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기종목 중에 가장 좋아하는 것을 고르라면, 망설임 없이 농구를 뽑곤 한다. 몇 가지 이유가 있는데 일단 야구와는 달리, 경기 시간이 한 쿼터에 10분으로 딱 정해져 있는 점이 좋다. 제한된 시간 안에 승부를 봐야 하기 때문에 시간에 따른 압박은 긴장감을 유발해 경기를 늘어뜨리지 않는다. 축구는 득점하기가 어려운 반면, 농구는 공격과 수비를 반복하며 경기가 빠르게 진행된다는 점이 매력적이다. 코트를 가득 메우는 드리블 소리, 농구화 끌리는 소리 그리고 수비(디펜스)를 외치는 응원소리 등등 심장을 뛰게 만드는 요소가 넘친다.
응원하는 농구 팀이 있어 고등학생 때 농구 경기를 자주 보러 다녔었다. '슬램덩크'가 유명한 만화라는 것쯤은 진작 알고는 있었지만 슬램덩크 세대가 아니었기에 큰 관심이 없었다. 한번 읽어볼까, 싶다가도 24권이나 되는 원작을 볼 엄두가 차마 나지 않았던 것 같다. 어쨌든 딱히 흥미를 느끼지 못했다. <더 퍼스트 슬램덩크>를 보기 전까지는 말이다.
설 연휴 동안 더빙판으로 2차 관람을 마쳤고 그 이후로도 한 번을 더 봤다. 이 영화를 보고 나니 이제야 왜 사람들이 슬램덩크에 열광하는지, 그 이유를 알 것만 같다. 농구를 좋아하지만 아직도 농구를 다 안다고 자신감 있게 말하지 못하는 자칭 '농알못', '슬알못' (농구, 슬램덩크 잘 알지 못하는)인 나도 북산에 진심이 되어버렸으니까! 지극히 개인적인 관점에서 <더 퍼스트 슬램덩크> 관람 후기를 남겨보려 한다.
1. 뚜렷한 개성과 서사를 지닌 캐릭터
슬램덩크 속 인물들에 빠질 수밖에 없는 이유는 모두가 개성 있는 인물이면서 동시에 각자 서사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원작에서 송태섭은 비중이 적지만 영화 속에서는 가족, 특히 형과 관련된 서사를 풀어내며 이야기를 이끌어간다. 농구선배이자 각별한 사이였던 형을 잃게 된 송태섭이 형을 따라 같은 등번호를고수하는 것, 부족한 신체 조건을 극복해 결국 산왕의 압박 수비를 뚫는 것 모두 송태섭이 어떤 성격을 가졌는지간접적으로 말해준다. 형에 대한 그리움과 농구를 향한 집념이 그 누구도 막지 못할 만큼 강한 캐릭터라고 느꼈다. 이런 송태섭을 중심으로 북산의 5인방인 채치수, 정대만, 강백호, 서태웅은 성격은 제각각이지만 농구를 향한 열정 하나로 결속된다.
출처 - CGV
북산의 든든한 버팀목인 주장 채치수, 무릎부상으로 방황하다가 다시 북산으로 돌아온 불꽃남자 정대만(나의 최애 캐릭터!), 리바운드의 왕이자 빨강머리 농구천재 강백호 그리고 과묵하지만 언제 어디서든 제 역할을 소화해 내는 서태웅까지 모든 인물들이 확실하게 다른 배경과 개성을 가지고 있다. 그들 사이의 관계성 또한 한 단어로 설명할 수 없이 꽤 복합적이다. 그래서 영화를 보는 내내 인물 사이의 관계를 파악하는 재미가 있었다.
2. 강팀에 맞서 성장하는, 진정한 팀의 이야기
한 번도 져본 적이 없는 산왕공고는 강팀이다. 무적의 산왕을 상대로 경기하는 북산은 농구를 시작한 지 4달밖에 되지 않은 강백호를 출전시키는 팀이다. 원작을 보지 않은 상태에서 영화를 봤기 때문에 북산이 20점 차이로 지고 있을 때는 정말 손에 땀이 날 정도로 긴장했다.
'이러다 지는 거 아니야?'
'졌지만 잘 싸웠다'라는 말이 있듯, 북산이 아쉽게 질 것이라고 생각했다. 결과와 상관없이 강팀을 상대로 최선을 다해 좋은 경기 내용을 보여줬을 것이라는 결말을 예상했지만 이는 완전히 오산이었다.
농구는 5명이 함께 호흡하는 단체 스포츠이다. 개인의 역량이 아무리 뛰어나도 5명이 하나가 되지 않으면 경기를 풀어내기가 쉽지 않다. 승부욕이 강한 서태웅이 순간적으로 공을 패스해야겠다고 판단했기 때문에 득점할 수 있지 않았나? 한나 선배를 비롯한 상대 팀도 '서태웅이 패스를?' 하고 놀랄 정도로 서태웅의 플레이가 인상적이었던 이유는 팀을 위한 경기를 했기 때문이다. 안 감독님의 말처럼 채치수와 권준호가 탄탄히 쌓은 배경에 나머지 선수들의 강점들이 더해져 지금의 북산을 완성했다고 생각한다.
출처 - CGV
북산은 약팀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다르게 보면 성장할 수 있는 가능성이 큰 팀이라고 할 수 있다. 잠재적인 능력을 보유한 선수들은 경기가 진행될수록 비로소 한 팀이 되어간다. 개인의 성장은 곧 진정한 팀의 성장으로 이어지기 마련. 섞이지 않을 것만 같은 5명이 모여 승리를 향해 의지를 다지는 장면에서는 그들의 끈끈한 팀워크가 느껴져 감동적이었다. 점점 발전하는 팀은 응원할 수밖에 없다.
3. 정교한 작화와 연출
영화가 시작하자마자 놀랐던 것은 작화였다. 작화가 너무 정교한 나머지 애니메이션이 아니라 정말 캐릭터가 살아 움직이는 듯했다. 경기할 때 생동감 넘치는 동작을 비롯해 유니폼이 펄럭이는 모양, 슛할 때 손 모양, 림이 공에 흔들리는 모양 등등 모든 게 자연스러웠다. 그야말로 예술이었다. 그림을 잘 모르는 관객이라도 제작에 얼마나 많은 공을 들였는지 알 수 있었을 정도로 말이다. 작은 디테일까지 놓치지 않는 작화는 영화에 깊이 빠져들게 했다.
하지만 나를 가장 미치게 했던 것은 바로 연출이다. 이 영화는 유독 연출이 돋보이는 장면들이 많았다. 연필로 슥슥 빠르게 스케치한 선수들의 크로키가 움직이기 시작하는 오프닝 영상은 관객들의 시선을 사로잡기 충분했다. 마치 원작인 만화에 생명을 불어넣어 스크린 속에서 살아 숨쉬기 시작하는 것 같았다. 송태섭을 시작으로 흰 배경에 북산, 산왕 선수들이 차례로 그려지는데 이때의 묵직한 베이스를 잊을 수 없다. 빠른 베이스와 드럼소리는 관객들에게 박진감 넘치는 산왕전을 미리 예고한다.
"뚫어 송태섭!" 경기 후반에 송태섭이 존 프레스를 뚫고 나가는 장면의 연출도 인상적이었다. 자신보다 키가 월등히 큰 선수 둘 사이를 드리블하면서 뚫는 순간을 슬로 모션으로 다양한 각도에서 보여준다. 그러다가 속공을 위해 내달릴 때 빠른 비트의 록 음악이 흘러나온다. 이 장면이 선사하는 짜릿한 카타르시스는 감히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이다. 나도 이 짧은 순간에 마음을 뺏겨 몇 번이고 N차 관람을 했던 것 같다. 이제부터 북산이 반격한다고 선포하는, 강력한 연출이었다고 생각한다.
영화의 피날레는 산왕전의 마지막 1분이 장식한다. 20점 차이를 거의 따라잡은 북산이 역전에 역전을 거듭하는 장면은 음소거가 된 텔레비전처럼 경기가 진행된다. 흥미로웠던 건 이때 영화관도 정적을 이룬다는 것이다. 모든 관객들이 팝콘을 먹다가도 숨죽이며 북산의 공격에만 집중한다. 여러 사람이 다 같이 보는 영화관에서 한마음 한뜻으로 웃고, 간절히 응원하는 경험은 처음이라 신선했다. 영화가 아니라 진짜 농구 경기를 관람하는 기분이었다. 그렇게 역전골을 넣고 서로 투닥거리던 강백호와 서태웅이 하이파이브를 하는 장면에서는 웃음이 새어 나온다. 그제야 안도의 숨을 뱉고 북산고 농구부도, 관객들도 승리를 만끽한다.
많은 사람들이 이 영화에 열광하는 이유는 단순하면서도 특별하다. 원작을 사랑하는 슬램덩크 세대 또는 마니아들에게는 추억 속 작품이 살아 움직이는 듯한 감동과 향수를 일으키는 반면, 나처럼 원작을 보지 않았던 사람들에게는 경험해보지 못한 새로운 충격을 안겨주기 때문이 아닐까. 농구를 소재로 한 영화이지만 모두가 공감하고 몰입할 수 있는 지점이 많아 농구에 대해 잘 모르는 사람에게도 꼭 추천하고 싶다. 이제 원작을 정주행 할 일만 남았는데 내가 모르는, 어떤 새로운 이야기가 기다리고 있을지 벌써 기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