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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혜신 Jun 27. 2024

철장 안은 어떨까

길들여지는 삶의 애잔함

 주차한 차의 라이트가 철장 안을 비춘다. 아직 어둠이 깔린 새벽이지만 이미 떠오른 해로 주변이 눈앞에 명확히 들어온다. 한평 남짓한 철장 안에는 반쯤 채워진 물그릇과 조용한 집이 놓여 있다. 그 안에 누가 있는지 보이지 않아 조용히 불러본다. "검둥아 자니?" 이름을 알지 못해 검은색 진돗개의 이름을 그렇게 불러본다. 자는지 귀찮은지 반응이 없는 검둥이를 뒤로 하고 나는 조리실 안으로 들어갔다.


 잠시 쉬는 시간 포도덩굴이 멋들어지게 휘감긴 벤치 주위에 앉아 주변을 둘러본다. 새벽에 잠시 들여다본 철장 안은 아직도 조용하다. 집안에서 쉬고 있는 검둥이는 아직도 나올 생각이 없는 것 같다. 늘 그곳에 갇혀 있는 검둥이가 안쓰럽고 불쌍히 보여 이름을 불러보지만 무감각해진 사람들처럼 검둥이 또한 늘 같은 모습이다. 그 모습이 참 닮아 있다. 초점 없이 멀어진 눈빛과 윤기 없는 얼굴빛 그리고 느려진 동작은 어떤 생각을 가졌고 무슨 마음일까가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그렇게 준비된 음식을 한 숟갈 또 한 숟가락을 뜨며 입으로 오물거린다. 그냥 무의식적인 반응이다. 그렇게 먹고 앉아 있다 다시 눕는 치매 어르신들의 모습이 그러하다. 자신이 할 수 이는 선택이 손에서 다 떠난 모습이다. 나의 의지와 나의 상상력도 놓은 지 오래전이다. 그렇게 내 맡긴 자신은 운명 앞에 놓인다. 힘없는 지푸라기처럼


 대접에 밥을 담고 국물과 고기를 담는다. 사람이 먹기에는 너무 잡탕 같은 그 그릇을 보고 물어보니 개밥이란다. 사료를 잘 안 먹어서 조금씩 주다가 이제는 이 밥을 너무 기다려서 그렇게 매일 개밥을 사람 밥으로 챙겨 주신다고 하신다. '아~ 그 검둥이를 말씀하시는구나'라는 생각에 갑자기 검둥이의 낙이 뭘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극한의 상황에 빠진 사람이 가진 기본 욕구가 뭘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극심한 포로수용소에 갇힌 사람에게 가장 기본적인 생존의 욕구 중 하나는 음식인 것처럼 이 밥을 먹는 것이 검둥이의 유일한 낙이 되겠구나라는 동정심이 올라온다. '검둥아'라고 불러보는 그 사람의 목소리와 손길이 얼마나 그리웠을까? 그것이 지나 무감각해지고 나서 남는 기본 욕구는 아마도 음식일 것이다.

그 검둥이를 떠 올리다 문득문득 떠 오르는 이들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간다.

허겁지겁 삼각김밥을 먹어치우는 아이, 입 안의 이빨이 다 썩어도 탄산음료와 사탕을 끊지 못하는 아이, 아무리 먹어도 채워지지 않는 허기감이 눈물 어린아이의 배를 부르게만 함을 보게 된다.

그 허기감이 어디서 왔는지도 모른 채.


어린아이가 자라 어른이 된다. 자신의 손에 놓인 선택이 도전과 기회가 아닌 수단이 된다. 그렇게 늙다 노인이 된다. 어느새 새하얗게 된 머리카락과 늘어진 피부는 그간의 세월을 말해주지만 자신이 느끼는 것은 그냥 긴 하루일 뿐이다. 그렇게 살다 주변사람들과 멀어진다. 갈 곳이 나의 집이 아닌 요양원으로 가게 될 시점도 오게 된다. 그렇게 운명의 흐름을 따라야 할 시간이 온다.


길들여진다는 것은 자신의 할 수 있는 기회를 내려놓고 능력의 한계를 갖는다는 것이다. 

긴 다리로 빠르게 달리고 긴 콧날로 냄새를 맡을 수 있는 검둥이의 진가가 철장 안에서 묻혀버린다. 그렇게 자신의 힘이 갇힌 공간에서 꺾여버린다. 풀이 죽고 반응이 없는 검둥이의 애잔함이 이곳에서 보내는 어르신들의 삶으로 이어진다. 사계절의 옷과 함께 이곳이 집이 되어 함께 하는 보호사들이 가족이 된 이곳의 삶. 먹여주고 씻겨주고 재워주는 이곳에서 자신의 선택과 의지가 꺾여 길들여지는 것조차 알지 못하는 삶을 사시는 치매 어르신들. 그들도 찬란한 시절이 있었을 것이다. 손을 뻗어 잡고 움켜쥐던 그 시절이 있었을 것이다.


추락하는 것에 날개를 달아 멈출 수 없다면 어디서부터 다시 시작해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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