이다.

하루의 시간보다 빨리 느껴지는 2주의 시간이다.


조지아를 가는 방법은 꼭 경유지를 거쳐야 한다.

터키나 카자흐스탄을 경유하는데 우리는 후자를 선택했다.

소련의 지배하에 있다 1991년 이후 독립한 15개국 중 하나인 카자흐스탄을.

2025년 추석의 긴 연휴를 이용한 조지아 여행이기에 덕분에 카자흐스탄지역을 경유할 여유도 있었다.

카자흐스탄에서 가장 유럽분위기가 나는 알마티와 지금의 수도 아스타나를 거의 20시간씩 경유하는 또 하나의 여행이 기다리고 있었다.

조지아에서 알마티까지의 4시간 남짓의 비행 이후 우리는 새벽 알마티 시내 호텔에 도착했다.

19시간의 스탑오버를 즐기기 위한 공항 호텔 간의 피업서비스를 이용하니 저렴한 가격에 카자흐스탄의 분위기를 느낄 수 있었다.

하루 종일 걸어서 이동하며 카자흐스탄의 현대식 변화를 볼 수 있었다.

유목민의 느낌보다 현대식 느낌이 강한 이곳은 금융, IT, 관광, 무역, 제조의 근간을 두고 있는 카자흐스탄 경제의 중심지이다. 우리나라와 비슷한 수준의 차들이 도로를 누비며, 현대식 아파트와 공원이 곳곳에 놓여있다.

100년이 넘은 전통시장, 그린 바자르의 방문은 이들의 다양한 먹거리를 눈으로만으로도 호강할 수 있는 곳이다. 다양한 민족의 음식처럼 다양한 민족을 볼 수 있는 심장 같은 이곳의 명소는 깊은 인상을 준다.

알마티의 시장방문과, 훌륭한 양고기 레스토랑, 그리고 현대식 건물과 깨끗한 공원을 둘러보는 하루의 일정은 특정한 명소를 가지 않아도 그 자체로 훌륭한 관광이었다.

20251014_131426.jpg
20251014_154602.jpg

알마티 하루일정을 마치고 집으로 가면 얼마나 좋겠냐만 우리는 아스타나를 한번 더 거쳐야 했다.

알마티에서 1시간이 넘게 비행해 도착한 이곳은 거대한 초원 한가운데의 찬 바람을 그대로 받아야 하는 냉지였다. 10월 중순의 날씨지만 영하로 쭉 내려간 기온으로 공항 안에도 냉기가 돌았다.

집으로 가고 싶은 마음이 커지니 알마티처럼 일일 투어를 하기보다는 공항 내의 캡슐호텔에 눈이 더 간다.

그 넓은 공항을 둘러보며 라운지로 들어갈 생각만 커졌지만 정해진 시간이 있어 그것도 가능하지 않았다.

영하 10도를 뚫고 일일투어를 할 것이야, 공항 내에서 20시간을 보낼 것이냐라는 의견이 점차 공항에서의 시간 보내기로 기울어지기 시작했다.

냉기가 도는 공항에서 20시간 살아남기가 결정된 것이다.


한국에서 나는 주로 산책하는 시간을 즐긴다.

우리 집 노견이 12살에도 불구하고 5km 이상을 걸을 수 있는 것도 그 영향이 크다.

우리는 여름 내내 거의 매일 하루 6km 정도의 호수공원까지의 산책을 했다.

하루 일과가 정리되는 저녁 9시 이후 집에서 호수공원까지의 왕복 5~6km를 걷다 보면 여름의 더위가 싱그럽게 느껴졌었다. 그러기에 강아지 유모차를 타고 다니는 노견과는 달리 우리 집 강아지는 무척 건강한 편이다.

나이가 들면 사람이나 동물이나 약해진다.

무엇보다 다리에 힘이 빠지면 걷는 것이 부담스러워진다.

그때부터 문제가 심각해진다.

자꾸 앉을 곳을 보고 덜 걸으려 하게 되면서 몸은 더 약해진다.

스스로 걷기는 것이 힘드니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해진다.

강아지 유모차에 올라타 시선만 외부에 두는 시간이 곧 도래하는 것이다.

그러니 스스로 찾아가는 것보다 도움을 받아야 하고 수동적 움직임으로 선택이 줄어든다.

유모차를 밀거냐, 탈거냐의 위치는 능동과 수동의 위치로 전환되어 버린다.


'공항에서 20시간을 기다려야 해'를 '공항에서 20시간을 보내기'로 전환했다.

보내기라는 말에는 넓은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 다양한 선택들이 줄비해 있다.

그래서 미션을 만들어보았다.

공항에서 20시간 보내기라는 영상을 만들어 보기로.

적극적 행동파 Y와 기획가 K가 있으니 난 밑그림의 취지와 정리만 하면 되었다.

이 삼총사의 의견은 만장일치로 합의가 되었고 두 남자의 의기투합된 모습으로 참 많이 웃었다.

우리는 공항에서 연기자도 되고, 작가도 되고, PD도 되었다.

아스타나 공항 구석구석을 돌아다니며 장소 물색도 하고 다양한 먹거리 취재도 해보고 재미있는 포즈도 취해보았다.

삼총사의 시너지가 마치 생강과 대추가 만나 최상의 영양을 발휘하듯 그렇게 추위 속에서도 잊지 못할 추억거리를 만들었다.

그들의 연기력과 나의 편집이 만나 하나의 작품으로 탄생될 때쯤 우리는 라운지에 들어갈 수 있는 시간을 맞이하게 되었다. 거의 17시간을 공항을 휘잡고 돌아다니며 3분 남짓의 영상이 탄생되었다.

강아지 유모차를 열심히 밀고 다니듯 우리는 그렇게 나이에 상관없는 짓을 공항에서 마음껏 하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문득 생각이 떠오른다.

각자의 달란트가 다 다르듯 자신이 가장 잘할 수 있는 일이 다 다르다.

이것이 잘 조합을 이룰 때 멋진 작품은 탄생한다.

서로의 장점이 잘 드러나는 사역에 기쁨이 묻어난다.

하나의 얇은 실들이 여러 겹 꼬아져 튼실한 실이 되듯, 그렇게 서로의 은사들이 섞일 때 놀라운 시너지가 일어난다.

공항에서의 20시간 속에 드러난 서로의 모습이 뚜렷이 보인다.

뚜렷한 개성의 3명이 떠난 20일 여정이 이 공항이라는 한정된 공간에서 명확히 보인다.

그리고 각자의 가진 은사들이 삶속에서 어떻게 쓰여왔고 쓰여질지도 그려진다.

조지아 아르메니아를 떠나는 마지막 여정의 뚜껑을 닫을 때조차 그냥 닫지 않았던 우리 세명의 조합의 인상 깊은 공항 20시간 보내기였다.

https://youtu.be/ZTBkHgT3HQk?si=EIu_iK0XY6hFASBM

이전 13화모든 것은 나로부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