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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레이첼 Dec 04. 2023

3년 후 스물세 살의 나는 실종 상태

그때까지 살아는 있을는지

삶에 대해 깊은 회의를 느끼고 자살 직전까지 갔던 친구를 만났다. 이 친구는 천성이 낙천적이고 우울증을 극복한 상태라 살아있는 게 너무 즐겁다고 했다. 내 우울한 얘기도 기꺼이 들어주겠다는 친구라서 나도 나의 왜곡된 생각들을 가감 없이 뱉었다. 그러니까 그 친구와 내 차이점이 극명하게 보였다.



몇 번이고 다시 태어날 거라는 친구의 말이 나에게는 외계어처럼 들렸다. 내가 지금 뭘 듣고 있는 거지 싶었다. 혹은, 친구가 먼 미래의 얘기를 할 때나, 농담으로 제사상 얘기를 할 때 내가 포함된 미래가 그려지지 않았다. 그게 내 제사상이었으면 했다.

그때까지 살아는 있을까…”라는 내 말에 친구는 그러지 좀 말라며 웃음을 보였다.



나는 지금 긍정적인 생각의 필요성조차 느끼지 못하고 있다. 나아지고 싶지 않다. 우울이 나를 잡아먹었으면 좋겠다.

그 이유는 이전 글 참고



친구와 분위기 좋은 바에서 얘기를 나누니 ‘살아볼까?’ 하는 마음이 잠깐 모습을 비추곤 사라졌다. 그 짧은 몇 초가 얼마나 쌓여야 삶에 대한 애정을 되찾을 수 있을까? 정말 그 순간뿐이다. 타인들과 있을 땐 자지러지게 웃다가도 등을 돌려 헤어지는 순간 우울의 파도에 휩쓸린다.



오늘 나는 많이도 웃었는데, 그게 행복을 뜻하진 않는 건지, 여전히 살아가는 것이 무섭다. 끔찍하다.



살아가기 싫을뿐더러, 싫어하고 싶다. 나도 날 이해할 수 없다. 우울이 내 사고체계까지 헤집어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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